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진재 김윤겸 - 다른 그림들

從心所欲 2020. 10. 24. 10:11

[<김윤겸필 신선도(金允謙筆神仙圖)>, 지본담채, 45.5 x 110.3cm, 국립중앙박물관]

 

신선도는 환갑이나 잔치 때 오래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는 축원의 의미를 담아 선물했던 주제의 그림이다. 그래서 특히 정성들여 제작한 작품들이 많다. 불로장생의 신선을 동경하고, 지상 어딘가에 있을 낙원을 소망하며 그려낸 신선도는 대개 배경을 생략하거나 간략하게 그려 인물을 부각한다. 신선으로 보이는 인물이 동물이나 동자와 함께 있는 구도가 일반적이다.

 

도교에서 일컫는 신선들은 500여 명이 넘는다. 그중에서도 신선도의 그림 소재로 많이 다루어졌던 대표적인 신선은 종리권(鍾離權)을 중심으로 하는 8선(八仙)이다. 팔선에는 실재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공의 인물도 있으며, 이들은 각기 관련된 이야기를 상징하는 물건을 지닌 모습으로 그려진다. 각각 따로 그리기도 하지만, 대개는 여럿이 함께 술이나 차를 마시거나 바둑을 두는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김윤겸필 신선도(金允謙筆神仙圖)> 중 오른쪽 확대]

 

[<김윤겸필 신선도(金允謙筆神仙圖)> 중 왼쪽 확대]

 

종리권(鍾離權)은 팔대선인의 우두머리로 머리 양쪽에 상투를 틀고 배를 드러낸 채 파초선(芭蕉扇)을 들고 있는 모습, 장과로(張果老)는 흰 나귀를 거꾸로 타거나 어고간자(漁鼓簡子)나 서책(書冊)을 든 노인의 모습, 여동빈(呂洞賓)은 화양건(華陽巾)을 쓰고 모든 번뇌를 끊고 악의 세계를 제어한다는 검을 찬 모습, 조국구(曹國舅)는 관복 차림에 죽은 사람을 살리는 딱따기를 든 모습, 이철괴(李鐵拐)는 철괴를 들고 장춘(長春)이라는 약이 담긴 호리병을 가지고 있는 모습, 한상자(韓湘子)는 피리나 어고간자를 들고 있는 젊은이, 남채화(藍采和)는 누더기를 입고 꽃을 든 청년, 하선고(何仙姑)는 연꽃 줄기나 국자를 든 젊은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각 신선들의 이러한 모습들은 화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기도 한다. 이 여덟 명의 신선을 그린 그림을 팔선도(八仙圖)라고 하며, 김윤겸의 <신선도> 역시 팔선도이다.

▶파초선(芭蕉扇) : 파초의 잎 모양처럼 만든 부채, 또는 폭 넓은 파초 잎을 그대로 구부려 드리운 것

▶어고간자(漁鼓簡子) : 대나무로 만든 악기

▶화양건(華陽巾) : 도가(道家)나 은거 생활을 하던 사람이 쓰던 쓰개의 하나

 

[김윤겸 <신행도해선도(信行渡海船圖)>, 22.5 × 31.5㎝, 북한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북한에서는 이 그림을 '사신 바다를 건느다'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18세기 왜국으로 가는 통신사(通信使) 일행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김윤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김윤겸이 태어난 1711년부터 1719년, 1748년, 1764년까지 4차례의 통신사 파견이 있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1748년이나 1763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윤겸 <호병도(胡兵圖)>, 지본담채, 57 x 33cm, 국립중앙박물관]

 

김윤겸을 비롯한 김후신 등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 12점이 수록된 『사대가화묘(四大家畵妙)』라는 화첩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청나라 병사를 그린 것이다. 김윤겸은 1770년대 초반 어느 해 초가을에 한 달 간 중국을 다녀온 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윤겸이 북유(北遊)를 한 내력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이 그림은 그 때에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7대에 걸친 의관(醫官) 집안 출신이면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서화 수집가이자 비평가로, 방대한 동서양 그림 수집을 통해 조선 후기 서화의 보전에 많은 기여를 한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 1727 ~ 1797)이란 인물이 있다. 이미 10대 때부터 고서화에 관심을 갖고, 저명한 수장가인 김광수(金光遂), 화가 심사정(沈師正)을 비롯한 당대의 서화가들과 교유하였다고 한다. 50세가 넘으면서 화첩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58세가 된 1784년에 원첩 4권을 만들고 70세가 되는 1796년에 마지막으로 부록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김광국이 71세로 죽기 전까지 평생 수집한 그림을 모은 화첩인 『석농화원(石農畵苑)』이다.

이 『석농화원』에 김광국은 김윤겸의 <추강대도도(秋江待渡圖)>라는 그림에 김윤겸의 말년을 짐작해볼 수 있는 글을 화제(畫題)로 붙였다.

 

【진재(眞宰)는 노가재의 아들로 나와는 양대에 걸친 교분이 있었다. 갑자년(1744년)에 그가 호서로부터 백악산 아래로

나를 찾아왔는데, 당시 나는 어렸으나 서로 망년지교를 맺어 손을 잡고 친구의 정을 이야기하며 술을 실컷 마셨다.

이윽고 그가 종이를 달라고 하여 몇 폭의 산수화를 그렸는데, 호방한 기운이 미간에 넘쳤고 진(晉)나라 명사들의 풍류가 엿보였다.

 

그 후로 진재는 사방으로 다니며 생계를 이었고, 나도 세상일에 얽매여 삼십여 년 간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을미년(1775년) 여름에 우연히 친구 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머리와 눈썹이 하얗게 셌고 어깨가 이마보다 높았으며 입으로는 캑캑 기침소리가 그치지 않아 지난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술을 마련해 주니 진재는 연거푸 서너 잔을 들이키고는 손뼉을 치며 이야기를 하는데, 이야기가 금강산과 설악산의 승경과 동해와 남해의 장관에 이르자 갑자기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그 풍류와 운치는 늙어서도 줄어들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그대는 삼십 년 동안 분주히 다니면서 그저 두 뺨에 흰머리만 얻었구려. 아, 그대가 이처럼 노쇠했으니 나도 늙은 것이오. 신기루 같은 풍경과 부싯돌 섬광 같은 세월이 참으로 슬픕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의 명승지를 두루 돌아보고 발이 미친 곳과 눈으로 본 것을 입으로 역력히 말씀하시니, 가슴속에 산과 바다의 일부를 간직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나를 위하여 손으로 그려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진재는 이미 약간 취했는데도 좋다고 대답하고서, 옷을 벗고 다리를 펴고 앉아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이윽고 붓을 휘두르자 원기(元氣)가 흘러 넘쳐 마치 신령이 그 사이에서 돕는 듯하였다. 이내 붓을 던지고 “기가 막히도다!”라고 하며 크게 웃고서 또 술 한 사발을 들이켜고 해학과 호쾌함이 넘쳐 흠씬 취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기해년(1779년) 봄에 내가 우울증이 생겨 문을 닫고 조용히 거처하는데, 어떤 객이 진재의 그림을 가지고 와 보여주었다. 지금은 진재의 무덤에 풀이 세 번 우거졌는데, 화권(畵券)을 어루만지며 지난날을 회상하니 창연히 슬퍼진다. 마침내 옛일을 이와 같이 기록하니 그림이 잘되고 못되고는 보는 자들이 스스로 알 것이므로 더 말하지 않겠다. 진재의 성은 김이고 윤겸과 극양(克讓)은 그의 이름과 자이다. 일찍이 벼슬하여 관직이 기마(記馬)에 그쳤다.】

 

[김윤겸 <낙산사>, 지본수묵담채, 29.5 x 38.5cm, 개인]

 

 

 

참고 및 인용 : 한국민속예술사전(국립민속박물관), 김광국의 석농화원(石農畵苑)(유홍준 김채식, 2015, 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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