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는 사대부의 사의화(寫意畵)로, 그림 중에 문인의 정취와 사상을 보여주는 것을 가리킨다. 위진시대 이후
태동하고 원대(元代)의 조맹부가 정식으로 문인화라는 명칭을 썼다고 한다. 문인화 이론이 체계화된 것은 북송
(北宋)시대부터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동진(東晉)의 고개지, 당(唐)의 염립본과 왕유(王維), 노홍 등 무수한
화가들이 철학자, 정치인, 시인 등 화가 이외의 자격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그러므로 문인 사대부가
여기(餘技)로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상 이미 오랜 전통으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러다 북송 때, 소식(蘇軾), 문동(文同), 이공린(李公麟), 미불(米芾), 황정견(黃庭堅) 등과 같은 그림 혹은
글씨 또는 시서화 모두에 능하였던 일군의 사대부들이 자신들이나 동료 사대부 화가들의 그림에 관한 많은 이론을
글로 표현하였다. 이때에 비로소 지금 우리가 문인화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론적 체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미불은 ≪화사(畫史)≫,≪서사(書史)≫ 등의 체계를 갖춘 저술을 남겼다.
※ 위 그림은 모두 '중은우시'님의 다음블로그에서 캡쳐한 사진입니다.
소식2의 경우는 기(記)라는 형식의 비교적 짧은 글과 발문, 시(詩) 등의 형식으로 글을 남겼다. 주로 ≪소동파전집
(蘇東坡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소식의 대표적인 글로는 그림에서 ‘상리(常理)’3의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인원화기(淨因院畫記)>, 문동의 대나무 그리는 방법, 기법의 연마, 창작 과정, 감상자와 화가와의 관계 등
여러 가지 이론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문여가화운당곡언죽기(文與可畫篔簹谷偃竹記)>가 있다. 또한 그림을
논할 때 대상과 닮고(形似) 안 닮고를 논하는 사람은 어린애와 같으며, 시와 그림은 본래 한 가지 법칙에 의한 것
(詩畫本一律)이라는 유명한 시 등을 들 수 있다. 그가 문동4의 묵죽화(墨竹畵)에 관하여 지은 여러 개의 시들은
문동의 묵죽화를 비교 불가한 높은 경지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 밖에도 곽약허의 ≪도화견문지≫, 휘종(徽宗)의 명에 의하여 편찬된 ≪선화화보(宣和畫譜)≫ 등에도
당시의 문인들이 가졌던 그림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직접·간접적으로 표출되었다.
북송시대 사대부 화가들에 의하여 체계화된 문인화 이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 문인화는 문인(또는 士人)들의 그림이며 이들이 평소에 쌓은 지식·교양·필력(筆力)을 토대로 흥이 일었을
때 이를 그림에 기탁하는 것이다.
②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 즉 뜻의 표현을 중요시한다.
③ 마음속에 완전한 상(象)을 갖추고(胸中成竹) 조금도 지체 없이 그린다.
④ 이때 기법의 구애를 조금도 받지 않는다(心手相應). ≪장자≫에 나오는 포정(庖丁)이나 윤편(輪扁)5과 같이
도의 경지에 이른 기법을 말한다.
⑤ 서예의 필획이 쓴 사람의 성격, 인품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그림도 그린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⑥ 그림은 서로를 이해하는 참다운 지기(知己)에게 주는 것이지 물질적 대가를 받고 그려 주는 것이 아니다.
⑦ 문인화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기운, 자연, 천진(天眞), 평담(平談) 등이다.
원대(元代)문인들은 한층 더 나아가서 그림에서 고의(古意)를 중요시하여 복고주의 화풍을 일게 하였다.
아울러 회화를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한 단게 더발전시켜 사의(寫意)라는 개념이 글자 그대로 그림에 적용
되고 그림에서 필획 자체의 서예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조맹부(趙孟頫), 오진(吳鎭), 예찬, 탕후(湯垕) 등
여러 사람들이 이에 크게 기여하였다.
위와 같은 이론을 따르면, 자연히 문인화는 직업 화가들이 그린 그림과 본질적인 차이를 보이게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러한 논리적 전개 과정을 거쳐 명나라 말에는 유명한 동기창의 남북종화론(南北宗畫論)이 나오게 되었다.
남북종화(南北宗畫)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이게 된 것은 1610년 경에 발표된 「화설 畫說」이라는 글에서부터
이다. 이 글은 막시룡(莫是龍)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나 지금은 동기창의 글이라는 설이 압도적이다. 이 글에서
당(唐) 때의 선불교가 남종·북종의 두 파로 나뉜 것처럼 그림도 이때부터 남종·북종의 두 갈래로 갈라졌으나 각
파에 속하는 화가들의 출신지가 남쪽이냐 북쪽이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즉, 인간의 내적 진리를 추구하고 자유분방한 태도로 자기표현을 중시한 문인화가들의 태도를 돈오(頓悟)를
주장한 남종선불교6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형사를 중요시하고 기법의 연마 그 자체로 중요시한 직업 화가들을
점수(漸修)를 주장한 북종 선불교에 비유하여 중국의 역대 화가들을 두 무리로 구분하였다. 남종화의 선두에는
당나라의 사대부이며 시인인 동시에 수묵 산수화의 시조라고 생각된 왕유를 세워 놓았다. 그리고 당나라 말과
오대의 수묵 산수화가인 장조(張璪), 형호, 관동(關仝), 곽충서(郭忠恕), 동원(董源), 거연(巨然), 북송과 남송의
산수화가인 이성(李成), 범관(范寬), 미불, 미우인(米友仁), 元의 고극공(高克恭), 황공망(黃公望), 오진, 예찬,
왕몽(王蒙) 등을 열거하였다.
북종화에는 당나라 때의 청록 산수화가로 알려진 이사훈(李思訓), 이소도(李昭道), 오대의 궁정 화가 조간
(趙幹), 송나라 때의 청록 산수화가 조백구(趙伯驅), 조백숙(趙伯驌), 그리고 남송 화원 화가인 마원(馬遠)과
하규(夏珪)를 열거하여 놓았다. 동기창의 남종화가와 북종화가 명단은 여기서 끝났다. 그러나 그 뒤에 명나라
때의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등 오파(吳派) 화가들이 당연히 남종화에 들어갔고, 마하파(馬夏派)를 계승한
절파(浙派) 화가들이 북종화에 포함되었다. 이 분류에서는 문인화의 가치관이 가장 크게 작용하여 화가의
인품이나 사회적 신분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분류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물론 여기에 어느 정도 그림의 양식적
특징이나 구분이 수반되었다. 여기서 자연히 우리가 흔히 쓰는 남종 문인화라는 말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남종화와 북종화를 가르는 것과 남종화를 우위에 두는 이른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은 중국 회화사를
객관적으로 볼 때 상당한 편견에 치우쳤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지성사적 지표로서의 의미와
동기창 이후 모든 미술사가들이 그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고 한다.
이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와 중국회화이론사(갈로 지음 강관식 역, 돌베개)를 근간으로
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 인물화로 유명한 동진시대의 고개지(顧愷之, 346~408년경)는 중국 미술사에서 이름과 화풍이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화가다. 현재 전하는 고개지의 작품은 3점으로 ‘여사잠도(女史箴圖)' '낙신부도(洛神賦圖)' '열녀전도(烈女傳圖)'가 있다. [본문으로]
- 소식(蘇軾, 1036 ~ 1101) : 중국 북송의 문인으로 호는 동파(東坡).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당쟁에 패하고 항주(저장성)등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시인, 서예가로도 당대 제일이고 서예는 처음 『난정서』를 배우고 안진경의 서예에서 인간성의 발로를 발견하였으나 후에 고인의 모방을 배척하고 일가를 이룬다. 당쟁에 의하여 혜주, 경주로 유배되었다. 휘종의 대사로 일시 장안에 돌아와 벼슬을 하였으나 상주(장쑤성)에서 객사. 송대(宋代)의 4대가의 한사람. (미술대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
- 당연한 이치 [본문으로]
- 문동(文同) : 시문과 글씨, 죽화(竹畵)에 뛰어났으며, 사마광(司馬光), 소동파(蘇東坡) 등은 문동을 매우 존경하였다. 인품이 조운고결(操韻高潔)하였고, 박학(博學)하여 성경(星經), 지리(地理), 방약(方藥), 음률(音律)에 통달하였으며, 시문 이외에 글씨에도 전(篆), 예(隸), ·행(行) ·초(草), 비백(飛白)을 잘하였다. 문동의 4절(四絶)이라고 하여 ‘1시(詩), 2초사(楚詞), 3초서(草書), 4화(畵)’라고 하는데, 그의 묵죽(墨竹)은 ‘기운이 맑고 깨끗한 자태가 풍부하다’는 평을 받았다. 경험을 중요해 모든 준비가 끝난 뒤에 붓을 들 것을 주장했다. 농묵과 담묵법을 연구해 묵죽 일파를 형성했으며 묵죽대사(墨竹大師)로 불렸다. 사촌형제인 소식과 함께 시문, 서화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는 후세에 묵죽(墨竹)의 개조(開祖)로 추앙받았다. 시문집에 ‘단연집(丹淵集)’(4권)이 있다. (두산백과, smartK) [본문으로]
-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바퀴를 잘 만들었다. 제환공(齊桓公)이 책을 읽는 것을 듣다가 들고 있던 도끼를 놓고 제환공과 도에 대해 논했다. [본문으로]
- 불교에서 돈오(頓悟), 즉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는 것을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한다. 여기에는 돈오 이전에 점수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돈오 후에 점수한다(先悟後修)는 주장이 있다. 당(唐)나라 신회(神會)의 남종선(南宗禪) 계통은 후자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후의 선종은 주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입장을 취하였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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