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헌종가례진하계병

從心所欲 2020. 10. 25. 05:29

[<헌종가례진하계병(憲宗嘉禮陳賀圖屛風)>, 비단에 수묵과 채색, 8폭, 각 112.5 x 46.5cm, 경기도 박물관]

 

1844년 10월 헌종이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1903)를 맞이하여 가례를 올린 뒤 진하를 받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헌종은 1843년 효현왕후(孝顯王后)가 죽자 이듬해 10월 18일 익풍부원군 홍재룡(洪在龍)의 딸을 계비로 책봉하고 21일에 친영례(親迎禮)를 치렀다. 헌종은 가례(嘉禮) 의식을 모두 마친 이튿날인 10월 22일 경희궁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문무백관의 진하를 받았는데 ‘헌종가례진하계병’은 바로 이 진하례 장면을 그린 것이다. 진하(陳賀)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조신(朝臣)들이 모여 임금에게 나아가 축하하는 일을 말한다.

▶친영례(親迎禮) : 『의례』·『예기』 등에 수록되어 있는 중국의 혼인의례인 6례 중 하나로 신랑이 신부집에서 신부를 맞아와 자신의 집에서 혼인을 진행하는 절차로 혼례의 마지막 절차이다. 성혼 첫날 신부집에서 동침한 후 3일째 되는 날에야 정식 상견례를 하고 신부의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던 우리나라 전통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과는 상충되는 것이나, 세종 때부터 중국식 혼례절차를 도입하여 시행을 노력한 끝에 조선 후기에는 우리나라의 전통 혼례방식을 물리치고 민간에 자리 잡게 되었다.

 

[<헌종가례진하계병(憲宗嘉禮陳賀圖屛風)> 제1첩]

 

병풍의 제1첩에는 반교문(頒敎文)이 적혀있다. 반교문은 진하례 때 반포된 교서이다. 예문관 제학 조병귀(趙秉龜)가 지어 올렸다고 적혀있다.

 

[<헌종가례진하계병> 제8첩]

 

제8첩에는 선전관청 좌목(宣傳官廳座目)이라는 제목 아래 절충장군(折衝將軍) 윤명검(尹明儉)을 비롯하여 정3품에서 정9품에 이르는 선전관(宣傳官) 25명의 성명과 인적 사항이 쓰여 있다. 이 좌목을 통하여 이 병풍은 선전관청의 관원들이 주축이 되어 제작한 기념화, 즉 계병(契屛)임을 알 수 있다. 계병은 나라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 도감의 벼슬아치들이 그 일을 치른 뒤에, 기념으로 그 일 볼 때의 모양(模樣)을 그려 만드는 병풍이다.

 

선전관(宣傳官)은 조선 시대 형명(形名), 계라(啓螺), 시위(侍衛), 전명(傳命) 및 부신(符信)의 출납 등을 맡아 보던 근시(近侍) 무관직이다. 세조 3년인 1457년부터 어가(御駕) 앞에서 훈도(訓導)하는 임무를 맡던 무관을 선전관(宣傳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선전관청(宣傳官廳)이 설치되면서 정직(正職)이 되었고, 인원은 20명 내외였다. 선전관은 왕명을 전유(傳諭)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무관이면서도 지위와 명망이 높은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다.

▶형명(形名) : 기나 북 등으로 군대의 행동을 호령하는 신호법

▶계라(啓螺) : 왕의 거동(擧動) 때에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취타(吹打).

▶부신(符信) : 병조(兵曹) 등에서 발행한 여러 가지 신표

 

제2첩에서 7첩에 걸쳐서는 인정전에 큰 비중을 두고 진하례 광경을 그렸다. 인정전 좌우의 건물은 이문원, 숙장문, 금천교, 금호문, 그리고 궐내 각사(闕內各司), 선정전, 희정당, 후원의 불로문 등 주요한 전각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인정전 대청에는 호위 의장과 승지와 사관, 그리고 치사문을 낭독하는 뒷모습의 대치사관(代致詞官)이 자리하고 있다. 마당에는 금관조복을 입은 문무백관이 열 지어 앉아 있고 헌가(軒架) 악공과 노부 의장이 줄 맞추어 도열하였다.

 

[<헌종가례진하계병> 제2첩] 

 

[<헌종가례진하계병> 제3첩]

 

[<헌종가례진하계병> 제4첩]

 

 

[<헌종가례진하계병> 제5첩]

 

[<헌종가례진하계병> 제6첩]

 

[<헌종가례진하계병> 제7첩]

 

19세기에는 궁궐의 모습을 재현한 궁궐도 제작이 발달함에 따라 국가의 경사스러운 의례를 마친 후에는 관원들이 기념화를 주문하여 만들었고, 그 중 가장 선호되는 것이 진하도였다고 한다. 진하도의 형식은 각 건물을 정면 부감의 시점에서 그리는 계열과 사선 방향에서 부감하는 시점으로 그리는 두 가지 계열로 나눌 수 있는데, ‘헌종가례진하계병’은 후자의 형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헌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헌종 가례 후의 진하례는 경희궁 숭정전에서 거행되었다. 하지만 계병에는 사실과 달리 인정전이 그려져 있다. 현전하는 19세기 진하도 병풍의 배경이 모두 인정전임을 감안하면, 그림을 주문하는 관원들은 당시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정전인 인정전에서의 진하 장면을 선호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그림 주문을 받는 화원들 사이에는 ‘인정전 진하’라는 정해진 도상의 밑그림이 준비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19세기가 되면 궁중 행사도는 사실적인 기록화로서의 성격보다 기념화로서의 성격이 강해지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이 병풍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부산 동아대 석당박물관에도 있다. 병풍의 크기는 아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경기도박물관 소장본이 그중 작은 편이다. 조선시대의 계병은 좌목에 이름이 오른 관원들의 숫자대로 제작하여 나누어 갖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현재 같은 내용의 그림이 여러 벌 남아 있는 것은 한꺼번에 여러 벌을 제작하여 나누어 가졌던 계병 제작의 관행을 방증하는 것이라 한다.

 

 

 

참고 및 인용 :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