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이의성필(李義聲筆) 하외도(河隈圖)

從心所欲 2020. 10. 27. 18:48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부친인 유중영(柳仲郢, 1515 ~ 1573)이 평북 정주에서 목사(牧使)로 벼슬살이할 때 타향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고향이 그리워졌다. 이에 화공을 시켜 고향 산천의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하외상하낙강일대도(河隈上下洛江一帶圖)>라고 했다. 하외(河隈)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경북 안동 하회(河回)마을의 다른 이름이다. 당시 이 그림에 정유길(鄭惟吉)이 제시를 쓰고, 퇴계 이황(李滉)이 서문(序文)을 썼다. 그런데 병풍으로 만든 이 그림이 전란 중에 소실되고 말았다.

그리고 200년이 넘은 시간이 지난 뒤, 정유길의 후손인 정원용(鄭元容)이 유성룡의 후손인 유철조(柳喆祚)에게서 이 병풍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이를 애석하게 여긴 두 후손은 불타 없어진 <하외상하낙강일대도>를 본 따 새로운 병풍을 만들기로 하고 이의성(李義聲)에게 그림을 의뢰하였다. 이의성(李義聲, 1775 ~ 1833)은 김홍도와 함께, 율곡 이이가 황해도 고산군 석담리에 조성한 고산구곡(高山九曲)을 그린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의 제작에도 참여하였다고 전해지는 조선 후기의 서화가이다.

 

이런 내력으로 만들어진 병풍이 <이의성필(李義聲筆) 하외도(河隈圖)>로, 1828년에 두 벌이 제작되었다. 10폭 병풍으로 1폭에는 퇴계 이황의 서문과 정유길의 시가 있고, 마지막 10폭에는 이 병풍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을 적었다. 2폭부터 9폭까지는 낙동강 하회 일대와 예천지역의 풍경이 그려졌다. 이의성은 하외팔곡도(河隈八曲圖)의 개념으로 안동호 북쪽의 도산서원에서부터 시작하여 낙동강 줄기를 따라 안동 일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가며 화폭에 옮겨 놓았다. 산의 형세와 경물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조감의 시점으로 그리면서 화면의 상부 1/3은 여백으로 남기고, 그 여백에다 화제를 적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한 포치로 보인다.

 

[이의성(李義聲)필(筆) <하외도(河隈圖)>, 10폭 병풍 중 1폭, 130 x 59cm, 국립중앙박물관]

 

1폭에는 유중영이 퇴계 이황에게 병풍의 서문을 요청하여 퇴계가 이를 작성하여 서애 류성룡 편에 부친다는 내용과 퇴계의 시, 그리고 정유길의 시가 적혀있다.

 

[이의성(李義聲)필(筆) <하외도(河隈圖)>, 2폭 도산서원(陶山書院), 130 x 59cm, 국립중앙박물관]

 

안동이 고향인 퇴계 이황은 1546년 마흔여섯 되던 해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155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557년 쉰일곱 되던 해에 도산(陶山) 남쪽의 땅을 구하고 다음 해에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하여 1560년에 도산서당을 낙성하였다. 서애 유성룡은 21세이던 1562년 가을, 형 운룡과 함께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에 매진했으며, 퇴계는 이들 형제의 학문적 자질을 높이 사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유성룡과 동문수학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은 “내가 퇴계선생 밑에 오래 있었으나 한 번도 제자들을 칭찬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대만이 이런 칭송을 받았다”고 놀라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개인적 인연으로 보나 영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로서의 지위를 보나, 안동 지역을 그리는 그림에 도산서원이 제일 앞에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외도(河隈圖)>, 3폭 안동부치(安東府治), 130 x 59cm, 국립중앙박물관]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될 당시의 안동부는 본부(本府) 외에 풍산현, 내성현, 춘양현, 재산현 등 8개의 속현(屬縣)과 개단, 소라, 소천 등 3개의 부곡(部曲)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 후 속현과 부곡에 약간의 변동은 있었고 때로 현으로 격하되기도 하였지만 조선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부치(府治)는 부(府)의 관아가 설치되어 있는 중심 지역을 가리킨다. 부치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城郭)과 사방에 문루들이 보인다.

▶속현(屬縣) : 조선 초기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지방행정구역

▶부곡(部曲) : 고려 때 왕조에 저항한 호족세력지역의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부곡민으로 편성하고, 그들이 사는 지역을 부곡이라 칭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도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된 15세기 전반까지 존속했으나 이후 소멸되었다.

 

[<하외도(河隈圖)>, 4폭 석문정(石門停), 130 x 59cm, 국립중앙박물관]

 

석문정은 현재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에 있는 청성산(靑城山) 중턱에 있는 정자이다.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왜국이 조선을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던 김성일(金誠一)이 1587년에 지은 것이다. 석문이라고 한 것은 정자 서쪽에 바위 둘이 마주보고 서 있고, 골짜기가 비어 마치 문과 같다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하외도(河隈圖)>, 5폭 수동(壽洞), 130 x 59cm, 국립중앙박물관]

 

수동은 풍산읍 마애리와 회곡리 사이에 있던 마을로 아직도 이곳에는 수동이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하외도(河隈圖)>, 6폭 망천(輞川), 130 x 59cm, 국립중앙박물관]

 

풍산읍 마애리는 마을의 생김새가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중국의 망천(輞川)을 빼어 닮았다고 해서 원래 망천으로 불렸었다. 당나라의 대시인이자 문인화의 창시자로 꼽히는 왕유(王維)가 병약한 어머니를 위하여 별장을 짓고 살았던 곳이 장안(長安)에서 멀지 않은 종남산(終南山)의 망천(輞川)이라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후 낙동강 가에 바위를 쪼아 만든 부처상인 마애석조(磨崖石造) 비로자나불좌상(毘盧舍那佛坐像)이 있어 마을 이름이 마애(磨崖)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을 앞 낙동강 기슭에 길게 늘어선 망천절벽이라는 아름다운 기암절벽이 있어 낙동강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와 같은 절경을 자랑하여,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곳이라 한다.

 

[<하외도(河隈圖)>, 7폭 하회(河回), 130 x 59cm, 국립중앙박물관]

 

안동의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豐山 柳氏)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동족마을이다. 유씨가 집단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 등이 유력한 씨족으로 살아왔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씨로서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入鄕祖)는 훨씬 앞선 세대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유씨의 동족기반은 유성룡(柳成龍)과 그 형인 유운룡(柳雲龍) 형제시대에 이룩된 것이라 한다. 낙동강의 넓은 강줄기가 마을 전체를 동·남·서 방향으로 감싸 도는 지형은 태극형 또는 연꽃이 물에 떠있는 형상이라는 의미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한다.

마을을 감싸 도는 화천(花川)은 낙동강 상류이며 그 둘레에는 퇴적된 넓은 모래밭이 펼쳐지고, 그 서북쪽에는 울창한 노송림이 들어서 있다. 백사장에 있는 마을 건너편은 층암절벽이 연속되고 여러 정대(亭臺)가 자리 잡고 있어 승경(勝景)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입향조(入鄕祖) : 어떤 마을에 맨 먼저 정착한 사람이나 조상을 가리키며, ‘입향선조’ 또는 ‘입향시조’라고도 한다.

 

[<하외도(河隈圖)>, 8폭 구담(九潭), 130 x 59cm, 국립중앙박물관]

 

구담은 아홉 개의 물웅덩이를 의미한다. 지금도 안동시 풍천면에 구담리(九潭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며 낙동강의 흐름에 의해 생긴 아홉 개의 깊은 소(沼)가 있다고 소개되고 있다.

 

[<하외도(河隈圖)>, 9폭 지보(知保), 130 x 59cm, 국립중앙박물관]

 

지금도 예천군 지보면이라는 행정구역이 있기는 하지만 그림 속의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지보면은 낙동강 줄기를 따라 구담리의 서쪽에 위치한다.

그림 중앙 상단에 있는 글은 “무자신추(戊子新秋) 근사우학림관(謹寫于鶴林館) 모로 해산정주인감정(慕老 海山亭主人鑒正) 청산유수관(靑山流水觀) 거사 이의성(居士 李義聲)”이다. 무자년인 1828년 이른 가을에 이의성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의성의 호는 청류(淸流)로 알려졌는데, 여기에는 청산유수관(靑山流水觀)이라 썼으니 청류(淸流)의 본래 의미가 이 말에 있었던 모양이다.

 

[<하외도(河隈圖)>, 10폭, 130 x 59cm, 국립중앙박물관]

 

마지막 10폭에는 앞에 소개한 이 병풍의 제작 배경에 대한 설명을 적었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의성 필 <하외도河隈圖> 10폭 병풍(이상국, 2019, 월간민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 옛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하종 해산도첩 2  (0) 2020.10.30
김하종 해산도첩 1  (0) 2020.10.29
전(傳) 김홍도 사인풍속도권  (0) 2020.10.26
헌종가례진하계병  (0) 2020.10.25
진재 김윤겸 - 다른 그림들  (0) 2020.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