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차(茶)와 신선

從心所欲 2021. 10. 28. 11:07

거리엔 cafe가 넘쳐나고 길을 걷는 젊은이들의 손에는 저마다 커피 잔이 하나씩 들려있다. 잠이 안 온다는 이유로 커피를 멀리하던 사람들이 꽤 있었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이다. 그런데 이제는 하루에 한잔이라도 카페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지는 분위기다.

 

커피가 없던 시절, 우리의 선조들은 무엇을 마셨을까 생각하면 언뜻 차(茶)를 떠올리고 뒤이어 율무차, 인삼차, 쌍화차 같은 이름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율무차나 인삼차, 쌍화차는 차(茶)가 아니라 탕(湯)에 속했던 것이다. 차란 엄밀한 의미에서 차나무 잎을 우려내거나 끓여낸 물을 가리킨다.

 

차는 우리나라에 삼국시대 말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차와 술, 소채, 과일, 약 등의 일을 주관하는 관서(官署)로 다방(茶房)이 있어 궁중에서도 차를 마시는 풍속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귀족층을 중심으로 민간에서도 다도가 유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을 맞이할 때에 차례가 행해지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冠婚喪祭)에서 다례가 행해졌지만 민간에서 일상적으로 차를 마시는 풍속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정유재란 때 조선에 온 명나라의 장수 양호(楊鎬)가 “귀국에서는 왜 차를 마시지 아니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선조는 “우리나라 습속에는 본래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대답할 정도였다.

 

그나마 조선에서 다도(茶道)의 명맥이 유지된 것은 불가(佛家)였다. 불교에서는 차(茶)를 마시는 것이 선(禪)을 수행하는 것과 통한다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의 다도를 정립했다고 하여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草衣禪師)는 “차를 마심은 곧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이라고 하였다. 법희(法喜)는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기쁨이고, 선열(禪悅)은 선정(禪定)에 들어선 즐거움을 뜻하는데 차가 곧 그런 음식이라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해남 대둔사의 초의선사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조른 일이나, 또 초의선사가 차를 보내준데 대한 고마움으로 ‘명선(茗禪)’이란 글씨를 써 준 일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다. 명선(茗禪)의 ‘명(茗)’자는 ‘차(茶)’와 같은 뜻이다.

 

[김정희 <茗禪>, 115.2 x 57.8cm, 간송미술관]

 

김정희는 명선(茗禪)이란 큰 글씨 좌우에 이 글씨를 쓰게 된 사연을 적었다.

“초의(草衣)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몽정(蒙頂)과 노아에 덜하지 않다. 이를 써서 보답하는데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로 쓴다. 병거사(病居士)가 예서로 쓰다.”

몽정(蒙頂)은 20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 사천성 몽산(蒙山)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차이고, 노아(露芽)는 밤이슬이 붙어있는 그대로 아침 일찍 딴 차 싹을 뜻한다.

 

조선 후기까지 크게 각광받지 못한 차 문화 때문인지 우리 옛 그림에 차와 관련된 그림은 그리 많지 않다.

단원 김홍도의 <초원시명도’(蕉園試茗圖)>는 ‘파초 정원에서 차를 맛본다.’는 뜻이지만 정작 그림은 동자가 질화로에 무쇠 다관을 올려놓고 쪼그려 앉아 차를 끓이고 있는 모습이다.

 

[김홍도 <초원시명도’(蕉園試茗圖)>, 지본담채, 28.0×37.8㎝, 간송미술관]

 

화제는 차를 시험한다는 ‘시명(試茗)’ 뿐이지만, 누군가 그림 제목에 굳이 초원(蕉園)이라는 단어를 끌어다 붙였다. 파초는 도교적 의미에서는 탈속적 정취를 높이고 선인(仙人)의 풍취를 자아내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림 한가운데다 커다랗게 파초를 그린 김홍도나 초원을 끌어다 그림 제목에 붙인 사람이나 지금 동자가 차를 끓이고 있는 곳은 세속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듯하다. 탁자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사슴도 그런 뜻일 것이다.

거의 같은 소재로 그려진 이인문의 그림이 있다.

 

[이인문 <선동전다도(仙童煎茶圖)>, 지본담채, 30.8 x 41.0cm, 간송미술관 ㅣ 정조와 순조 때의 문신이었던 홍의영(洪儀泳)이 쓴 제시는 “너와 사슴이 다함께 잠들면, 약 달이는 불길이 시간을 넘기리라[汝與鹿俱眠 缿藥之火候過時]”이다.]

 

파초만 소나무로 바뀌었을 뿐 같은 분위기다. ‘선동(仙童)이 차를 끓이다’라는 제목이니 이 또한 선경(仙境)이다.

그러면 차와 신선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당나라 중기의 시인이자 차를 좋아하여 ‘다선(茶仙)’으로 불렸던 노동(盧仝)이 남긴 <맹간의가 보내준 새 차에 사례하며 글을 쓰다[走筆謝孟諫議寄新茶]>라는 차시(茶詩)가 있다. 일명 <다가(茶歌)>로도 불리는 이 시의 중간부분에 신선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차의 효용을 일곱 단계로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만 따로 인용되어 <칠완다시(七碗茶詩)>라는 이름으로 널리 회자되었다.

 

一碗喉吻潤
첫째 잔은 목과 입술 적시고 
二碗破孤悶 
둘째 잔은 외로운 고민 달래고
三碗搜枯腸 惟有文字五千卷 
셋째 잔은 마른 창자 헤쳐주니 오직 뱃속에는 문자 오천 권이 있을 뿐이라.
四碗發輕汗 平生不平事 盡向毛孔散
넷째 잔은 가벼운 땀을 내니 평생에 불평스러운 일 모두 땀구멍으로 흩어지네.
五碗肌骨淸
다섯째 잔은 살과 뼈대[肌骨]를 맑게 하고
六碗通仙靈
여섯째 잔은 신령(神靈)을 통하게 하며
七碗喫不得也 唯覺兩腋習習淸風生
일곱째 잔은 마실 것도 없이 양쪽 겨드랑이에서 솔솔 청풍이 일어남을 느끼네. 

 

양쪽 겨드랑이에서 바람이 인다는 것은 날개가 돋는다는 것의 비유적 표현으로 곧 신선의 경지에 이름을 나타낸 것이다. 노동의 이 시는 조선에서도 널리 알려져 초의선사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동다송(東茶頌)>은 초의선사가 정조의 부마 홍해거(洪海居)의 부탁을 받아 우리나라 차(茶)를 찬미한 시(詩)이다.

 

아래는 「오로회첩(五老會帖)」에 실려 있는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이다.

 

[유숙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 지본담채, 14.9 × 21.3㎝, 서울대박물관]

 

벽오사(碧梧社)는 조선 후기의 서화가인 유최진(柳最鎭)이 중심이 되어 만든 여항문인들의 시사(詩社)로 회원이 3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벽오사소집(碧梧社小集)’은 ‘벽오사의 작은 모임’이라는 뜻으로 1861년에 유최진을 비롯하여 조희룡(趙熙龍) 등 벽오사의 다섯 노인이 정월 대보름에 유최진의 집에 모였던 것을 가리킨다. 이때 도화서 화원 유숙(劉淑)으로 하여금 모임을 그리게 한 것이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이다.

모임이 이루어진 뒤 9년이 지난 후인 1869년에 유최진은 이때의 시화를 모아「오로회첩(五老會帖)」이라는 이름의 첩을 만들었다. 첩의 이름은 송나라 때 재상을 지낸 두연(杜衍)의 집에 80세 이상의 노인 다섯이 모여 시를 감상했다는 오로회(五老會)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벽오사의 작은 모임에 참석한 5인은 60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70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책과 붓만 보이는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의 분위기는 노인들의 고아(高雅)한 모임답게 차분하기만 하다. 그림 한구석에 동자가 차를 끓이는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은 이들의 모임이 신선들의 모임 같았다는 칭송과 공경의 의미일 것이다. 그림에 홀로 두 손을 모으고 서있는 인물은 유최진의 아들인 유학영으로 알려져 있다.

 

‘소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신다’는 심사정의 <송하음다(松下飮茶)>에는 실제로 차를 마시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심사정 <송하음다(松下飮茶)>, 지본담채, 28.3×55㎝, 삼성미술관 리움]

 

차를 끓이는 동자 옆 소나무 아래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우리 그림에 이처럼 찻잔을 입에 대고 마시는 모습이 그려진 경우는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림 속 인물들은 도인이거나 신선일 것이다.

화제는 조금 생뚱맞게 지두법(指頭法)이라고 적혀있다. 심사정이 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고 결과에 만족해서 써놓은 글로 보인다.

 

 

 

참고 및 인용 : 문화원형백과(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