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옛날이야기 35 - 각수록(覺睡錄) 1

從心所欲 2020. 9. 1. 11:50

「각수록(覺睡錄)」은 2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패설집이다. 여기에는 총 25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모두 성(性)에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실린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전의 이야기들보다 비도덕적이고 반윤리적인 구석들이 조금 더 많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과거부터 전해온 이야기들이 식상하다고 생각하여 더 자극적으로 이야기를 꾸미다 보니 생긴 결과인지도 모른다. 또 이전 이야기들의 끝에 따라 붙였던 ‘이야기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웃더라’ 나 ‘포복절도하더라’ 같은 표현들이 이 책의 이야기들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최재순 화백 <겨울나기>]

 

☞화산거사전(花山居士傳)

화산거사(花山居士)가 유람차 강원도에 갔을 때다. 날은 저물고 길은 멀어 방황하다가 겨우 인가를 발견하여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남주인 엽(獵)은 총을 메고 나가고, 여주인 침(針)만 무료히 앉아 있었다. 거사가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서 왼손으로는 그녀의 젖가슴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랬더니 “이 무슨 짓이오? 이 무슨 짓이오?” 하더니 그 소리도 점점 끊어지더라.

이것은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로 공자의 관일지도(貫一之道)를 행한 것으로, 너도 또한 즐거움을 누리고, 나도 또한 그 즐거움을 누려 두 사람이 모두 즐거웠으니 곁에 있는 사람들이야 무슨 상관이리오!

▶관일지도(貫一之道) : 「논어」의 ‘공자께서 “삼(參)아! 나의 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써 관통되어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시자 증자가 "예!" 하고 대답하셨다. 공자가 나가시자 문인들이 물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증자께서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도는 충서(忠恕)일 뿐이다." ’라는 구절에 나오는 말을 끌어다 쓴 것이지만, 본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꿸 관(貫)’자에 초점을 맞춘 말의 장난이다.

 

 

☞역장군전(力將軍傳)

남쪽나라에 역장군(力將軍)이라 불리는 세력이 큰 족속은 외눈에다 몸체가 길었다. 역장군은 북쪽 나라 호지국(胡池國)과

잘 지냈는데, 호지국이 하루아침에 반역을 꾀하자 크게 화를 내며 치고자 했다. 그러자 좌우에서 역장군을 모시던 낭관(郎官)들이 간했다.

“호지국은 매우 멀뿐더러 외부는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쉽게 공격할 수 없습니다.”

역장군은 머리를 흔들며 들은 체도 않고 두 낭관을 거느리고 호지국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내 큰 못 가운데에 빠져 하얀 피를 토해내며 죽고 말았다.

 

 

☞양도상혼(兩釖相婚)

한 마을에 서른 살이 채 되지 않은 아름답고 고운 과부가 있었다. 그 과부는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절개를 굽혀 다시 결혼한다면 금수의 무리가 되리니, 나는 마땅히 한 지아비만을 따르면서 생을 마치리라.’

그리하여 큰 칼을 만들어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다. 어디를 가든 칼을 차고 다녔고, 잠을 잘 때도 칼을 쥐고 잤다.

“만약 내게 개가를 권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이 칼로 그를 죽이고 나 또한 자결하리라.”

이 말이 퍼져나가자, 마을 사람들은 감히 그 뜻을 흔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이웃에 사는 나이가 서른 살에 가까우며 과부와도 면식이 있는 총각이 있었다. 그는 과부의 자색(姿色)을 탐하여 항상 그녀의 뜻을 꺾어보고자 했다.

하루는 계책 하나를 생각해내고는 날카로운 칼을 지니고 일부러 비가 오는 날을 골라 과부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는 과부와 나란히 않아 예를 갖췄다. 그때고 과부의 손에서는 칼이 떨어지지 않았다.

총각이 말했다.

“부인께서 개가하려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부인은 참으로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는 평생토록 아내를 맞이하지 않으렵니다. 만약 내게 아내를 맞이하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이 칼로 그를 죽인 다음에 나도 자살하렵니다.”

그리고는 지니고 있는 칼을 들어 보였다. 이에 과부가 말했다.

“여인이 지아비를 바꾸지 아니하는 것은 천지간에 변하지 않는 법도입니다. 그러나 장부가 부인을 맞이하지 않겠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세상에 부인과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그려! 무릇 보통의 남녀가 혼인하여 짝이 되면 살어서는 예로써 부창부수(夫唱婦隨)를 하는 것이 마땅하고, 죽어서는 제사로써 배향(配享)되는 것이 마땅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예가 무너지고 풍속이 변하여, 지아비가 죽어 눈도 채 감지 않았는데도 다른 지아비를 고르기에 바쁘답니다. 때로는 지아비를 죽이고서 다른 사람을 따르는 자도 있지요. 나는 여자를 모두 요망한 귀신으로 여길 뿐, 장부가 가까이할 것은 못 된다고 생각한답니다.”

“참으로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고는 종일토록 수작하는데, 마음에 막히는 데가 없었다.

날은 이미 저물었으나 비는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총각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간다고 했지만, 밤이 깊어도 돌아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같은 침상 위에서 잠을 자야 했다.

두 사람은 침대 머리맡에 각자의 칼을 놓아두고 촛불도 밝힌 채 누웠다. 총각은 옷을 벗고 알몸을 드러내고, 마음을 놓은 채 거짓으로 잠든 척하며 우레처럼 코를 골아댔다. 그에 맞춰 그의 양물은 화를 낸 듯이 일어나 높이 치솟았는데, 그것은 마치 나뭇가지가 바람에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과부가 그 양물을 한 번 보니 갑자기 춘정이 발동하여 금석과 같던 맹세도 얼음 녹듯이 사라졌다. 드디어 과부는 마음을 정하고 두 칼을 모두 숨긴 다음 벌거벗은 채 총각에게 다가갔다. 총각은 거짓으로 놀라는 척하며 일어나 침대 머리맡을 더듬었다.

“칼이 어디로 갔지, 칼이 어디로 갔어?”

과부는 총각을 말리며 말했다.

“내 맹세코 다른 뜻은 없소. 지금 당신을 보니 굳은 마음이 재처럼 흐트러질뿐더러, 도리어 좀 더 일찍 다른 사람을 맞이하여 이런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무릇 사람이 한 세상을 살지만 그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답니다. 지금 나는 혼자이고, 당신 또한 홀로 살고 있지요. 두 사람이 홀로 지내며 고통을 받느니, 차라리 둘이 합하여 서로가 즐거움을 누리는 것만 못하답니다. 바라건대 나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주십시오.”

총각은 처음에는 발끈하며 화를 냈지만, 나중에는 못 이기는 척하며 좇았다. 결국 두 사람은 영원토록 즐거움을 나누었는데 그 복이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날초행매(辣椒行媒)

담양의 서리(胥吏) 오 아무개가 마을에 일이 있어 순천 지방을 지날 때였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한 여인이 매운 산초를 빻고 있었다. 오서리는 마음속으로 그 여인을 범하려고 가까이 다가가 말을 꺼냈다.

“음문이나 한번 벌려주시게.”

그러자 여인은 화를 내며 꾸짖었다. 이에 오서리가 말했다.

“만약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네 음문은 반드시 썩어버릴 것이네.”

여인은 그 말이 의심스러워 손으로 음문을 만지작거렸다. 그랬더니 매운 산초가 손을 통해 음문으로 들어가서 갑자기 통증을 일으키는데, 그 아픔은 참을 수가 없었다. 여인은 몹시 두려워 급히 서리를 불렀다.

“여보! 나그네! 날 좀 살려주오!”

오서리는 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당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손으로 음문을 만졌더니, 음문의 통증이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 같네요. 바라건대 당신 마음대로 그것을 치료해주시오.”

“일찍부터 내 말을 좇았다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 아니냐?”

그리고는 맑은 물에 수건을 적셔 음문의 안쪽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여인은 흥이 일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수건의 시원함이 양물의 따뜻함보다 낫네요. 바라건대 수건이나 바삐 움직여주세요.”

“양물의 따뜻함이 수건의 시원함보다야 낫지. 내 양물을 한번 받아 보시게.”

마침내 둘은 운우의 즐거움을 나누었다.

 

 

☞시상비부(枾商非夫)

한 촌가에서 사위를 맞이하였다. 상인이었던 사위는 혼례식만 마치고 다시 행상에 나섰다. 아내는 친정에 머물러 지냈는데, 몇 달이 지나도 상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는 곶감을 파는 장사치가 신부 집 문 앞에 이르렀다. 신부어머니가 장사치를 보니 그 모습이 자기 사위와 매우 비슷하여 그 장사치를 사위로 알고 반갑게 맞이하였다. 곶감 짐 보따리도 받아 안방에 두었다.

밤이 되자 신부어머니는 딸에게 곶감 장사와 동침을 하도록 했다. 딸은 어머니의 말을 좇아 방에 들어가 잠자리를 돌보았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그는 자신의 지아비가 아니었다. 딸은 절개를 잃은 것에 분노하여 급히 밖으로 나와 어머니에게 따졌다. 이 난리는 아침밥을 먹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곶감 장사치는 이런 연고도 모르고, 그저 아름다운 여인을 얻게 된 것에 즐거워하며, 방에 앉아 아침밥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해가 중천에 걸렸는데도 아침밥은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안방으로 가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집의 손님 대접은 왜 이리 쌀쌀맞습니까? 지난밤에는 접대가 지나치게 후하여 딸로 내 계집을 삼게하더니, 오늘은 해가 중천에 걸렸는데도 밥 한 술 내주지 않으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날이 늦어가고 갈 길은 머니 빨리 갈 수밖에 없으니, 내 곶감 보따리나 돌려주십쇼.“

신부어머니는 그저 멍하니 있으면서 대답조차 못했다. 그저 곶감 보따리를 돌려주고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할비도혼(割臂圖婚)

청주에 송과부가 있었다. 송과부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지아비를 잃고 십 년을 홀로 살아왔지만, 그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 이웃에는 아무개 선비가 있었는데, 그는 송과부를 겁탈하고자 했다. 어느 날 선비는 소고기 덩어리를 양쪽 팔뚝에 동여매고 과부의 집으로 찾아가 하룻밤 자고 갈 것을 청했다. 날이 이미 컴컴해지고 있었고, 비 또한 퍼부었기 때문에 과부는 딱히 거절할 수가 없어, 부득이 자고 가도록 허락하였다.

과부의 집은 자그마해서 안채와 바깥채의 구분이 없었다. 그래서 한방에서 같이 잘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는 자리를 비우고 과부는 방 위쪽에 자리를 잡고, 선비는 아래쪽에 누웠다.

선비는 거짓으로 잠든 척하며 몸을 뒤척이다가 왼쪽 팔을 과부의 어깨 위에 올렸다. 과부는 그 팔을 가볍게 들어 내려놓았다. 그러자 선비는 놀라 일어나더니 차고 있던 탈을 꺼내 왼쪽 팔뚝 위에 묶어둔 소고기를 베어 문밖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옷을 찢어 팔뚝을 동여매고 다시 잠을 자는 척했다.

잠시 후, 선비는 다시 오른쪽 팔을 과부의 가슴 위에다 얹었다. 과부는 다시 그 팔을 가볍게 들어 내려놓았다. 선비는 또다시 놀라 일어나더니, 다시 오른쪽 팔뚝 위에 묶어둔 소고기를 베어 문밖으로 던졌다.

놀란 과부는 간담이 서늘하였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이처럼 매서운 선비는 없으리라! 나 때문에 팔뚝의 살점까지 잘라냈구나. 맑고 냉정하기가 이러할진대 어찌 사특한 마음이 있겠는가? 내 다시는 그와 살이 맞닿는대도 관여치 않으리라.‘

그리고는 마음을 놓고 잠이 들었다.

잠시 후 선비는 다시 과부의 배에 팔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과부는 조금도 놀라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선비는 과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 다리를 누르고서 마음대로 희롱하였다. 과부는 거기서 빠져나올 계책이 없었다.

결국 과부는 선비의 첩이 되었다.

 

[최재순 화백 <겨울>]

 

☞보지자지(寶池刺之)

조선 명종(明宗)조 때다. 영남 지방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도가 높고 덕이 커서 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았다. 당시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도 퇴계 선생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선비가 두 선생의 덕을 시험해보고자 했다. 먼저 선비는 찢어진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복건을 쓰고 남명 선생을 방문했다. 그리고는 읍(揖)만 하고 절은 하지 않은 채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바라옵건대 선생께서는 저를 가르쳐주십시오. 청컨대 보지(寶池)【우리말로 음문을 보지라고 한다】가 무엇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남명 선생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비는 또다시 질문하였다.

“그럼, 자지【우리말로 양물을 자지라고 한다】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남명 선생은 화를 내며 제자들에게 선비를 쫓아내게 했다.

“이 자는 미친 사람이로다. 가히 가까이 할 수가 없구나.”

선비는 문을 나서서 퇴계 선생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절도 하지 않고 다리를 쭉 뻗고 앉은 채로 물었다.

“보지가 무엇입니까?”

“걸어 다닐 때 감추어지는 것으로, 보배로운 것이지만 시장에는 없는 것이오.”

선비는 다시 물었다.

“그럼, 자지는 무엇입니까?”

“앉아 있을 때 감추어지는 것으로, 찌를 수는 있으나 전쟁에서는 쓸 수 없는 것이오.”

이로써 선비는 퇴계 선생의 덕이 남명 선생보다 나음을 알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 1501 ~ 1572.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나 영남좌도의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영남우도의 학풍을 대표한 인물이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문풍을 일으켰다. 조식의 문인들 중에는 정인홍, 최영경 등과 같이 정계에 진출하여 북인(北人)의 주축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조식의 제자들은 대부분 조식이 벼슬에 나오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행적을 이어받아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기절을 숭상하며 처사적인 학풍을 중시했다. 임진왜란 때에도 남명학파의 인물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많은 활약을 했다.

 

☞역와시유(易瓦示喩)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지체 높은 공주와 결혼한 다음 날에 즐거움을 나누려 했다. 그런데 공주는 자신이 아래에 있지 않겠다고 하며 동양위를 아래에 눕게 하고 자신은 동양위의 배 위에 엎드렸다. 동양위는 밤새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동양위는 침전의 용마루 위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그 위치를 바꾸기 시작했다. 수키와를 아래에 놓고 암키와를 그 위에 엎어놓았다.

왕비가 그 까닭을 묻자, 동양위가 대답했다.

“이는 지난밤 공주께서 가르치신 바입니다. 바라옵건대 공주가 보게 해주십시오.”

공주는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다시는 지아비의 명을 어기지 않았다.

▶신익성(申翊聖, 1588 ~ 1644)은 선조의 후궁이었던 인빈 김씨(仁嬪 金氏)의 셋째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 1587 ~ 1627)와 혼인하여 선조의 부마(駙馬)가 되고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두 사람 사이의 자녀가 5남 4녀나 되었으니 실제 부부간의 금술은 좋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번역본 출처 : 조선후기 성소화선집(김준형 옮김, 2010,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