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독서당계회도

從心所欲 2022. 6. 24. 13:38

교통방송을 듣다 보면 독서당길이 자주 언급된다. 독서당길은 성동구 응봉동에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병원 부근까지에 이르는 간선도로이다. 워낙 익숙해진 이름이라 별 다른 생각없이 넘길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독서당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궁금할 수도 있는 일이다.

 

조선 시대에는 젊고 유능한 문신(文臣)들이 학문에 더욱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라는 것이 있었다. 사가(賜暇)는 관리의 휴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가독서제는 관청업무는 하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힘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제도이다.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학사들을 대상으로 처음 실시된 제도다. 기간은 짧게는 1개월이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1 ~ 2년이 되기도 하였다.

사가독서제가 처음 실시된 세종 때에는 독서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자신의 집으로 한정되었는데, 자택에서 하는 독서는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공부에 매진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1442년 제2차 사가독서를 시행할 때에는 세종은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6인을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왕에 오른 뒤 집현전을 혁파함으로써 이 사가독서제는 한때 폐지되기도 하였다. 그 뒤 성종 대에 이르러 다시 사가독서제가 다시 재개되었을 때, 서거정(徐居正)이 주청하여 마포 한강 변의 사찰을 개조하여 상설 독서 장소를 설치하였는데 그것이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이다. 남호(南湖)는 예전에 용산 부근의 한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남호독서당은 연산군 때 폐쇄되었고 중종 때 다시 사가독서제가 재개되면서 지금의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던 정업원(淨業院)을 독서당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러나 절에서 하는 독서인 상사독서(上寺讀書)는 유학자가 절에서 공부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중종은 1517년에 두모포(豆毛浦)의 정자를 고쳐 지어 독서당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다.

두모포는 동호대교 북단의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포구이고, 동호는 뚝섬에서 옥수동에 이르는 지역의 한강을 가리키는 말이다. 독서당길 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동호독서당은 그 후로 70년 넘게 운영되다가 임진왜란 때 소각되었고, 다시 복구되지 못했다. 이후 독서당은 영조 때까지 존립했던 것으로 보이나 정조 때 규장각(奎章閣)이 세워짐에 따라서 완전히 그 기능이 소멸되었다.

 

독서당의 운영은 국비로 지원되었다. 독서당은 비록 국가의 부처나 기관이 아니었지만, 학문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높이 인정받아, 옥당(玉堂)으로 불리는 집현전이나 홍문관 못지않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 만큼 역대 왕들의 독서당에 대한 총애와 우대도 지극하였다. 독서당에는 언제나 궁중음식 전담기관인 태관(太官)에서 만든 음식이 끊이지 않았고, 임금이 명마(名馬)와 옥으로 장식한 수레와 안장을 하사하는 일이 많았다고도 한다.

나라에서는 독서당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사가 인원을 줄이고 규정을 엄격히 적용하였다.

 

영조 때에 편찬된 속대전의 예전(禮典)에는

통훈(通訓) 이하의 문신으로서 문학이 특이한 자는 대제학으로 하여금 초계하여 휴가를 주어 호당(湖堂)에서 독서하게 한다고 사가독서원의 자격을 규정하였다.

통훈(通訓)은 문신(文臣) 3품의 하계(下階)인 통훈대부(通訓大夫)를 가리킨다.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뜻의 문형(文衡)’이라고 불리는 대제학에게 학문을 인정받고 왕의 특명에 의해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기 때문에 젊은 문신들로서는 이런 사가독서의 일원으로 선발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독서당의 사가독서에는 1426년부터 1773년까지 350여 년 동안 총 48차에 걸쳐서 320인이 선발되었다. 회차별 인원수는 가장 적었을 때인 1585년에 1, 가장 많을 때인 1517년과 1608년 등에 12인이었으나, 일반적으로는 6인 내외가 선발되었다.

 

영광스러운 자리인 만큼 요즘이라면 기념사진이라도 찍어두어 은근한 자랑으로 삼았겠지만, 예전에는 이를 그림으로 남겼다. 그것이 독서당계회도이다.

서울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독서당 계회도가 대표적이다. 이이, 정철, 유성룡과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참석했던 1570년 즈음에 그려진 것이다.

 

[작자 미상 〈독서당 계회도〉, 1570년경, 견본수묵, 91.3 x 57.8cm, 서울대학교박물관]

 

보물 제867호로 지정된 이 계회도는, 산수를 배경으로 화면 왼쪽에 독서당이 그려져 있다. 그림에는 독서당에 앉아 있는 인물들과 독서당을 향해 걸어가는 인물들이 조그맣게 보인다.

 

그런데 최근에 이보다 더 오래된 독서당계회도가 공개되었다. 중종 재위 때인 1516~ 1530년 사이에 사가독서에 참가했던 인원들의 계회도로 걸개 형태이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지난 3월 미국의 경매에서 사들여 환수한 것이다.

 

[<독서당계회도>, 1516 ~1530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독서당계회도> 화폭 부분, 견본수묵, 105.5 x 62.2cm,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그림에는 독서당 주변 풍경을 그려 넣었는데, 멀리 청록색의 북한산 산줄기를 배경으로 중랑천이 한강과 합쳐지는 두모포와 압구정 지역의 언덕과 강 위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는 선비들의 모습까지 담았다. 화면 중간에 우뚝 솟은 산은 매봉산으로 불리는 응봉(鷹峰)이고 그 앞의 독서당 건물은 안개에 싸여 지붕만 보인다. 그림 아래엔 당시 사가독서에 참가했던 관료 12명의 호와 이름, 본관, 생년, 독서에 참여한 시기, 과거 급제 연도와 함께 당시의 품계와 관직 등이 적혀 있다.

성리학에 밝고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던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 강호가도의 선구자로 시조에 뛰어났던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등의 이름이 보인다.

 

<독서당계회도>는 다음 달 7일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통해 일반 관객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참고 및 인용 : 한국고전용어사전(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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