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서화(書畵)는 족자, 두루마리, 첩(帖), 병(屛) 등의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어왔다. 병(屛)은 후세에 와서 병풍(屛風)으로 불리면서 바람을 막는 용도가 더 강조되었지만, 원래는 중국 주나라의 천자가 높이 8척의 판에 자루가 없는 여러 개의 도끼를 그리거나 수놓아 뒷벽을 장식한 부의(斧扆)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의 왕 어좌 뒤에 배설되었던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처럼 장엄(莊嚴)장식용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병(屛)이 서화의 장황(粧潢) 형식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제작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아무래도 다른 형태보다는 제작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왕실에서 제례나 혼례 또는 제왕 교육용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왕실에서조차 병풍을 사치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제작 명분이 분명하지 않은 병풍의 제작은 그 자체가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부의(斧扆) : 제후를 대할 때 천자의 어좌(御座) 뒤에 세웠는데, 도끼는 위엄을 나타내고 자루가 그려져 있지 않음은 이를 쓰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
그런 병풍이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활발히 제작되었다. 그 계기는 영조(英祖) 대에 왕실의 오례(五禮)에 병풍을 사용하는 것을 명문화하면서 궁중의 행사를 기념하기 위한 계병(禊屛)과 행사의 장엄을 위한 장병(裝屛)의 제작이 정례화된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왕실의 병풍은 제용감(濟用監)과 도감(都監)에서 민간에 대여해주기도 하여 사가(私家)로도 확산되었다. 유교의 실천 지침인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조선화 하는 과정에서 원전에는 없는 병풍의 사용을 의례화함으로써, 민간의 사례(四禮)에서도 병풍의 사용이 필수화되었다. 더불어 신분 파괴로 양반 계층이 늘어나면서 이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다.
▶오례(五禮) : 국가에서 행하는 다섯 의례. 즉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사례(四禮) : 유교적 원리를 바탕으로 민간에서 행해지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4가지 의례. |
조선 중기까지 왕실에서 의례용이 아닌 병풍의 제작은 주로 왕과 왕세자를 위한 감계(鑑戒) 용도였다. 경계하는 거울로 삼는다는 뜻의 감계(鑑戒)용 그림으로는, 규범이 될 만한 중국 고대 제왕을 그린 제감도(帝鑑圖)나 중국의 저명한 효자 24명을 그린 이십사효도(二十四孝圖), 성학십도(聖學十圖), 고사도(故事圖) 등이 그려졌다. 또한 경계하는 글귀인 계언(戒言)을 적은 병풍도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감계용 병풍 제작은 1700년대로 넘어가면서 급격히 줄어들고 계병(稧屛)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계병(稧屛)은 왕실의 행사를 기념하여 제작하는 계화(稧畵)를 병풍 형태로 만든 것이다. 이전에는 주로 축(軸)이나 첩(帖)의 형태로 만들어져 계축 또는 계첩이라 불렸다.
그런데 궁중의 계화가 병풍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사대부의 계회도(契會圖) 전통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계회도는 관아의 동료들이나 문인들이 풍류를 즐기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계회를 그림으로 그려 보존하는 것으로, 기로회(耆老會)나 기영회(耆英會)와 같은 특별한 때를 기념하는 것도 포함된다.
▶기영회(耆英會) : 대신이나 공신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베푸는 연회. |
정약용(丁若鏞)은 계(禊)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리지어 모이면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니 모두 계(禊)라고 일컫는다. 동갑인 경우 갑계(甲禊), 같은 해 과거 합격하면 방계(榜禊), 같은 관청소속이면 요계(僚禊)라고 부르며, 홍문관에서는 계병(禊屏)을 만들고 승문원(承文院)에서는 계첩(禊帖)을 만든다. 이러한 풍습이 전해져 향촌에서 금전을 각출하는 것 역시 모두 계라고 이름 한다.】
계회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화려한 치장을 더해가던 중에 1600년대부터는 병풍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그 변화에 대하여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 ~ 1628)은 이런 글을 남겼다.
【무릇 동료가 된다는 것은 형제의 의(義)를 가진다는 것으로 옛사람들은 이를 중히 여겼다. 옛날에는 분축(分軸)이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 시축(詩軸)을 만드는 것과 같이 성명만을 써 넣었다. 중간에 마침내 장자(障子)가 되었지만 여전히 ‘계축(禊軸)’이라고 일컫는 것은 대개 여기에도 ‘앞 세대의 전통을 보존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까닭이다. 근래에 시를 쓴 비단이나 비단으로 만든 축으로 병풍을 만들고 채색한 산수를 그려 넣은 것은 너무 지나친 것으로 사헌부, 사간원에서 금지하기에 이르렀지만 막지 못하니 극심함에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 우애의 의의는 옛날에 비해서는 점점 못해졌다.】
▶분축(分軸) : 조선시대에 공신(功臣)들에게 비단 두루마리에 쓴 공신교서(功臣敎書)를 나누어 주는 것. ▶마침내 장자(障子)가 되었지만 : 첩으로 만들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임. |
사대부들의 계회도를 만드는 전통은 17세기에 들어서면서는 왕실의 행사에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즉 진연(進宴), 실록 집필, 어진 도사 및 모사, 책례(册禮), 신궁 조성 등 다양한 왕실 행사에 참여한 것을 기념하여 계회도를 제작하였다. 그러면서 그 형태를 병풍으로 제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대부들의 풍습이 궁중의 계화 제작에 영향을 미쳐, 점차 계병(稧屛)의 제작이 늘어나게 되었다. 영조 때만해도 첩과 병풍 사이에서 형식을 선택하는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정조 대에 이르면 모든 궁중 계화가 병풍으로 제작되기 시작한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자들이 아주 어린 나이일 때부터 그들을 올바르게 양육하기 위한 교육기관인 보양청(輔養廳)을 설치하고 스승을 임명하였다. 스승은 보양관(輔養官)으로 불렸다. 보양관이 정해지면 바로 원자와의 상견례(相見禮)를 실시하였는데, 상견례는 임금의 맏아들, 원자(元子)가 보양관과 처음 인사를 나누는 행사로, 보양청에서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의례였다.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은 정조의 첫 번째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가 1784년 1월, 두 명의 보양관과 처음으로 만나 인사하는 의식을 그린 궁중행사도이다. 이 행사가 치러진 곳은 창덕궁(昌德宮) 대은원(戴恩院)으로,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善政殿) 동남쪽 부속 건물이다.
그림의 방위는 일반적인 궁중행사도에서 위가 북쪽인 것과는 달리 위가 서쪽, 아래가 동쪽이다. 신하들이 빙 둘러 서있고, 십장생도로 추정되는 병풍이 둘러져 있다. 병풍은 총 8개가 만들어져, 1개는 보양청에 두고 7개는 이 행사에 참여한 신하들이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이 <왕세자 탄강 진하도>는 고종 11년인 1874년 2월 14일, 순종이 탄생한 것을 신하들이 축하하는 의례를 기념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 병풍 연구(김수진, 2017, 서울대학교대학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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