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8년 정조의 명으로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금강산 그림을 그리러 갔던 복헌(復軒) 김응환은 개성(開城) 김씨다. 이 개성 김씨는 조선 후기와 말기에 가장 많은 차비대령화원을 배출한 유력한 화원가문이었다. 김응환을 필두로 그의 조카 긍재(兢齋) 김득신은 도화서 화원이었고,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김득신의 두 동생인 김석신(金碩臣)과 김양신(金良臣)도 화원이었으며, 김득신의 세 아들인 김건종(金建鍾), 김수종(金秀鍾), 김하종(金夏鍾) 역시 모두 화원이었다.
특히 김득신의 셋째 아들인 김하종은 이미 13세 때인 1805년에 효명세자 책봉을 위한 책례도감[文祖王世子冊禮圖監]에 소속되어 의장(儀仗) 그림을 담당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다. 또한 차비대령화원으로 봉직하면서 평생 총 113회의 녹취재(祿取才)에 응시하여 1위나 2위를 차지한 횟수가 무려 39회나 됐다고 한다.
▶녹취재(祿取才) : 녹봉을 받지 못하는 관리들에게 녹봉이 있는 벼슬을 주기 위하여 실시하던 일종의 임용시험. 화원들에게는 예조에서 년 2 ~ 4회 시행하였다. |
녹취재 성적에 따르면 김하종은 문방(文房)과 풍속화의 점수가 가장 높고, 매죽과 산수(山水)도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 반면 영모와 인물의 점수는 낮았다. 1831년 규장각 포폄에서는 '산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규장각 포폄 : 규장각 차비대령화원 직제에서 6개월 단위로 내리는 종합적 근무 고과평가 |
김하종은 1793년생으로 23세 때인 1815년 당시 춘천부사였던 소화(小華) 이광문(李光文)을 수행하여 금강산과 관동, 설악산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이광문은 부모를 공양하기 위해 춘천의 지방관으로 자원하여 내려오기 이전까지 규장각 대교(待敎)를 거쳐 직각(直閣)으로 있었기 때문에 규장각의 차비대령화원인 김하종을 일찍부터 눈여겨 봐두었던 듯하다. 이광문은 김하종의 그림에 <유금강설(遊金剛說)>과 <우제해산도첩(又題海山圖帖)>이라는 두 편의 제문을 붙여 서화첩으로 꾸몄다. 총 25면의 그림은 비단 바탕에 수묵을 주로 하고 녹색과 청색을 혼합하여 처리하였다.
조금은 생뚱맞게도 ‘연운공양도(煙雲供養圖)’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연운공양(煙雲供養)은 ‘그림을 보거나 그려 눈을 즐겁게 하는 일’을 가리키거나 ‘아름다운 그림은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건강에 이롭다’는 뜻을 갖는 성어(成語)이다. 그 밑에 숭양거사(嵩陽居士)가 제첨(題簽)했다고 쓰인 것으로 미루어 누군가 뒤에 새로 표지를 만든 것이다.
이광문은 <유금강설(遊金剛說)>에서 “산으로는 금강산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기이하다. 그리하여 중국에도 이름이 알려졌으니 진실로 큰 이름인 것이다. 내가 국내의 이름 있는 산수를 신발이 닳도록 돌아보았으나 아름다운 절경을 구경한 나머지 피로함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을 보지 못한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금강산은 산수 가운데 빼어난 것으로 그 실체가 이름보다 나아서, 곧 중국 연경의 웅혼하고 호사스러움과는 다른 종류로서 짝지을 만하다”며 금강산을 칭송하였다.
그런데 이 제문 중에 “을해년(乙亥年)에 수춘(壽春)에 나가게 되었고, 다음해 여름에 장비를 갖추고 다니러갔다.”는 구절이 있다. 을해년(乙亥年)은 1815년이고 수춘(壽春)은 고려 때 강원도 춘천(春川)을 가리키던 지명의 하나로, 이 글에 따르면 이광문은 1815년에 춘천부사로 갔고 실제 금강산을 방문한 것은 그 다음 해인 1816년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글 끝에 을해하소화주인서(乙亥夏小華主人書)라고 밝힌 간기(刊記)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냥 《해산도첩》의 제작시기를 1815년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제문인 <유금강설>에서는 금강산이란 산에 대한 전체적 소감을 쓰고, <우제해산도첩(又題海山圖帖))>에서는 《해산도첩》에 관련된 여러 소감을 썼는데, 먼저 자신의 그림에 대한 견해부터 밝혔다.
“그림이란 그 모습을 같게 하려는 것이다. 세상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뜻을 그리는 것[畵意]을 묘한 것으로 여기나, 그것은 다만 그린 사람만이 알 뿐 보는 사람이 꼭 기이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뜻을 그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경산수화는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화가가 자신의 뜻에 따라 경물을 생략하거나 강조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경치를 그대로 그리지 않고 왜곡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광문의 사실지향적인 회화관은 18세기 후반 조선의 회화 경향과 연결된다.
조선이 청나라를 통하여 서양 문물을 접하기 시작한 17세기 이후, 새로운 우주관과 세계관을 갖게 되면서 예술에서도 실용성과 객관성을 중시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사실적 묘사에 뛰어난 서양 화법은 18세기 초부터 영정(影幀)과 동물화에서 시도되기 시작하여, 강세황과 강희언 같은 진취적 화가들에 의하여 진경산수화에까지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한편에서는 중국에서 유행하던 남종화(南宗畵)도 유입되어 꾸준히 확산되어 갔다. 통상 우리나라에서는 남종문인화라고 부르지만 대개 남종화는 산수화를 의미하고 문인화는 산수화 외에 사군자, 화조화 등 좀 더 넓은 범위를 가리킨다. 남종화의 특징은 기법에 얽매이거나 사물의 세부적 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단지 그리고자 하는 사물의 진수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의 학문과 교양, 그리고 서도(書道)로 연마한 필력(筆力)을 갖춘 상태에서 영감(靈感)을 받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이 남종화를 선호하여, 19세기에 들어서면서는 주로 황공망(黃公望)과 예찬(倪瓚), 그리고 미불(米芾)과 미우인(米友仁) 부자의 양식을 답습하는 산수화를 뜻하는 미가산수(米家山水)가 성행하였다. 서예성을 강조한 소략한 약화(略畵) 형식을 보이는 이런 그림들을 선호하는 흐름의 중심에는 추사 김정희가 있었고, 이후 <세한도(歲寒圖)>가 그 정점을 찍는다.
이처럼 진경산수화와 남종화는 성향이 전혀 다르다. 그런데 이광문은 진경산수화에서조차 화가가 자기 마음대로 실경을 왜곡하여 그리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우제해산도첩>의 글을 보면 그림에 대한 그의 가치관을 좀 더 잘 알 수 있다.
“내가 풍악산에 놀러 가는데, 규장각 소속의 김하종군이 따라 갔다. 그는 그림을 매우 잘 그리고 산수에 뛰어난 사람으로, 그 높은 뜻이 나와 꼭 같았다. 경치가 좋은 곳에 이르면 문득 종이를 펴서 그 모습을 같게 그렸는데, 만일 비슷하지 않으면 여러 번 고쳐 그리기를 꺼리지 않았다. 그리기 시작할 때에는 먼저 모습을 본뜨려는 마음이 있었고, 운치와 격조를 펼쳐 내는데 얽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신과 경치가 화합되어 몇 번의 붓질로 그림이 이루어지면 고하(高下)와 원근(遠近), 심천(深淺)과 농담(濃淡)으로 경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모두 나타나게 하였다.“
경물에 대한 사실적 표현에 대한 이광문의 가치관은 어쩌면 우봉(牛峰) 이씨 집안의 전통적 성향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광문의 증조할아버지 이재(李縡)는 숙종에서 영조 연간에 대사헌, 이조참판,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이었고, 아버지 이채(李采)는 영조와 정조 연간에 호조참판, 한성좌우윤,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었다. 그 두 사람의 초상이 지금 전한다.
‘터럭 한 오라기가 달라도 남이다(一毫不似 便是他人)’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극사실적으로 그린 이 영정을 고(故) 오주석 선생은 인류 회화를 통틀어 최정상급 초상화라고 극찬을 했었다. 오주석 선생은 생전에, 이광문의 증조부 이재의 초상이 실상은 초상화에 그려진 이채의 10년 뒤 초상이라는 주장을 하며 그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 일이 있었다. 그 설명에 따르면 이 영정들의 사실성은 그림을 얼핏 보고는 절대 알 수 없는 실로 대단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런 영정들을 지니고 있던 집안의 이광문이라 그림의 사실성에 더욱 큰 비중을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형사(形似)를 중요시하는 이광문의 시각은 분명 김하종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광문은 김하종이 자신과 뜻이 같았다고 했지만, 김하종이 원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림을 의뢰받은 김하종으로서는 어쨌든 주문자의 취향을 반영하여 그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결과 때문인지 혹자는 김하종의 이 《해산도첩》그림들이 정선이나 김호도에 비하여 너무 경직되었다는 평을 내놓기도 한다. 그럼에도 《해산도첩》은 19세기 초 조선의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광문이 그 흔한 금강산 이름을 화첩에 쓰지 않고 굳이 ‘해산도’라는 이름을 붙인 데에는 유학자로서의 고집이 있었다. 그는 이어지는 <우제해산도첩>의 글에서 금강산(金剛山)이란 이름부터 시작하여 산 중의 경물에 불경에서 유래된 각종 이름이 붙여진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풍악산을 사람에 비교한다면 곧 우뚝하게 홀로 선 선비와 같은 것이다. 그의 기상과 절개는 보통 무리보다 뛰어나 다른 사람들이 물들이고 갈고 하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 봉우리의 이름과 못의 이름들은 불교의 옛 자취를 기록한 전(傳)에서 나와 이상하게 들리니, 모두가 허황되고 따를 것이 못된다. 그 실상을 기록할 만한 것이 없으니, 말하자면 애석한 마음이 드는구나.”
그래서인지 다른 기행문들과는 달리 금강산의 각개 경물들에 대한 소감을 따로 거론하지 않고 글을 마치면서 첩의 이름을 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금강산의 내외가 동해 사이에 끼어 있으므로 총칭하여 해산도(海山圖)라고 하였다.”
이 장안사 그림은 정선을 비롯한 그동안의 장안사를 그려왔던 모든 화가들의 시선과는 전혀 다르다. 통상 장안사 건너편 쪽의 시점에서 장안사를 둘러싸고 있는 토산과 암산의 대비를 강조해오던 것과는 달리 만폭동 상류 방향의 장안사 옆산 쪽에서 그 앞산과 봉우리들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다. 한정된 공간의 대상을 남종화를 그리듯 그렸으면서도, 과장하지 않고 가능한 보이는 대로 사실적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이전의 장안사 그림들보다 극적인 느낌은 덜 하다. 하지만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은 더 하다.
왼쪽 구석에 있는 백문방인(白文方印)은 ‘김하종인(金夏鍾印)’이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송희경,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김하종의 해산도첩(박은순, 한국미술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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