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3

從心所欲 2021. 10. 13. 11:20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중 <횡거영초(橫渠詠蕉)>, 견본담채, 30.3 x 20.3cm, 우학문화재단]

 

‘횡거영초(橫渠詠蕉)’의 횡거(橫渠)는 북송시대의 철학자 장재(張載, 1020 ~ 1077)의 호이고, 영초(詠蕉)는 ‘파초를 노래하다’의 뜻이다. 장재는 남달리 파초를 사랑했다고 하며 <파초(芭蕉)>라는 시도 남겼다.

 

芭蕉心盡展新枝 파초 심이 다하니 새 가지를 펼치고
新卷新心暗已隨 말린 새심의 속잎은 언뜻 벌써 뒤따르네.
願學新心養新德 새 속 배워 새 덕 기르기를 바라고
旋隨新葉起新知 이어 새잎을 따라 새로운 지혜 펼쳐내리.

 

단순히 파초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파초의 속성에서 덕성을 잘 기르고 새로운 지혜를 배양하는 학문의 요체를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새 속으로 새 덕을 기른다는 것은 덕성을 높이는 공부에 해당하고, 새잎 따라 새 지혜가 펼쳐진다는 것은 학문을 말미암는 공부에 해당한다”는 주석이 있다.

 

장재는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라고 규정하고 만물은 모두 태허의 현상이므로 그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이 물아일체(物我一體)이며 사생(死生)도 또한 참(眞)의 생멸(生滅)이 아니라 집산(集散)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뒤에 남송의 주희가 이러한 주장을 수용함으로써 조선의 사대부들도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송유팔현도에 장재가 포함된 것은 그런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의 서경덕 또한 주돈이(周敦頤)와 소옹(邵雍) 그리고 장재(張載)의 철학사상을 조화시켜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의 학설을 제창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중 <온공낙원(溫公樂園)>, 견본담채, 30.3 x 20.3cm, 우학문화재단]

 

온공(溫公)은 북송 때의 구법당(舊法黨)을 대표했던 사마광(司馬光, 1019 ~ 1086)을 가리킨다. 호는 우부(迂夫)와 우수(迂叟)를 썼으나 죽은 뒤에 온국공(溫國公)으로 추증되어 흔히 사마온공(司馬溫公)으로 불린다. 그는 신종 때에 왕안석(王安石)이 발탁되어 신법(新法)을 단행하자, 이에 반대하여 낙양(洛陽)에 내려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집필하였다. 당시 그는 거처하는 곳에 동산을 만들어 정원(庭園)으로 삼고 그 이름을 독락원(獨樂園)이라 지으면서 그 내력을 <독락원기(獨樂園記)>로 남겼다.

<독락원기>의 요지는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하는데, 자신은 큰 그릇이 되지 못하여 여러 사람과 함께 즐길 수 없기 때문에 홀로 배우면서 자유를 즐기겠다”는 것이다. 아래는 글의 끝부분이다.

 

우수(迂叟)는 평소 당(堂)에서 책을 읽으며
위로는 성인을 스승 삼고
아래로는 여러 어진 이들을 벗 삼는다.
인의(仁義)의 근원을 살피고
예악(禮樂)의 실마리를 찾는다.
태초에 아직 형상이 있기 전부터
끝없는 사방의 너머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물의 이치가 모두 눈앞에 모여 들었다.
병든 자에 불과할 뿐이라
배움에 아직 이르지 못했는데
어찌 감히 남에게 배움을 구하겠으며
어찌 밖에서 배움을 기대하겠는가!
뜻이 게으르고 몸이 피곤하면 낚싯대 던져 고기 잡고
옷깃을 부여잡고 약초를 캐며
도랑을 내어 꽃에 물을 주고
도끼 들어 대나무를 쪼개고
손을 씻어 더위를 식히며
높은 곳에 올라 눈길 가는대로 따르고
한가롭고 자유롭게 걷기도 하고
오로지 적절한 곳에 마음을 둘 뿐이다.
밝은 달은 때맞추어 떠오르고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면
이끄는 바 없어도 가고
붙잡는 바 없어도 멈춘다.
귀와 눈과 폐와 장도
내 몸에 지니고 있으니
홀로 걸어도 마음은 양양(洋洋)하다.
천지간에 나는 모르겠다.
다시 또 어떤 즐거움이 있어
이것을 대신할 수 있을지.
이에 합하여 독락(獨樂)이라 이름 지었다.

 

우수(迂叟)는 ‘세상일을 잘 모르는 늙은이’라는 뜻이다. 사마광의 호이기도 하지만 이후에는 노인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一人稱) 대명사로 널리 쓰였다. 당(堂)은 독락원 내에 있는 독서당(讀書堂)을 가리키고, 그곳에는 5천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온공낙원(溫公樂園)>은 사마광이 독락원에서의 삶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정선은 이렇게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사마광 6인의 북송(北宋) 유학자를 그린 후에 남송(南宋)의 주희(朱熹)로 넘어갔다.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중 <무이도가(武夷棹歌)>, 견본담채, 30.3 x 20.3cm, 우학문화재단]

 

무이산(武夷山)은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평균 해발고도 350m의 산들로 이루어진 산맥으로, 붉은색 사암(砂岩) 절벽과 협곡이 풍부한 산림과 어우러져 뛰어난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는 관직에 있던 9년간을 제외한 일생의 대부분을 이 무이산 인근에서 살았다. 또한 54세가 되던 1183년부터는 무이산에 정사(精舍)를 짓고 은거하면서 제자들에게 강론하는 일과 저술 작업에 전념하였다. 이에 무이산과 무이구곡은 주자성리학의 발원지와 같은 상징성을 갖게 된 곳이다.

무이도가(武夷櫂歌)는 ‘무이의 뱃노래’라는 뜻으로 주희가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읊은 시이다. 십수(十首)로 된 무이도가의 서시(序詩)격인 첫 수(首)는 이렇게 시작된다.

 

武夷山上有仙靈 무이산 산 위에는 신선의 넋이 어려 있고,
山下寒流曲曲淸 산 아래로 흐르는 찬 물줄기는 굽이굽이 맑아라.
欲識個中奇絶處 그 중 기이한 절경 알아보려 하니,
棹歌閑聽兩三聲 뱃노래 두세 가락 한가로이 들리네.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중 <자헌잠농(柘軒蠶農)>, 견본담채, 30.3 x 20.3cm, 우학문화재단]

 

<자헌잠농(柘軒蠶農)>은 주희의 스승으로 알려진 연평선생(延平先生) 이동(李侗, 1093 ~ 1163)에 대한 그림이다. 현대인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정호와 정이의 학문을 주희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교량적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주희는 1160년, 이동(李侗)을 세 번 찾아간 다음에 정식으로 이동에게 학문을 배웠다. 주희가 이동 밑에서 공부한 기간은 수개월에 불과했지만 주희는 그 뒤로도 이동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이어갔다.

이동은 평생 과거를 단념하고 40여 년 동안 산야에 은거한 채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몰두했다. 청빈했지만 유유자적했고, 세상에 관심이 없는 듯하면서도 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주희가 이동에 대하여 “선생은 교외로 나갈 때 아주 천천히 걷는 것이 마치 집에 있는 것 같으며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한 것은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자헌잠농(柘軒蠶農)>은 이동이 누에치기와 농사의 중요성을 읊은 <자헌(柘軒)>이라는 시를 화재로 삼아, 이동이 초옥에서 농부의 농사일을 바라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자헌(柘軒)은 ‘뽕나무 집’이라는 뜻이다.

 

 

 

참고 및 인용 :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김종서 외, 2013, 태학사), 문화재청, 중국인물사전(한국인문고전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