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옛날이야기 29 - 기문(奇聞) 2

從心所欲 2020. 8. 26. 16:37

☞환마태우(喚馬紿友)

 

 

성천(成川)에 한 관비(官婢)가 있었는데 음탕함이 지나쳐 양물이 큰 것만을 좋아하였다.

교생(校生) 남산수란 사람은 양물이 커서 항상 그 관비를 겁간하고자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의 친구가 그를 속여 말했다.

“내가 자네를 위해 계획을 짜주겠네. 관비가 매일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지 않는가? 자네와 내가 그 시간에 맞춰 그 곁을 지나가는 걸세. 그때 나는 자네를 망아지 아비라 부를 것이네. 그러면 자네는 왜 자기를 욕하느냐고 하게. 나는 자네의 양물 크기가 말과 같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할 것이네. 그러면 그녀는 자네의 양물이 거대하다고 여겨 반드시 그 짓을 하려 할 것이네.”

교생은 기뻐하며 말했다.

“그러면 나도 좋지!”

얼마 후, 교생이 그의 친구와 함게 시냇가를 지나갔다. 마침 관비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친구가 교생을 불렀다.

“망아지 아비야!”

“너는 어찌 사람을 가리켜 망아지 아비라 하느냐?”

“네가 항상 암말과 교미를 하는 까닭에 망아지 아비라고 한다.”

그러자 관비는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더럽구나, 저놈! 짐승과 간음하는 무리이니 사람의 부류가 아니로다!”

교생을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망아지 아비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교생(校生) : 향교(鄕校)의 유생(儒生)의 한 가지. 뒷날 향교(鄕校)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

 

 

☞호린멸촉(呼隣滅燭)

 

한 고을에서 논밭의 세금을 다루는 아전이 있었다. 그가 서울에 올라가 세금을 바치고 돌아올 때였다. 아전이 그 집 주인에게 물었다.

“서울 기생 중에 누가 제일이오?”

“당신은 지금 주머니가 비었잖소? 그런데 이름난 기생이 무슨 이유로 당신을 즐겨 보려 하겠소?”

“그저 그 집이나 알려주시오.”

그러자 주인은 아무개의 집 아무개 기생을 알려주었다.

아전은 마침내 관인이 찍힌 문서를 가지고 황혼을 타서 주인이 알려준 기생집으로 갔다. 그리고 문 앞에 누워, 취해 쓰러져 자는 시늉을 했다. 기생은 그가 공문서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어떤 고을의 아전이라 여겨 그를 부축하여 방 안으로 데리고 갔다.

술상을 차려 해장술을 내온 기생은 그에게 그곳에 오게 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아전이 대답했다.

“나는 본디 어떤 고을에서 논과 밭에 딸린 세금을 담당하는 아전인데, 때마침 술집에 갔다가 길 위에 쓰러졌나보네. 만약 자네가 아니었다면 통행금그지에 걸렸을 테지. 내 마땅히 내일은 뱃머리에 나아가 쌀 여섯 석을 말에 태워 보내 자네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함세.”

기생은 더 많은 재물을 뜯어내고자 아전과 동침하며 온갖 교태를 부렸다. 밤이 깊어지자 안전이 기생에게 말했다.

“내가 고향에 있을 때는 특별히 음정(淫情)을 돋우는 묘방을 썼었네.”

“제게도 그것을 한번 시험해보시지요.”

“그중에도 그네놀이가 가장 좋으니, 명주 한 필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기생은 즉시 명주를 내주었다. 그러자 아전은 명주로 네 귀퉁이를 만들어 기생의 손과 발을 묶고 들보 위에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당겼다 밀었다 하며 양물을 집어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아전이 기생에게 물었다.

“이것이 묘방이 아니겠느냐?”

“믿고 또 믿습니다.”

즐거움을 마치자, 아전은 남은 초에 불을 붙여 기생의 음호에 꽂아 놓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기생은 아직도 들보에 매달려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그 뜨거움을 견딜 수 없어 결국 기생은 견디다 못해 “불이야!”하고 외쳤다.

이웃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기생의 집에 불이 났다고 하며 모두 물동이를 들고 왔다. 하지만 아무런 연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 안에서는 유독 ‘불이 났다’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문을 열고 보았더니 그 집 기생이 들보에 매달려 있는데, 음호에 초가 꽂혀 있어 불이 거의 닿을 지경이었다.

이웃 사람이 초를 빼고 묶인 것도 풀어준 뒤 기생에게 그 연유를 물었지만, 기생은 부끄러워하며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낙안읍성, 임수철사진]

 

☞기평시율(妓評詩律)

 

부안 기생 계월(桂月)은 시를 잘 짓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능했다. 스스로 매창(梅窓)이란 호를 지었다.

계월이 재주 있는 기생으로 뽑혀 서울에 올라오자, 지체 높은 도령이나 재주 있는 소년들은 앞 다투어 매창을 맞이함으로써 더불어 시를 주고받으며 시를 논하려 하였다.

▶재주 있는 기생으로 뽑혀 서울에 올라오자 : 조선시대에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지방에서 기생을 뽑아 서울로 올렸다. 이들은 장악원(掌樂院)의 지도하에 노래와 춤을 연습한 뒤 궁중행사에 참석하게 되는데, 이처럼 서울로 뽑혀 올라온 기생을 선상기(選上妓)라 했다.

 

어느 날, 유(柳) 아무개가 계월을 방문했을 때다. 스스로 방탕하다고 자부하는 김생과 최생 두 사람이 먼저 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계월은 술자리를 마련하여 그들을 대접했다.

술이 반쯤 취했을 때, 세 사람이 모두 눈길을 보내며 계월을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 그러자 계월은 웃으며 제안하였다.

“여러분께서 모두 풍류 있는 시를 읊어 한바탕 즐거움을 더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컨대

 

 玉臂千人枕  옥같이 흰 팔은 천 사람의 베개요

 丹脣萬客嘗  붉은 입술은 만 사람이 맛보았다네.

 汝身非霜刀  네 몸은 서릿발 같은 칼도 아니면서

 何遽斷我腸  어찌 내 애간장을 베어내느냐

 

라든가

 

 足舞三更月  다리가 춤추니 삼경 달이 뜨고

 衾翻一陣風  비단 이불 펄럭여 한바탕 바람이네.

 此時無限味  이때의 한없는 즐거움은

 惟在兩人同  두 사람의 마음이 같은 데 있네.

 

와 같은 시들이란 모두 천박한 기생들이나 읊조리는 것으로, 족히 귀를 기울여 들을 만한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나 전에 들어보지 못한 시를 읊어 제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저는 그분과 더불어 즐거움을 나눌까 하옵니다.“

세 사람은 모두 좋다며 허락하였다.

김생이 먼저 칠언절구 한 수를 읊었다.

 

 窓外三更細雨時  삼경 창밖에 가는 비 내릴 때

 兩人心事兩人知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리라

 新情未洽天將曉  새로운 정이 흡족하기도 전에 새벽하늘 밝아오니

 更把羅衫問後期  비단 적삼 부여잡으며 다시 만날 때를 묻누나.

 

이어서 최생도 읊었다.

 

 抱向紗窓弄未休  비단 창을 향해 님을 안고 희롱함을 그치지 않으니

 半含嬌態半含羞  반쯤은 교태를 머금고 반쯤은 부끄러워하네.

 低聲暗問相思否  낮은 소리로 가만히 ‘나를 생각하느냐’ 물으니

 手整金釵笑點頭  손으로 금비녀 매만지며 웃음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네

 

계월이 다 듣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

“앞의 시는 매우 졸렬하옵고, 뒤의 시는 다소 묘미가 있사오나 수법이 낮아 들을 만하지 않습니다. 무릇 칠언절구가 정교한 것은 칠언이 곡조에 가깝기 때문이죠. 율시(律詩)는 그보다 어려우니 저는 마땅히 그 어려운 것을 짓는 사람을 선택하겠습니다.”

김생이 다시 읊조렸다.

 

 年纔十五窈窕娘  이제 열다섯인 정숙하고 아리따운 아가씨

 名滿長安第一唱  노래 솜씨 장안 제일이라 소문 자자하네

 蕩子恩情深似海  탕자와의 은정은 바다처럼 깊은데

 花宮威令肅如霜  화궁의 위엄 있는 명령은 서리처럼 싸늘하네

 蘭窓日暖朝粧急  난초 창으로 드는 햇살 따스하니 아침 화장 바쁘고

 松峴風高夕履忙  솔 고개 바람 높으니 저녁 걸음 바쁘다.

 相別時多相見少  서로 이별한 적은 많지만 만난 때는 적으니

 陽坮雲雨惱襄王  양대(陽坮)의 운우를 보며 초양왕을 한하네.

 

곧이어 최생이 말했다.

“이 시는 비록 아름다우나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네.”

그리고는 이내 칠언율시를 읊었다.

 

 立馬江頭別故遲  강 머리에 말을 세워두고 이별이 더딘데

 生憎楊柳最長枝  버드나무 가장 긴 가지 미워지네.

 佳人緣薄含新態  인연 짧은 아리따운 여인은 새로운 교태 머금는데

 蕩子情多問後期  정이 많은 탕자는 다시 만날 기약 묻네.

 挑李落來寒食節  복숭아꽃 배꽃 떨어지니 한식날 가까웠고

 鷓鴣飛去夕陽時  자고새 날아가는 석양 무렵

 草長南浦春波濶  남포에 풀이 무성하고 봄 물결 일렁이니

 欲採蘋花有時思  부평초 캐려다가 때때로 생각한다오.

 

계월이 말했다.

“이 시는 정위지음(鄭衛之音)보다도 못합니다. 조금 청명한 운치가 있지만 사람을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그리고는 유생(柳生)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찌하여 홀로 시를 읊지 아니하십니까?”“나는 본래 문장이 짧고, 다만 커다란 양물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노애(嫪毐)가 성기로 수레바퀴를 끌던 재주만이 있을 뿐이네.”

▶정위지음(鄭衛之音) : 중국 주(周)나라의 제후국인 정(鄭)나라와 위(衛)나라의 음악. 음란한 음악이란 의미로 쓰임.

▶노애(嫪毐) :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모인 조희(趙姬)와의 밀애 사실이 들통 날 것을 두려워하여, 성기가 크기로 유명한 노애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성기에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걸어서 끌게 함으로써 음욕이 심한 조희의 환심을 사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희와 노애는 밀통하는 사이가 되어 아이 둘을 낳았고, 후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시황에게 삼족이 몰살당하였다.

 

계월이 잠자코 웃기만 하였다. 그러자 최생이 발끈하며 말했다.

“자네가 비록 그런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오늘은 마땅히 시의 순위를 따라야 할 것이네.”

김생은 자못 자만한 얼굴빛을 짓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게 율시 한 편이 있는데 이것이 자네들을 압도하여 내가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걸세.”

그리고는 즉시 칠언율시를 읊었다.

 

 秋宵易曙莫言長  가을 밤 쉬 밝아오니 길다는 말 하지 말고

 促向燈前解繡裳  빨리 등불 앞에 마주 앉아 비단치마나 푸시게

 獨眼迷開睛吐氣  한 눈을 희미하게 뜨니 그 속 눈동자는 반짝이고

 兩胸自合汗生香  두 가슴이 한데 합쳐지니 땀 냄새도 향기로워

 脚如螻蟈波翻急  다리는 개구리가 물에서 급히 움직이는 듯하고

 腰似蜻蜓點水忙  허리는 잠자리가 물을 스치고 급히 올라가는 듯하네

 强健向來心自負  강건하다고 이제까지 마음에 자부하고 있었지만

 愛根深淺問娘娘  사랑의 뿌리가 깊은지 얕은지를 낭자에게 물어보네.

 

계월은 좋다고 칭찬하였다. 그러자 유생이 말했다.“당신들이 읊은 것은 모두가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 진부한 것이니 어찌 눈을 주어 볼 만한 것이 있겠소? 내 마땅히 새로 하나의 율시를 내놓아 오늘 이 자리에 깃발을 세워볼까 하오.”

그리고는 계월에게 운을 띄우게 하고 그 소리에 맞춰 시를 읊었다.

 

 探春豪士氣昻然  봄을 찾는 호방한 선비 기개가 높으니

 翡翠衾中有好緣  비취 이불 속에서 좋은 인연 있으리라.

 撑去玉腎兩脚屹  버티고 선 옥 같은 그것은 두 다리 사이에 우뚝하여

 貫來丹穴兩弦圓  붉은 구멍을 뚫으니 양 시위가 둥글어졌네.

 初看嬌眼迷如霧  처음 보았을 때는 아름다운 눈이 안개처럼 뿌옇더니

 漸覺長天小似錢  점차 넓은 하늘이 동전처럼 작아지는 것을 알겠네.

 這裡若論滋味別  이 속에서 만일 재미의 특별함을 논한다면

 一宵高價値金千  하룻밤 가치는 천금이라.

 

계월은 유생이 시 읊기를 마치자 탄식하며 말했다.

“이는 운을 띄우자마자 즉각 지어 부른 것이지만, 잠자리의 정태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말이 매우 호방하면서도 굳건하니 진실로 평범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아니옵니다. 원컨대 고귀하신 존함을 듣고자 합니다.”

“나는 유아무개일세.”

그러자 계월이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이처럼 누추한 곳에 왕림하실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사온데, 오늘 다행히 만나게 되었군요.”

그리고는 이내 술잔을 올리면서 웃으며 말했다.

‘만약 혼천(渾天)이 동전처럼 된다면야 그 가치가 어찌 천금에 그치겠습니까?“

그리고는 두 사람을 향하여 말했다.

“두 분이 읊은 시는 냉수 한 잔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최생과 김생 두 사람은 모두 말없이 물러가고, 유생은 마침내 뜻을 이뤄 계월을 끼고 잤다고 한다.

 

 

번역본 출처 : 조선후기 성소화선집(김준형 옮김, 2010,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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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집의겨울풍경 - 농어촌경관사진콘테스트 1회 [가작] 유홍균]

 

‘기생이 시율을 품평한다’는 위 ‘기평시율(妓評詩律)’에 나오는 계월이라는 기생은 실제 인물이다. 19세기 말에 시조 작품을 정리하여 편찬한 가집 『가곡원류(歌曲源流)』에는 매창의 시조인 〈배꽃비[梨花雨] 흣날릴제~〉를 싣고 그 아래 “계랑은 부안의 이름난 기생이다. 시에 능했으며 『매창집』이 있다. 유희경의 애인이었는데 촌은(村隱)이 서울로 돌아간 뒤 아무런 소식이 없자 이 노래를 짓고 절개를 지켰다.”라는 주(註)를 덧붙여 매창(梅窓)이 비록 기녀이지만 절개를 지켰음을 밝히고 있다.

 

매창(梅窓, 1573 ~ 1610)은 고을 아전의 딸로 태어나 전라북도 부안(扶安)의 기녀가 되었다.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계생(癸生) 또는 계생(桂生),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매창(梅窓)은 스스로 붙인 호이다. 시와 노래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한다. 매창은 기녀로서 당대 많은 사대부와 교유하였고, 그 중에서도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 ~ 1636),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 ~ 1618), 묵재(黙齋) 이귀(李貴, 1557~1633)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특히 유희경과는 각별한 애정을 나누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희경은 천민출신이었지만 성품이 깨끗하고 조심성이 있으며 효성이 지극했던 인물로, 시도 잘 지었다. 유희경은 일찍이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매창을 보고 파계하였으며 서로 풍류로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희경은 의병을 모아 유성룡을 도와 싸웠다. 이때 매창이 유희경을 전쟁터로 보낸 뒤 지난 일을 회고하며 떠난 임에 대한 근심과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로 남긴 것이 있다.

 

 松栢芳盟日  송백처럼 푸르자 맹세하던 날

 恩情與海深  사랑은 바다같이 깊었는데

 江南靑鳥斷  멀리 떠난 임 소식 끊어졌으니

 中夜獨傷心  한밤중에 홀로 마음 아프네

 

유희경은 한번 서울로 올라간 이후로는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자 어떤 과객(過客)이 매창의 명성을 듣고 시를 지어 유혹했는데 매창은 그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어 이렇게 답했다.

 

 平生不學食東家  평생 여기 저기 떠도는 생활 배우지 않고

 只愛梅窓月影斜  오로지 매창에 빗긴 달만 사랑했네

 時人未識幽閑意  사람들은 유한(幽閑)한 뜻을 모르고

 指點行雲枉自多  뜬구름이라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네

▶유한(幽閑) : 조용하고 정숙하다

 

자신이 비록 기녀지만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며 밥 얻어먹고 잠자는 것은 배우지 않았으니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무에게나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아무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정결(貞潔)을 표명한 것인데, 이는 유희경을 마음에 품고 쓴 시인 듯하다. 

 

매창에 대한 유희경의 사랑도 각별하여 매창을 그리는 시를 여러 편 지었고, 매창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시가 지금도 약 10여 수 남아 전한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연락이 끊어지면서 매창은 실의에 잠겨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렸다. 자신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몸에 병까지 났다. 그러면서 나이 먹어 가는 자신을 돌아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이렇게 노래했다.

 

 空閨養拙病餘身  홀로 사는 몸 제대로 돌보지 못해 몸엔 병만 남고

 長任飢寒四十春  오랜 동안 굶주리고 추웠는데 마흔 살이네

 借問人生能幾許  묻노니 인생이 얼마나 되는가

 胸懷無日不沾巾  가슴에 맺힌 마음 하루도 눈물 거둘 날 없네

 

매창은 서른여덟의 나이에 죽었다. 그녀가 죽은 지 45년 뒤인 1655년에는 기녀인 그녀의 무덤 앞에 비가 세워졌고, 58년 뒤인 1668년에는 그녀의 시집 『매창집(梅窓集)』도 간행되었다.

 

허균이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애계랑(哀桂娘)〉이란 시에도 “계랑은 부안의 기생이다. 시를 잘 짓고 문장을 알았으며 노래를 잘 부르고 거문고를 잘 탔다. 성품이 고결하여 음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거리낌 없이 사귀었다. 비록 우스갯소리로 즐기긴 했지만 어지러운 지경에까지 이르진 않았다.”는 주(註)가 있어 매창의 성정이 깨끗하고 맑아 몸가짐이 정숙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 및 인용 : 한국고전여성시사(조연숙, 2011. 국학자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