우리 옛 그림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2

從心所欲 2021. 10. 12. 13:33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의 고사인물도 8점은 등장 인물을 산수 배경과 자연스럽게 조화시키는 정선(鄭敾) 방식의 고사인물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평을 얻고 있다. 조선시대 고사인물화가 대개 중국 성현과 은자들을 광범하게 포괄하는 양상과 달리 정선이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에 국한시켜 그린 점은 이례적이다.

화첩의 고사인물도는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려졌고 화폭의 크기는 세로 30.3㎝, 가로 20.3㎝으로 해악팔경보다는 큰 편이다. 고사인물도들은 모두 송대(宋代) 유학자 8명의 행적이나 시문(詩文)을 화재(畵材)로 삼은 것이다.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중 <염계상련(濂溪賞蓮)>, 견본담채, 30.3 x 20.3cm, 우학문화재단]

 

첫 번째 <염계상련(濂溪賞蓮)>은 성리학의 기초를 닦아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에게 학문을 전수한 주돈이(周敦頤, 1017 ~ 1073)에 대한 것이다. 주희(朱熹)가 도학(道學)의 개조라고 칭한 인물이다. 주돈이는 만년에 장시성 여산(廬山)의 연화봉(蓮花峰) 아래에 염계서당(濂溪書堂)을 짓고 학생들을 지도하며 은거하여, 세간에 ‘염계선생(濂溪先生)’으로 불렸다.

그는 <애련설(愛蓮說)>이라는 글을 통하여 연꽃을 이렇게 예찬했다.

 

물과 육지에서 피는 초목의 꽃 가운데에는 사랑스러운 것들이 매우 많으나,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고, 당나라 이래로는 세상 사람들이 모란을 매우 사랑하였다. 나는 유독 연꽃이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럽혀지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어 있고 밖은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 치지도 않으며,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고 우뚝한 모습으로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하거나 가지고 놀 수 없음을 사랑한다.

 

이어 그는 “국화는 꽃 가운데 은자(隱者)이고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꽃 가운데 군자(君子)라고 하겠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것은 도연명 이후에는 들은 바가 드물고, 연꽃을 사랑하는 것은 나와 함께 할 이가 어떤 사람일까?” 라며 연꽃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나타냈다.

염계상련(濂溪賞蓮)이란 화제가 쓰인 이 그림은 단순히 ‘염계 주돈이가 연꽃을 감상한다’는 뜻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군자의 도(道)를 사모하는 선비의 모습을 상징하는 그림인 것이다.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중 <방화수류(訪花隨柳)>, 견본담채, 30.3 x 20.3cm, 우학문화재단]

 

<방화수류(訪花隨柳)>는 북송(北宋)의 유학자 명도(明道) 정호(程顥, 1032 ~ 1085)의 시 구절에서 화제를 따 온 그림이다. ‘봄날에 우연히 짓다’라는 뜻의 <춘일우성(春日偶成)>이라는 시(詩)의 둘째 구절이다.

 

雲淡風輕近午天 구름은 맑고 바람이 가벼운 한낮에
訪花隨柳過前川 꽃을 찾고 버드나무 따라 앞 시내를 건넜네.
傍人不識余心樂 주위 사람들 내 마음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將謂偸閑學少年 한가한 틈을 타서 젊은이를 흉내 낸다고 하네.

 

시는 자연에서 도(道)를 즐기고자 하는 선비의 취향을 표현한 것으로, 그림에도 봄날에 꽃과 버드나무를 따라 즐기는 고사(高士)의 모습이 그려졌다. 수원 화성 동북각루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는 이름도 이 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정호는 자연의 질서를 주관하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이(理)’라 부르고, 우주(宇宙)의 본성과 사람의 성(性)이 본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주희(朱熹)에게 영향을 미쳐 뒷날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불리는 성리학(性理學)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주돈이와 정호 · 정이 형제를 계승한다는 ‘도통론(道統論)’ 에 따라 동생 정이(程頤)와 함께 이(二) 정자(程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중 <부강풍도(涪江風濤)>, 견본담채, 30.3 x 20.3cm, 우학문화재단]

 

<부강풍도(涪江風濤)>는 정호의 동생 이천(伊川) 정이(程頤, 1033 ~ 1107)에 대한 고사를 다룬 것이다. 조정의 관리로 있을 때 정이의 학문은 소식(蘇軾)을 따르는 무리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당화(黨禍)를 입어 사천성(四川省) 푸저우[涪州]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유배를 가던 길에 거센 풍랑을 만났는데, 다른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정이만은 의연한 자세를 유지했다. 이를 보고 강가의 나무꾼이 정이에게 "죽으려고 이러는가, 달관해서 이러는가?"라고 물었다는 고사다. <부강풍도>는 그런 고사를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중 화외소거(花外小車), 견본담채, 30.3 x 20.3cm, 우학문화재단]

 

<화외소거(花外小車)>는 안락선생(安樂先生) 소옹(邵雍, 1011 ~ 1077)에 관한 고사를 다룬 그림으로 고사인물화에 자주 등장하는 화제다.  

소옹은 나이 54세 때에 낙양으로 이사하였는데 사마광(司馬光)을 비롯한 벗들의 도움을 받아 천진교(天津橋) 가까운 곳에 집을 마련하였다. 어느 날 사마광과 소옹이 사마광의 별서(別墅)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서 사마광이 술상을 준비하고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옹이 오질 않았다. 그러자 사마광은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시 한 수를 읊었다고 한다.

‘소요부와 약속을 했지만 오지 않는다.’는 뜻의 <약소요부부지(約邵堯夫不至)>라는 시다. 요부(堯夫)는 소옹의 자이고 시호가 강절(康節)이라 소강절(邵康節)로도 불린다. 

 

淡日濃雲合復開 옅은 해 짙은 구름에 가렸다 다시 열리고
碧嵩淸洛遠縈回 높고 푸른 산 맑은 낙수 저 멀리 둘러 있네.
林間高閣望已久 숲 속 높은 누각에서 바라보기 오래건만
花外小車猶未來 꽃 너머 작은 수레는 아직도 오질 않네.

 

소옹은 동자가 미는 작은 수레를 즐겨 타고 낙양성을 출입하였는데, 이 ‘작은 수레[小車]’는 소옹의 이동수단인 동시에 그의 소박한 낙양생활을 상징하는 상징물이기도 한 것이다. 소옹이 꽃구경에 빠져 약속을 잊어버린 것을 노래한 사마광의 이 시 구절은 이후 중국 북송의 5대 현자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소옹을 그릴 때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화제가 되었다.

 

 

 

참고 및 인용 : 문화재청, 중국의 명문장 감상(김창환, 2011, 한국학술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