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김홍도의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1

從心所欲 2021. 10. 16. 10:05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명에는 《산수화》 또는 《김홍도필산수도(金弘道筆山水圖)》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에 해당하는 그림 8점이 있다. 조선에도 잘 알려져 있던 중국의 역대 인물들을 소재로 한 그림들이다. 그림의 크기로 미루어 병풍으로 제작되었다가 해체된 병풍차(屛風次)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홍도필산수도(金弘道筆山水圖)》 中 <취후간화(醉後看花)>, 사본(絲本)담채, 98.2 x 43.3cm, 국립중앙박물관]

 

‘취한 뒤에 꽃을 본다’는 뜻의 <취후간화(醉後看花)> 그림에는 두 인물이 마주 앉은 집의 넓은 창 바깥에 매화나무와 마당에 두 마리의 학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이 매화와 학을 근거로 그림 속 주인공이 북송 때의 시인 임포(林逋, 967 ~ 1028)로 추정되고 있다.

 

임포는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매화 300본을 심고 학 두 마리를 기르며 20년간 성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일생 독신으로 살았다. 임포 자신이 말한 “매화를 아내로 여기고, 학을 자식으로 여긴다.”는 말을 끌어다 사람들은 그를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매진하여 경사(經史)와 백가(百家)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성품이 고고하여 영리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때때로 벗들과 조각배를 타고 서호(西湖) 주변의 사찰을 찾아가 고승(高僧)들과 교유를 할 뿐이었다.

 

매화를 좋아하여 매화를 노래한 시가 많았으나 임포는 시를 쓰고 그 자리에서 버리고는 남겨 두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월이 지나 임포가 늙었을 때 어떤 사람이 어찌 시를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지 않느냐고 묻자, 임포는 “내가 시로 이름을 떨치기 싫어 산 속에 은거하였는데, 하물며 후세에 전하고 싶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300여 수의 시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어느 봄날 저녁에 서호(西湖) 에서 물에 거꾸로 비친 매화의 정취에 감동하여 읊었다는〈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시가 유명하다. 송대(宋代)의 문인 구양수는 이 시를 최고의 매화시로 평하였다. 연작 2수(首) 가운데 특히 첫째 수(首)가 유명하다.

 

衆芳搖落獨占盡 뭇 꽃들 시들어 모두 졌는데 홀로 선연히 피어
風情向小園喧姸 조그마한 정원의 풍정을 독차지하였구나.
疎影橫斜水淸淺 성긴 가지 그림자는 호수에 어리비치는데
暗香浮動月黃昏 그윽한 향기가 움직일 때 달은 몽롱하구나.

 

이 시는 매화의 아름다움을 읊은 명시(名詩)의 전형으로 이후 중국과 조선의 문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지면서 임포의 명성을 높여주었다.

 

[《김홍도필산수도(金弘道筆山水圖)》 中 <동산아금(東山雅襟)>, 사본(絲本)담채, 98.2 x 43.3cm, 국립중앙박물관]

 

동산(東山)은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유명한 산이다. 중국 동진(東晋)의 문인이자 군사전략가, 정치가였던 사안(謝安)은 젊은 시절 벼슬할 생각은 않고 이 동산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 삼아 한가롭게 지냈다. 조정에서는 그의 학문과 지혜를 높이 사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벼슬을 제의했지만 그 때마다 사안은 한결같이 “내가 있을 곳은 이 동산이지, 결코 조정이 아니오.”라는 대답으로 거절했다. 그는 중국의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함께 회계 동산에 올라 시를 읊조리고, 왕희지 행서의 정수로 꼽히는 <난정집서(蘭亭集序)>의 탄생 현장인 난정수계(蘭亭修稧)에도 참여하여 시를 남겼다.

 

사안과 관련해서는 ‘풍류가 있는 것이 사안(謝安)을 닮았다’는 뜻의 풍류안석(風流安石)과 ‘동산에 높이 누웠다’는 동산고와(東山高臥)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사안이 조정의 부름을 계속 거절한 것을 동산에 높이 누운 것에 비유하여 생겨난 말인데 이후 세속을 피해 은거하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다. 그래서 천하의 이태백(李太白)도 사안(謝安)에 대해서는 한 수 접고, 일생동안 그를 우상으로 삼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중국에서 사안을 소재로 하는 고사인물화로는 기녀를 동반하고 동산에 오르는 장면을 담은 ‘동산휴기(東山携妓)’가 가장 많이 그려졌던 것으로 전한다. <동산아금(東山雅襟)>은 ‘동산의 우아한 옷고름’이라는 뜻으로, 여인 또는 기녀들과 시회(詩會)를 열었던 고사를 그렸다는 설명이 붙는다. 개인적으로는 김홍도가 ‘동산휴기(東山携妓)’와 같은 소재를 그리면서 다만 화제를 더 운치 있게 바꾼 것이라 생각된다.

사안은 마흔 살이 되는 해에 동산에서 나와 벼슬을 하였는데, 전진(前秦)의 백만 대군을 웃으면서 격퇴하고, 반역을 꾀하고자 자신을 죽이려 찾아온 대사마(大司馬) 환온(桓溫)을 담담한 태도로 물리쳐 나라에 두 번씩이나 큰 공을 세우고 재상(宰相)에까지 올랐다.

 

[《김홍도필산수도(金弘道筆山水圖)》 中 <적벽야범(赤壁夜泛)>, 사본(絲本)담채, 98.2 x 43.3cm,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의 적벽(赤壁)은 두 가지 일로 인하여 유명하다. 첫 번째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오(吳) 나라 손권(孫權)의 장수 주유(周瑜)가 위(魏) 나라 조조(曹操)의 전선(戰船) 모두를 불살라 이긴 적벽대전이고 또 하나는 북송(北宋)의 대표적 문인이었던 소동파가 지은 <적벽부(赤壁賦)>라는 글이다.

 

<적벽부(赤壁賦)>는 소식(蘇軾)이 조정을 비판한 시로 투옥되었다가 호북성(湖北省) 황주(黃州)로 좌천되었을 때 황강현(黃岡懸)의 적벽을 선유(船遊)하고 지은 글이다. 1082년 7월과 10월의 보름을 전후한 날에, 두 번에 걸쳐 적벽을 찾았고 그때마다 글을 남겼는데 7월에 지은 것을 <전(前)적벽부>, 10월에 지은 것을 <후(後)적벽부>라고 한다.

소식이 남긴 글에 의하면 7월에는 동행자가 1명이었고 10월에는 두 명이었다. <적벽야범(赤壁夜泛)> 그림에는 동행인이 1명만 그려져 있고 퉁소를 부는 장면이 묘사되어, <전(前)적벽부>를 바탕으로 한 그림으로 해석되고 있다.

 

<전적벽부(前赤壁賦)> 앞부분

壬戌之秋 七月旣望
임술(壬戌)년 가을 7월 기망(旣望, 16일)에,

蘇子與客 泛舟遊於赤壁之下
나 소식은 손님과 함께 적벽(赤壁)아래 배를 띄워 노닐 새,

淸風徐來 水波不興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오고 물결은 일지 않더라.

擧舟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술을 들어 손께 권하며 시경 명월편을 읊고, 요조장(窈窕章)을 노래하니,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이윽고 달이 동산 위에 떠올라,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사이를 서성이더라.

白露橫江 水光接天
흰 이슬은 강에 비끼고, 물빛은 하늘에 닿았는데,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한 잎 갈대 같은 배를 가는 대로 맡겨, 넓고 아득한 물결을 헤치는구나.

浩浩乎
넓고도 넓도다!

如憑虛御風 而不知其所止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탄듯하니 머물 데를 알 수 없고

飄飄乎 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
표표히 인간 세상 버리고 홀로 서니, 날개 돋아 신선(神仙)되어 오르는 것 같구나.

 

[《김홍도필산수도(金弘道筆山水圖)》 中 <이교수서(弛橋受書)>, 사본(絲本)담채, 98.2 x 43.3cm, 국립중앙박물관]

 

장량(張良, ? ~ BC 186)은 유방을 도와 한(漢)나라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운 책사였다. 그의 자를 따라 장자방(張子房)으로도 불리는데 한신, 소하와 함께 한나라 건국의 3대 공신인 ‘한초삼걸(漢初三傑)’로 꼽히는 인물이다.

 

장량은 한(韓)나라 출신으로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한(韓)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그러나 한(韓)나라는 기원전 230년, 진(秦)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이에 장량은 전 재산을 팔아 복수할 자금을 마련하고 사람을 사서 나라를 순시하고 있던 진시황의 수레에 철퇴를 던져 시황제를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전국적 수배령이 내린 상태에서 장량은 강소성(江蘇省) 하비현(下邳縣)에 신분을 숨기고 은신하고 있었다.

 

이 시절의 장량에 대한 고사가 하나 있다. 장량이 어느 날 이교(弛橋)를 건너는데 어떤 노인이 신발 한 짝을 다리 밑으로 던졌고, 장량이 그것을 주어다 노인에게 돌려주자, 노인이 그에게 병법서(兵法書)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때 신발을 다리 밑으로 던진 노인은 황석공(黃石公)이며, 노인이 준 병법서는 「태공병법서(太公兵法書)」라고도 하고 「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장량이 이 병법서를 익혀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뛰어난 전략을 발휘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뒤에 장량이 보여준 뛰어난 책략을 미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전설에 가깝다.

 

'이교(弛橋)에서 (병법)서를 받았다'는 의미의 <이교수서(弛橋受書)>는 바로 이 전설 같은 고사를 그린 것이다.

장량은 유방이 항우의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유방이 하사하는 3만호의 커다란 봉읍을 거절하고, 자신이 유방과 처음 만난 유(留)땅을 봉지로 갖고 그곳의 제후가 된 뒤 은거하였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인물사전(한국인문고전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