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동양화 화론(畵論) 4 - 마하파, 원체화

從心所欲 2018. 7. 31. 10:40

 

마하파(馬夏派)는 중국 남송(南宋)의 화원(畵院)에서 활약했던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에 의해 형성된 화파로, 주로 직업 화가들 사이에서 추종되었다. 마하 화풍은 강남 지방의 특유한 자연 환경과 이를 향유하는 인물을 소재로 하여 근경에 역점을 두되, 한쪽 구석에 치우치게 하는 일각구도(一角構圖)를 이룬다. 원경은 안개 속에 잠긴 형태로 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산과 암벽의 표면은 부벽준으로 처리하며, 굴곡이 심한 나무를 근경에 그려 넣는 것도 이 화파의 독특한 작풍이다.

남송의 수도였던 저장성 항주지방의 직업 화가들에게는 원대(元代) 이후에도 그 전통이 그대로 남아, 명대(明代) 전기인 15세기에는 절파의 융성과 더불어 부흥했다. 하지만 명대 후기에 문인화가 화단의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마하파 계통은 지식인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고 동기창은 그것을 북종화라 부르며 비판했다.

 

마원(馬遠. 1160? ~ 1225?)은 중국 남송의 화가로 이당(李唐), 유송년(劉松年), 하규(夏珪)와 더불어 남송 4대가로 불렸고 하규와 같이 남송 후반기의 원체산수화(院體山水畵)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혔다. 이당(李唐)1에게 사사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영향보다는 가학(家學)에 의한 독자적 화풍을 이루어 화원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북송 말기의

마분(馬賁) 이래 마원의 아들 마인(馬麟)에 이르기까지 7인의 화원화가를 배출한 화단의 명족(名族)이었다. 마씨 가문은 본래 산시 지방 출신으로 전통적인 북종 산수화풍을 계승했으나, 만주에서 침입해 온 여진족으로 인해 남송(1127~1279)의 지배층이 양자강 이남으로 피신하면서, 마씨 가문의 삶과 화풍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이당 <만학송풍도(万壑松風圖)>, 1124년(北宋시대), 견본담채 139.8 x 188.7 cm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저지대의 낮은 언덕과 작고 아름다운 호수, 그리고 푸른 잎들이 무성했던 새로운 환경의 항주를 그림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지금까지 써오던 전통적인 화법이 아닌 새로운 표현법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마원과 그와 동시대 화가인 하규의 전성기 작품에서는 전통 양식들이 종합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마원의 그림은 하규와 더불어 마하파(馬夏派)의 기틀을 형성하여 중국 산수화에 큰 영향을 주면서 사실상 중국 산수화는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마원은 화면의 한쪽 구석에 주제를 그려 넣고, 나머지 부분은 여백으로 처리했던 대담하고 독특한 구도 때문에 '마일각'(馬日角)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또한 남종 산수화의 전형적 특징인 힘차고 격한 붓놀림과 연한 색조의 발림, 그리고 간결한 세부 표현으로 시적 운치가 있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무한한 공간을 의미하는 대담한 여백의 표현은 북종 산수화파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도교적인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마원 <답가도(踏歌图)>, 북경고궁박물원]

 

[마원 <산경춘행도(山徑春行圖)>]

 

[마원 <누각산수도(樓閣山水図)>]

 

마원은 지식인 계층의 출신이 아니었고, 또 그의 그림들이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궁정의 퇴폐적인 취향에 영합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마하파는 명대(1368 ~ 1644)에 들어와 다시 중흥했고, 일본 가노파(狩野派) 화가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현재 서양에서 마원은 전통적인 중국 화가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화가이다.

 

하규(夏珪, 생몰년 미상) 역시 남송의 화원화가로 영종조(1194~1224)의 화원대조(待詔)로 금대(金帶)를 하사받았다. 이당(李唐)에게 배운 기술에 세련미를 더하여 시정을 표현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산수의 형식적 아름다움을 강조해 ‘하규의 일변(一邊)’이라 불리는 대각선 구도를 완성했다. 작품은 생생한 묵색의 필치로 간결함이 돋보이는 경향의 작품과 필선을 강조하여 보다 세밀한 경향을 보이는 작품으로 크게 나뉜다.

명대 절파(浙派) 수묵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규 <계산청원도溪山清远图> 卷 纸本墨色 46.5 x 889.1cm 台北故宫博物院藏]

 

<계산청원도>에 대한 중국인들이 남긴 평은 이렇다.

 

"<계산청원도>맑은 날 강남의 호수 양안의 풍경인 산봉우리들, 산 바위, 무성한 숲, 누각,긴 다리, 시골집, 띠 정자, 고기잡이 배, 먼 곳의 범선을 그렸는데 휘어진 붓이 비록 간략해도 모습은 사실적이다. 산석(山石)은 몽당붓을 사용하고 그 가운데 뾰족하게 외곽을 휘어 장중하고 시원하며 붓이 비록 간단해도 변화가 복잡하다.

하규가 특별히 뛰어나게 운용한 먹색의 변화는 익숙하게 여러 겹으로 준법과 ‘적묵법’의 가염을 하고 있고 이외에 때때로 ‘잠묵법’을 사용하며 또한 잠담묵을 우선 취한 후 가는 붓을 담군 농묵이 있게 순서에 따라 그렸는데, 먹빛이 짙은 색에서 점점 옅게 하고 습한 것을 점점 마르게 한 변화가 무상하다. 구릉과 큰 돌이 위태로운 암벽에 섰고 숲은 나무가 무성하고 산사의 누각에서 보면 원산이 희미하고 강물은 넓은 그림을 제작한 끝없는 강산의 풍경이다. 두루마리 그림의 구도는 허와 실이 번갈아 열리고 닫히는 운치가 있어 꾸물거리거나 모아서 합친 게 전혀 없는 느낌이다."

 

 

 

 

 

 

[하규 <계산청원도>]

 

"산석은 거칠고 굳센 대부벽준과 굳세고 편리한 방경의 붓으로 단락을 묶고, 수묵이 선염되는 사이로 반목이 분명하여 붓이 꺾어 떨어지는 기세가 있다. 그림의 점경 인물은 비록 용필이 적어도 단지 각종 움직이는 형태가 상호 호응관계로 지면 위에서 생생하게 나타난다. 가지런한 형체의 화풍은 맑고 굳세며 원기가 왕성하다.

모든 그림은 거침없이 풍성하고 남송 전 시대의 작품 중에서 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비단위에 그려진 이런 종류의 산수 중 첫째이고 이 그림은 종이에 그렸는데 자못 보기 드물다."

 

화원(畫院)은 중국 궁정의 작화기구(作畫機構)로 정식명칭은 한림도화원(翰林圖畫院)이다. 궁정화원으로도 불린다. 화원제도의 효시(嚆矢)는 당대(唐代)에사 시작하여,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후촉(後蜀), 남당 시대에 제도화되었다. 북송(北宋) 초기에 오대(五代)의 화윈제를 이어받아 입내내시성 밑에 설치하고 진종조(眞宗朝, 997 ~ 1022) 무렵부터는 대조(待詔), 학예(學藝), 지후, 학생(學生) 등의 직계(職階)와 정원(定員), 승진제(昇進制) 등이 정하여졌다.

 

원체화(阮體畫)는 통상 중국 남송의 화원(畫院)의 화풍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원래는 ‘화원회화(畫院繪畫)의 체’라는 뜻이다. 넓은 의미로는 당나라 이래 각 시대에 원체화가 존재하였으며, 당에서 북송시대에 이르는 궁정화풍이 모두 한결 같지는 않았다. 남송시대의 화원에서는 특히 산수화는 이당(李唐)의 영향아래 마원(馬遠) · 하규(夏珪)양식이 성립되었고, 화조화(花鳥畫)에서는 색채의 아름다움이 추구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화풍을 원체화라 부른다.

 

 

 

이 글은 미술대사전( 1998.한국사전연구사), 세계미술용어사전(1999. 월간미술), 501 위대한 화가(2009.

마로니에북스), 두산백과 및 기타 자료를 참조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1. 이당(李唐, 1080?~1130?) : 중국 북송 후기~남송 초기의 화원 화가. 휘종 선화(1119~1125) 화원에 들어갔다가, 송의 남도 후는 잠시 유랑 생활을 했으며, 80세 즈음 화원에 복직하여 대조(待詔)가 되었다. 인물화를 잘 그렸고,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으며 곽희 화풍에서 마원 ∙ 하규의 원체(院體) 산수화풍으로 이행하는 과도적 형식을 보였다. 묘법상으로는 부벽준(斧劈皴)을 창시하고, 사실적이면서도 장식적 화풍을 만들었다. (미술대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