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자기부정의 초상화

從心所欲 2021. 11. 1. 14:28

모든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의 ‘나’가 있다고 한다. 남이 보는 나, 내가 보는 나, 그리고 원래의 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셋이 똑같이 맞아들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서로 다른 세 가지 정체성속에서 그때그때 어울리는 나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물론 정체성의 혼란으로 “나는 누구인가?”하는 깊은 고민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자신을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남이 나를 더 잘 아는 경우는 일상에서도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에게는 엄격하지만 자신에게는 관대한 경향이 있다. 또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고 어떻게든 그것을 감추려는 성향도 있다. 쎌카 사진에 뽀샵하는 심리도 마찬가지다.

 

平生好書畵 평생 서화를 사랑하였고
平生好山水 평생 산수를 사랑하였네.
臥遊亦可樂 와유 또한 즐거움이었고
又勤花木蒔 화초와 나무의 모종에도 힘썼다네.
白頭坐歎息 백두로 앉아 탄식하니
花乎不如爾 꽃마저 예전만 못하구나.

 

집을 새로 사면서 십우헌(十友軒)이라 자호(自號)한 서직수(徐直修, 1735 ~ 1822 이후)가 나이 70이 된 1805년에 쓴 시의 일부다. 평생 서화와 산수, 와유(臥遊), 꽃과 나무를 좋아했다고 썼다.

서직수는 밀양 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를 지낸 서명인(徐命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31세 때인 1768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로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했는지, 37세가 되어서야 음직(蔭職)으로 경종의 원비(元妃)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惠陵)참봉이 되어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 후 홍산, 양지, 용인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나 별다른 치적은 없었다. 오히려 공주판관을 지내던 때에는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한다는 암행어사의 서계에 따라 의금부에 잡혀와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

1789년에는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의 령(令)으로 발령을 받아, 현릉원의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를 건립하는 일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정조는 현릉원 관리들을 불러 서직수가 “대저 성격이 거칠고 철저하지 못하다”라는 말과 함께 일을 미루지 말고 확실하게 수행하라고 당부했었다는 일화가 있는 것을 보면 관리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관직에 있을 때도 그의 관심은 민생이 아니라 서화, 유람, 원예와 같은 자기 취미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관직에 나아가기 전 데리고 있던 솔거(率去)노비가 8명이었는데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현륭원령이 된 1789에는 그 수가 32명으로 늘어났다는 기록에 이르면 청렴함과는 무관한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그가 62세가 되었을 때 당대의 최고 화가인 김홍도와 이명기(李命基)에게 자신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화산관(華山館) 이명기는 특히 초상화에 뛰어나 두 차례나 정조의 어진(御眞) 도사(圖寫)에 참여했던 도화서 화원으로, 정조의 명을 받아 <강세황 71세상>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런 이명기가 서직수의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체를 그렸다.

 

[김홍도 이명기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 견본담채, 148.8 x 72.4cm, 국립중앙박물관 ㅣ 보물 1487호]

 

이 초상화에 서직수는 이렇게 자평(自評)을 적었다.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을 그렸다. 두 사람은 이름난 화가들이지만 한 조각 내 마음은 그려내지 못하였다. 안타깝도다. 내가 산 속에 묻혀 학문을 닦아야 했는데 명산을 돌아다니고 잡글을 짓느라 마음과 힘을 낭비했구나. 내 평생을 돌아보매 속되게 살지 않은 것만은 귀하다고 하겠다.
[李命基畫面, 金弘道畫體. 兩人名於畫者, 而不能畫一片靈臺. 惜乎. 何不修道於林下, 浪費心力於名山雜記. 槪論其平生, 不俗也貴]

 

옛 초상화에 대해서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말이 있다. 일호일발(一毫一髮)과 전신사조(傳神寫照)이다. 외모는 터럭 한 올까지도 같아야 한다는 것과 인물은 외형 묘사뿐 아니라 인격과 내면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서직수가 언급한 ‘내 마음[靈臺]’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어서 산 속에 묻혀 학문을 닦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글귀를 보면 자신의 모습이 원하는 만큼의 지적이면서도 고아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보는 이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지만 일단 인자하거나 관대해보이지는 않는다. 고집은 셀 것 같다. 욕심도 있어 보인다.

자신의 얼굴은 인성과 살아온 삶을 나타낸다지 않는가! 초상화로 이름을 떨쳤던 이명기가 수백 번의 잦은 손질로 세심하게 그려낸 얼굴에 지인(至人)과 달사(達士)의 풍모가 없다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볼 일이지 화가를 탓할 일은 아니다. 어떤 높은 뜻을 마음에 품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또한 자신의 모습에 비쳐지지 않았다면 수기(修己)가 덜 된 까닭일 것이다. 어쩌면 평생 서화와 화목을 사랑한 자신의 삶이 나름 고귀했다고 스스로 착각했을는지도 모른다.

 

[김홍도 이명기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 부분]

 

서직수는 그림에 적었던 4 글자를 까맣게 지우고 ‘名山雜記’로 고쳐놓았다. 그 전에 썼던 글자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명산을 돌아다니고 잡글을 짓는 것’ 보다 좋은 내용은 아니었을 듯싶다. 그림은 고치지 못했지만 자신의 글은 뽀샵한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200년 전의 고인을 욕보이는 듯해서 죄송하다.

이 그림에 관심이 갔던 것은 중앙박물관에서 공개한 사진 때문이다. 그림에서 김홍도가 그렸다는 몸체는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에 싸여있다. 풀을 잘 먹여 방금 다려낸 듯한 옷은 정갈해 보이고 선염으로 그려낸 옷 주름도 자연스럽다. 언뜻 그림의 고수인 김홍도가 단숨에 그려냈을 법도 한 이 그림의 복장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X선 투과 촬영을 하였더니 이런 사진이 나왔다.

 

 

몸체에 거친 붓질이 많이 보인다. 이 많은 붓질은 화폭의 앞면이 아닌 뒷면의 것이다. X선 촬영으로 뒷면의 붓질이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화면의 뒤에서 채색하는 것을 ‘배채법(背彩法)’이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단 올 사이로 채색이 비춰 보여 은은한 효과를 낼 수 있고 색감도 깊이가 있어진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단순해 보였던 옷의 뒤편에 이렇게 많은 보이지 않는 붓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자기성찰의 수기(修己)가 있었다면 그 결과도 자연스럽게 얼굴에 나타났을 것이다.

 

 

참고 및 인용 : 서직수 초상, 이명기 ‧ 김홍도(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초상에 담지 못한 사대부의 삶 - 이명기와 김홍도의 서직수초상화(이경화, 미술사논단 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