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3 - 십장생도(十長生圖)

從心所欲 2020. 12. 4. 16:32

십장생도(十長生圖)는 도교와 신선사상(神仙思想)을 배경으로 하여 불로장생(不老長生)에 대한 꿈과 희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길상(吉祥) 장식화(裝飾畵)이다.

십장생도(十長生圖)는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세화(歲畵)로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궁중의 장식화로 선호된 주제였다. 왕실의 무병장수(無病長壽)와 만수무강(萬壽無疆)을 기원하는 의미에서다. 아울러 십장생도는 임금이나 왕세자의 국혼(國婚), 대왕대비나 왕비의 회갑연(回甲宴)과 같은 궁중의 주요한 행사에도 장엄과 치장을 위해 사용되었다.

▶세화(歲畵) : 정초에 신년을 송축하기 위해 왕과 신하들이 서로 주고받던 그림

 

고려 말의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세화십장생(歲畵十長生)>이라는 시를 지으면서 그 서문에 세화십장생은 日雲水石松竹芝龜鶴鹿 이라고 했다. 즉 해, 구름, 물, 돌, 소나무, 대나무, 영지, 거북, 학, 사슴이다.

또한 조선 전기의 성현(成俔)도 1502년에 당시 임금인 연산군으로부터 세화를 하사받고 <수사세화십장생(受賜歲畵十長生)>이라는 시를 지었다.

 

“해와 달은 항상 임하여 비추고, 산과 내는 변하거나 움직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는 눈이 와도 끄떡없고, 거북이와 학은 백세를 누리네. 흰 사슴은 모습이 실로 깨끗하고, 붉은 영지는 잎사귀 또한 기이하네. 장생에 깊은 뜻 있으니, 신이 또 사사로이 은혜를 입었네.”

 

이색과 성현은 십장생으로 해, 달, 구름, 산, 물[川], 돌, 소나무, 대나무, 영지, 거북, 학, 사슴의 12개를 언급하였다. 여기에 천도(天桃) 또는 반도(蟠桃)라고 불리는 복숭아까지 합하여 13가지의 변하지 않는 유구한 사물들이 십장생도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도 장생물(長生物)을 조합하여 길상과 장수의 의미로 그려지는 전통이 있고, 장생물의 소재 각각이 지닌 상징성은 대체로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기에 우리나라의 십장생은 이러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에는 특별히 ‘십장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여러 장생물을 모아 십장생이라는 이름의 그림이 그려진 것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형식으로 볼 수 있다.

 

십장생도는 보통 화려한 청록산수화풍(靑綠山水畵風)으로 그려져 8폭이나 10폭의 병풍으로 제작되었다. 주로 왕실에서 제작되었는데, 왕과 왕비의 공간인 내전을 장식하기 위한 용도와 국혼이나 회갑연 같은 행사를 위한 용도로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십장생 병풍은 대체로 19세기 이후의 작품이고 시대가 오래된 것은 없다고 한다. 실제로 사용하다가 낡으면 새로 제작하여 계속 교체했기 때문에 조선 왕조 말기의 것만 전한다고 한다.

 

십장생도는 세속에서 꿈꾸는 장생불사의 장소이자 신선세계의 이상향을 그려낸 것이다. 이러한 장소의 연원을 『사기(史記)』의 「봉선서(封禪書)」에 나오는 ‘삼신산(三神山)’에서 찾기도 한다.

봉선(封禪)은 전설상의 고대 중국 제왕들이 치세의 성공을 천지(天地)에 보고하기 위해서, 태산(泰山)에서 행하던 제사를 가리킨다. 전설상의 순임금과 우임금이 태산에서 봉선을 마친 후에는 전국 동서남북을 차례로 순행(巡行)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진시황도 천하를 통일한 후 태산에서 봉선을 행한 뒤 순행을 시작하여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지역의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 때의 일을 사마천은 『사기史記』「봉선서(封禪書)」에 이렇게 기록했다.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연나라의 소왕(昭王) 시절부터 사람들을 바다로 내보내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를 찾도록 하였다.

 

이 삼신산(三神山)은 전설에 따르면 발해(渤海) 중에 있어 그 거리는 멀지 않으나, 신선들이 배가 도착하는 것을 걱정하여 바로 바람을 일으켜 배를 산에서부터 밀어낸다고 한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이곳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여러 선인들과 불로장생의 약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곳의 물체와 새, 짐승들은 모두 백색이며, 황금과 백은(白銀)으로 궁전이 지어졌다고 한다. 도달하기 전에 그곳을 바라다보면, 마치 한 자락의 백운과 같으며, 도달하기 직전에서 보면 삼신산은 도리어 바닷물 아래에 있는 듯하다. 그리고 막상 배를 대려고 하면 매번 바람이 밀어내어 결국은 도달할 수 없게 된다.

속세의 군주들은 그곳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해상에 도착하자 이 전설에 관해 말하는 방사(方士)들이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진시황은 친히 해상에 나갔다가 삼신산에 도착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부정이 타지 않은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목욕재계시키고 이들을 데리고 해상으로 들어가서 삼신산을 찾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들을 태운 배는 해상에서 모두 바람을 만나 도달할 수 없었지만 삼신산을 확실히 보았다고 말했다.】

 

진시황이 불로장생의 약을 얻으려고 사람들을 보낸 곳이 전설의 삼신산(三神山)이었다. 전하는 십장생도 중에 비교적 그 제작 시기가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자미상 십장생도(筆者未詳十長生圖)>에 이런 삼신산의 특징이 많이 보인다고 한다.

이 <필자미상 십장생도>는 원래 10첩의 병풍화였으나, 그 가운데 2첩은 유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필자미상 십장생도(筆者未詳十長生圖)>, 견본채색, 각 폭 133.3 x 51.8cm,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문화재단 박본수 선임연구원은 이 <필자미상 십장생도>를 두고 “출렁이는 물결의 표현이 강조되었고, 학의 종류가 백학으로만 이루어진 점, 백록의 존재 등 문헌의 기록과 같이 삼신산의 원형적인 모습을 그린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전하는 대부분의 십장생 병풍들에는 “화면의 좌반부를 크게 차지했던 수파묘(水波描)가 사라지거나 수면의 면적이 현저히 줄어든다.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 대신 계류와 내가 나타나는 것은 ‘해도(海島)’로 묘사되었던 삼신산의 개념이 점차 ‘심산유곡’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라고 여겨진다.”고 하였다.

 

초기에는 바다 한가운데의 섬인 삼신산을 모형으로 그려지던 십장생도가 후기로 가면서 일반적인 ‘심산유곡’의 형태로 변하면서 바다에 대한 묘사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아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십장생도병풍들에서 그러한 주장의 근거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십장생도병풍(十長生圖屛風)> 10폭 병풍, 19세기 ~ 20세기 초반, 비단에 채색, 병풍 209 x 385cm 화면 152.5 x 376.6cm, 국립고궁박물관]

 

[<십장생도병풍(十長生圖屛風)> 8폭 병풍, 19세기 ~ 20세기 초반, 비단에 채색, 병풍 185.7 x 339.2cm 화면 132.8 x 329.4cm, 국립고궁박물관]

 

궁중에서는 십장생도를 병풍뿐만 아니라 창호로도 만들어 사용하였다.

 

[<십장생도창호(十長生圖窓戶)>, 4짝 1조, 비단에 채색, 창호 151.8 x 230.5cm 화면 각 폭 118.0 x 58.0cm, 국립고궁박물관]

 

십장생 그림으로 불발기 창호를 만든 것이다. 벽장문이라는 설명이 있으나, 불발기 창호인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칸막이용도로 사용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이것 말고도 십장생도창호가 2조가 더 있어 전체 3조가 있는데, 각각 동(東), 서(西), 남(南)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그래서 원래는 북(北)까지 4조가 있었던 것인데 1조가 유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십장생 개념을 바탕으로 그림에 변화를 준 유물도 있다.

 

[<일월반도도병풍(日月蟠桃圖屛風)>, 19세기 ~ 20세기 초, 비단에 채색, 병풍: 332.8 x 273.8cm 그림: 317.5 x 257.2cm, 국립고궁박물관]

 

[<일월반도도병풍(日月蟠桃圖屛風)>, 19세기 ~ 20세기 초, 비단에 채색, 병풍: 329.4 x 263.8cm 그림: 317 x 259.4cm, 국립고궁박물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위로 해와 달이 떠오르고 바위 사이에서 자라난 복숭아나무에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모습을 단순화하여 그렸다. 그림의 복숭아는 서왕모(西王母)의 정원에서 자란다는 반도(蟠桃)를 상징하는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은, 1901년 선원전을 수리하고 칠조(七祖)의 영정을 모사하여 봉안한 과정을 기록한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摸寫都監儀軌)》에 4폭 해반도병(海蟠桃屛) 2좌를 제작한 내용과 이를 그린 화원 10명의 명단의 기록을 이 병풍들에 대한 기록으로 추정하고 있는 듯하다.

 

이상의 십장생도들은 사용된 재료나 그림의 수준으로 보아 궁중화원들이 왕실용으로 제작한 작품들로 보인다. 그러나 신분을 뛰어넘어 무병장수에 대한 소망은 한결 같은 것이라, 병풍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궁중의 화재(畵材)였던 십장생도가 민간에서도 병풍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사대부나 상류층에서는 묘사가 섬세하고 장식성이 뛰어난 궁중화풍의 십장생도를 제작하였겠지만, 서민층 또한 민간 화가들이 그린 소박한 화풍과 형태의 <십장생도>를 소장하게 되었다.

 

서민을 위한 민화풍 <십장생도>는 단일 화폭이나 2 ~ 3폭 규모로 조촐해졌고, 이에 따라 십장생의 소재도 축약하여 그려지고, 진채가 아닌 수묵담채화로도 그려졌다. 아울러 궁중 회화에서의 엄정함이 사라진 자유로운 표현이 등장하면서 민화 나름의 특색을 가지게 된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민속예술사전(국립민속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조선후기 병풍 연구(김수진, 2017, 서울대학교대학원), 사기 한글번역문(김영수), 무병장수의 염원을 담다 십장생도(박본수, 2014.5. 월간민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