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일두 정여창

從心所欲 2022. 7. 28. 12:22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인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살아있을 때 당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인물들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에게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것은 후학들이 두 사람을 끌어다 당파 싸움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자신들 학통의 우월성과 정통성을 내세우려는 방편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공경한다는 선학들을 끌어다 괜한 욕을 보인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정치를 주도한 세력인 사림(士林)은 소위 붕당으로 동·서인으로 갈리기 전까지는 큰 맥락에서 하나의 학통(學統)이었다. 이황의 제자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였던 기대승(奇大升)은 조선 성리학의 연원을 정몽주에 두고 이것이 길재를 거쳐 길재의 제자인 김숙자와 그의 아들인 김종직으로 이어진 뒤 김굉필과 조광조로 이어졌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이황과 이이는 조광조의 뒤를 잇는 세대이다. 이황과 이이가 이기론을 두고 다른 견해를 보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학문적 소신의 차이일 뿐 당파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붕당이 생겨남으로써 이런 학문적 견해 차이마저 당쟁에 동원되었다. 각 당파는 자신들이 추종하는 인물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문묘 종사를 추진했고, 동인에서 갈려 나온 대북이 정권을 잡았던 광해군 때 이황이 이이에 앞서 문묘에 종사 되었다. 문묘(文廟)란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선왕묘(文宣王廟), 종사(從祀)한다는 것은 여기에 그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다. 공자와 함께 배향된다는 것은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이기는 하지만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더 중요하다. 문묘에 종사 되기 위해서는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자신들이 추종하는 인물을 왕이 문묘에 종사하도록 허락한다는 것은 곧 자신들 세력이 왕으로부터 지지를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이는 우여곡절 끝에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문묘에 종사 되었다.

 

조선의 유학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문묘에 종사 된 5인을 흔히 동방 오현(五賢)이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이황을 비롯하여 김굉필, 조광조와 함께 이언적과 정여창이 포함되어 있다. 김굉필(金宏弼)은 사림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종 때 관직에 진출했던 김종직의 문인으로, 유배를 갔던 평안도 희천에서 조광조를 가르쳤던 인물이다. 조광조는 유교적 이상정치를 펼치려다 훈구파가 기획한 기묘사화로 사사된 인물임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비교적 생소한 정여창과 이언적은 각기 김굉필, 조광조와 같은 시대의 인물들이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 ~ 1504)은 경남 함양사람으로 당시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과 함께 공부했다. 22세부터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지냈고, 34세가 되는 1483년에는 사마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490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가 되면서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의 곧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1494년에 현재의 함양군 안의면에 해당하는 안음(安陰)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공정한 일 처리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던 중 연산군 4년인 1498년 무오사화로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15045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또한, 그는 죽은 뒤 반년 후에 일어난 갑자사화 때에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되었다.

 

정여창의 호 일두(一蠹)하나의 좀이라는 의미다. 정여창은 자신을 좀벌레와 같은 존재로 비하했지만, 후학들은 그를 조선 성리학의 큰 줄기를 이어온 명현(明賢)으로 기렸다. 정여창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후 100여 년이 지난 1610년에는 그의 위패가 문묘에 모셔졌고, 경상도의 몇몇 서원에서 그의 제사를 지내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지금의 경상남도 화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는 악양정(岳陽亭)은 특별한 장소로 부각되었다. 지리산 기슭 하동 지역 악양동(岳陽洞)에 있는 악양정은 정여창이 젊은 날에 홀로 경학과 성리학을 연구하던 곳이다. 그래서 이황의 도산서원이나 이이의 고산구곡처럼 악양정은 정여창을 대표하는 상징적 장소가 된 것이다. 정여창은 생전에 악양정 주변의 형승(形勝)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1643년경, 정여창의 제사들 지내는 서원의 하나였던 함양의 남계서원(濫溪書院)의 선비들은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의 손자 이무(李茂)를 통하여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에게 정여창의 뜻을 기리고자 하는 뜻을 전했다. 신익성은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남편으로 동양위(東陽尉)는 부마인 그에게 내려진 작호다.

이에 신익성은 지금은 선생의 세대와 거리가 멀지만, 선생의 도는 더욱 밝으니 그 도로 인하여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유적을 찾아서 그림으로 그리고자 하니, 그 뜻이 부지런하다.”라며 그들의 뜻에 공감하였다. 그렇게 해서 종실화가인 이경윤(李景胤)의 아들이자 당대 제일의 화가였던 이징(李澄)이 그림을 그리고 신익성이 글을 써 완성된 것이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이다. ‘화개현구장(花開縣舊莊)’이란 한자는 화개현에 있는 옛 별장이란 뜻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별장은 현대에서 생각하는 별장의 호사스러움과는 무관하다. 조선 시대에는 그냥 살림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경치 좋은 곳에 지은 초막이나 정자를 별장이라 불렀다. 또한 구장(舊莊)은 옛 별장이란 뜻보다는 전에 머물던 곳[舊居]’이라는 의미가 강하고, 그곳은 정여창이 머물며 공부하고 강론했던 집을 가리킨다.

 

[이징, 신익성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 견본담채, 89 x 59cm, 국립중앙박물관]

 

 

계회축(契會軸형식을 따른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위에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라는 화제(畵題)가 전서체로 쓰여 있고, 가운데 부분에 화개현에 있는 정여창의 별장과 주변의 풍경이 명주 바탕에 수묵담채(水墨淡彩)로 그려졌고, 아랫부분에는 정여창의 시와 신익성의 발문(跋文) 등을 내용으로 하는 글씨로 채워져 있다. 글씨는 당대의 문장가이자 명필이었던 신익성이 썼다.

 

[이징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 그림 부분]

 

그림은 이징이 직접 현지에 가서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관련 기록을 참고하여 그린 상상화이다. 아마도 정여창이 머물렀던 집은 100여 년이 지난 당시에는 이미 퇴락하여 자취가 없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림을 그린 때에 이징의 나이는 63세였다.

 

그림은 안견파 화풍과 절파 화풍이 혼합되었다는 평이다.

가로 비율이 넓은 화면에서 우측 근경에 정자를 배치하고 좌측에 강기슭을 두어 넓은 공간감을 나타낸 산수 구성과 배치는 안견파 화풍을 따른 것이고, 암석의 각진 윤곽선과 흑백이 대조되는 면 처리는 완화된 절파 요소라 한다.

 

[신익성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 글씨 부분]

 

하단에 깔끔한 해서체로 쓰인 글은 선생절구(先生絶句)’로 시작하는데, 이는 정여창이 지은 <악양(岳陽)>이라는 시를 가리킨다.

 

風蒲泛泛弄輕柔 산들바람에 가녀린 창포 잎 이리저리 물결치고
四月花開麥已秋 사월의 화개현 보리 벌써 익어가네.
看盡頭流千萬疊 지리산 천만 굽이 다 둘러보고
孤舟又下大江流 배에 몸을 싣고 섬진강 따라 외로이 내려가네.

 

이어지는 <악양정시서(岳陽亭詩敍)>는 정여창이 살아있을 때 가깝게 교유했던 유호인(兪好仁)의 글과 시이다. 정여창이 같이 벼슬살이를 하던 유호인에게 지리산 악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종종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나타내자, 유호인이 이에 악양정을 노래한 시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시에서는 악양을 두곡(杜曲)과 망천(輞川)에 비유했는데, 두곡은 당()나라 때 번성했던 성씨인 두씨(杜氏)들의 세거지(世居地)이고 망천은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가 별장을 지었던 곳으로, 문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은거지를 상징하기도 한다.

 

一掬歸心天盡頭 남쪽 하늘 아래로 돌아가고픈 마음 뭉클하니
岳陽無處不淸幽 악양 그곳은 모든 곳이 맑고 그윽하지.
雲泉歷歷偏供興 선명한 산천은 흥취를 돋우는데
軒冕悠悠惹起愁 부질없는 벼슬살이는 수심만 자아내네.
杜曲林塘春日暖 두곡(杜曲)의 숲과 못엔 봄볕이 따스하고
輞川煙雨暮山浮 망천(輞川)의 비구름은 저녁 산에 떠 있겠지.
書筵每被催三接 매일 세 차례 서연(書筵)을 하는 사이
辜負亭前月滿舟 고부정 앞 배 위엔 달빛만 가득하겠구나.

 

서연(書筵)은 왕세자를 교육하는 것을 말하는데 아마도 시를 지은 때가 정여창이 세자 시절의 연산군을 가르치던 시기였던 모양이다. 맨 마지막 구절에 악양정 대신 고부정(辜負亭)이라고 했는데, ‘고부(辜負)’는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벼슬을 떠나 악양정에 내려가 지내고 싶지만, 뜻대로 할 수 없는 정여창의 처지를 비유한 말로 보인다.

 

 

<악양정시서(岳陽亭詩敍)> 뒤에는 그림의 제작 배경을 밝힌 신익성의 발문에 이어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정구(鄭逑)의 글에 악양과 관련된 내용이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정여창의 사당인 덕은사(德隱祠) 내에 있는 현재의 악양정은 1901년에 중건된 것이다.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1990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참고 및 인용 : 이징의 <화개현구장도> - 선현을 그리는 마음(오다연,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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