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김홍도의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2

從心所欲 2021. 10. 19. 13:43

[《김홍도필산수도(金弘道筆山水圖)》 中 <동정비검(洞庭飛劍)>, 사본(絲本)담채, 98.2 x 43.3cm, 국립중앙박물관]

 

도교(道敎)는 샤머니즘을 기반으로 노자(老子)의 철학과 유교 의식, 불교 교리 등이 결합되어 탄생한 중국 고유의 종교이다. 이 도교의 한 기둥이 사람이 수행을 통해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신선사상이다.

도교에는 수많은 신선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팔선(八仙)이라 불리는 신선들이 있다. 이 여덟 신선의 명단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명(明)대 이후에는 종리권(鍾離權), 여동빈(呂洞賓), 장과로(張果老), 한상자(韓湘子), 조국구(曹國舅), 이철괴(李鐵拐), 남채화(藍采和), 하선고(河仙姑)로 굳어졌다. 이들은 서로 간의 친분은 별로 없지만 흔히 군선도(群仙圖)에서는 함께 어울려 서왕모(西王母)의 잔치에 참석하러 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들 신선들은 오랜 기간 사람들의 생각 속에 존재해오면서 어떤 것이 정설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덧붙여졌다. 일반적으로는 가슴과 배를 드러낸 채 파초선(芭蕉扇)을 들고 다니는 종리권(鍾離權)을 팔선의 우두머리로 꼽는다. 또 다른 팔선인 여동빈(呂洞賓)은 당나라 때의 벼슬아치 또는 과거시험에 실패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나이 들어 종리권을 만나 득도하여 신선이 되었다. 종리권으로부터 불로장생의 묘약인 '용호금단(龍虎金丹)'을 만드는 방법이 씌어 있는 책과 악령을 퇴치하는 '천둔(天遁)의 검법(劍法)'을 전수받아 서민들의 수호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동빈은 화양건(華陽巾)을 쓰고 검을 들거나 메고 다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김윤겸필 신선도(金允謙筆神仙圖)> 속의 종리권과 여동빈, 국립중앙박물관]

 

<동정비검(洞庭飛劍)>은 그런 여동빈이 동정호의 어떤 바위 위에 검을 들고 앉아 동정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신선이 된 후에 여러 시대와 장소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도교의 진리를 설파했다고 한다. 고치기 어려운 병을 낫게 하는 약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먹[墨]을 팔아 궁핍한 사람들을 돕기도 하며 천둔검법으로 노여움이나 욕망 같은 일체의 번뇌를 잘라내 주기도 하면서 도교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서민들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했던 신선이다.

 

[《김홍도필산수도(金弘道筆山水圖)》 中 <현수경구(峴峀輕裘)>, 사본(絲本)담채, 98.2 x 43.3cm, 국립중앙박물관]

 

현수(峴峀)는 중국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 남쪽에 있다는 현산(峴山)의 꼭대기, 경구(輕裘)는 가벼운 가죽옷이라는 뜻이다. 그림에는 배종(陪從)한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물이 바닥에 앉아 산 아래 경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중국 삼국시대 말기의 위(魏)나라와 그 뒤를 이은 사마염(司馬炎)의 진(晉)나라 때의 관리였던 양호(羊祜, 221 ~ 278)이다.

 

양호는 진 무제(晉武帝) 사마염의 명으로 도독형주제군사가 되어 병력을 이끌고 양양(襄陽)에 주둔하면서 오(吳)나라와의 국경을 방비하는 한편 오나라를 정벌하고 천하를 통일할 방책과 그에 합당한 인물을 천거하였다. 실제로 진나라는 양호가 죽은 후이지만 그의 방책을 실행하여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양호는 문무를 겸비하고 생각이 아주 깊었던 인물로 조정에서 중책을 맡고 있을 때에도 '교만하면 손해를 부르고 겸손하면 이익이 돌아온다'는 신념을 실천에 옮기면서 늘 공손하고 근신하는 자세를 지녔다고 한다. 도독으로 양양에 주둔해있을 때도 선정을 베풀며 백성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양호는 양양에 있을 때 산수를 좋아해 늘 현산(峴山)에 올라 술 마시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은 그곳에서 자신의 부하들에게 “이 우주가 생기자 이 산이 있었고 이 산이 있자 그대들과 나처럼 이 산에 올라 논 사람이 많았을 것이지만, 지금 모두 간 곳이 없으니 슬픈 마음이 생긴다. 죽은 뒤 혼백이 있다면 응당 이 산에 오르리라.”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현수경구(峴峀輕裘)>는 양호가 현산을 즐겨 오르던 고사를 바탕으로 한 그림이다.

뒤에 양호가 죽자 양양 고을 사람들은 현산에 비(碑)를 세우고 사당을 짓고는 명절마다 그를 추모하는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김홍도필산수도(金弘道筆山水圖)》 中 <지단관월(指端觀月)>, 사본(絲本)담채, 98.2 x 43.3cm,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의 이치와 수행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불교경전인 「능엄경(楞嚴經)」에는 이런 법문이 있다.

 

佛告阿難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汝等尚以緣心聽法,此法亦緣非得法性。
너희들이 대상에 이끌리는 마음으로 법을 들으므로, 이 법 또한 대상에 이끌리어 법성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如人以手指月示人,彼人因指當應看月
마치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보이면, 그 사람은 이 손가락으로 인하여 당연히 달을 보아야 한다.
若復觀指以為月體,此人豈唯亡失月輪,亦亡其指。
만일 손가락을 보고 달이라 부른다면 그 사람은 달을 잃을 뿐만 아니라, 그 손가락까지도 잃는 것이다.
何以故 以所標指為明月故
왜냐하면, 가리키는 손가락을 밝은 달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경전인 「능가경(楞伽經)」에는 이런 게송도 있다.

 

如愚見指月 觀指不觀月 
어리석은 사람은 달을 가리켜 보이면,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하니,
計著名字者 不見我真實
이와 같이 이름에 매달리는 자는, 나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부처의 말씀이나 불경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 수행의 목적인데 어리석은 수도자들이 이름이나 말과 같은 문자에 집착하느라 정작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손가락과 달에 비유한 대목들이다.

그래서 불교의 선종(禪宗)에서는 손가락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불경을 의미한다고 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표월지(標月指)나 ‘손가락을 보느라 달을 잊는다’는 견지망월(見指忘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들이다.

 

<지단관월(指端觀月)>은 손가락 끝의 달을 본다는 의미다. 그림에는 관음보살과 관음보살을 협시하는 남순동자(南巡童子)가 그려져있다. 후광(後光)과 함께 구름 위에 떠있는 모습이다.

 

[《김홍도필산수도(金弘道筆山水圖)》 中 <운대주면(雲臺晝眠)>, 사본(絲本)담채, 98.2 x 43.3cm, 국립중앙박물관]

 

‘운대(雲臺)에서 낮잠을 잔다’는 운대주면(雲臺晝眠)의 장소와 주인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그러나 ‘잠’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면 아무래도 송(宋)나라 때의 도사(道士)로 알려진 희이선생(希夷先生) 진단(陳摶, 871 ~ 989)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진단은 잠을 자면서 수련하는 수공법(睡功法)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진단은 젊었을 때 과거에 한 번 실패한 이후로는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세속적인 것을 멀리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사방에서 교유하기를 원하는 인사들이 찾아왔으나 모두 물리쳤다.

그런 그가 수련을 위하여 입산한 것은 나이가 이미 60이 넘은 때였다. 도교(道敎)의 영산(靈山)으로 알려진 무당산(武當山)에서 은거하며 수련했다는 설도 있고, 중국 불교의 성지로 알려진 아미산(峨眉山)에서 강학(講學)을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다 나이 80이 가까워진 947년에는 화산(華山)에 있는 도교(道敎) 사원(寺院)인 운대관(雲臺觀)이라는 도관(道觀)에 들어가 은거한 것으로 전한다. 이런 사연으로 미루어 <운대주면(雲臺晝眠)>은 화산 운대관에서 수공(睡功)을 했던 진단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보인다.

 

진단은 그곳에서 늘 눈을 감고 잠을 자곤 했다. 한번 잠들면 몇 달씩 깨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나무꾼이 산에서 누워있는 그를 발견하고 생사를 확인하려고 다가가 몸을 더듬어 보니 심장이 뛰고 있고 입에만 온기가 미약하게 남아 있었다. 잠시 후 진단이 천천히 호흡을 되찾으며 잠에서 깨더니 “아주 맛있게 단잠을 자고 있는데 너는 왜 나를 성가시게 깨우는가?”라며 나무꾼을 꾸짖었다는 일화도 있다.

 

[<윤덕희필 송하오수도(尹德熙筆松下午睡圖)>, 지본담채, 28.3 x 18.7cm, 국립중앙박물관]

 

송나라 태종(太宗) 조광의(趙光義)가 진단을 만나고 싶어, 자신의 부름에 따른다면 화산의 세 봉우리를 주겠다는 시를 지어 진단에게 보내자 진단은 그 부름에 응했다. 그때가 977년으로 진단은 이미 100살이 넘은 나이였다.

궁전에 도착한 진단은 태종을 만나기 전에 먼저 휴식을 취해야 한다며 한 건물에 머물면서 문을 닫고 한 달 동안이나 잠을 잤다. 그런 뒤에야 깨어 황제를 알현했다고 한다.

진단이 송(宋) 태종에게 올렸다는 <수가(睡歌)>라는 시도 전한다.

 

吾愛睡 吾愛睡 나는 잠자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잠자는 것을 좋아한다.
不鋪毯 不蓋被 담요를 깔거나 이불을 덮지도 않는다.
片石枕頭 蓑衣鋪地 돌조각을 베개 삼고 도롱이로 땅을 덮는다.
大地為床 藍天作被 땅을 상(床)이라 하고 푸른 하늘을 이불로 삼는다.
飛雲馳電鬼神驚 구름이 날아 번개가 치고 귀신이 놀래켜도
吾當此時正安睡 나는 그때에도 평안히 잠을 잔다.
閒思張良 悶想范蠡 장량은 생각을 끊고 범려는 고민하지 말며
休言孟德 說甚劉備 조조는 말을 멈추고 유비는 의견을 말하라.
三四君子 只是爭些閒氣 서너 군자가 다만 한가로움을 다투기는 하나
怎比俺於深山林中白雲堆里 심산 숲속에서 흰 구름을 좇는 나와 어찌 비기랴.
展開眉頭 解放肚皮 且宜高睡 미간을 펴고 배를 드러낸 채 단잠을 자는 것이 마땅하다.
那管它玉兔東升,紅輪西墜 달이 동쪽에 떠오르든 해가 서쪽에 지든 무슨 상관이랴.
睡 睡 睡 자고, 자고 또 자련다.

 

아마도 송 태종은 이런 진단이 보기 드문 인물이라 생각했던가 보다. 송 태종은 진단에게

희이선생(希夷先生)이란 호를 하사하였다.

진단은 119세가 된 989년에 화산(華山)에서 죽은 것으로 전한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인물사전(한국인문고전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