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는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린 곽자의(郭子儀)라는 인물이 노년에 호화로운 저택에서 가족과 함께 연회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곽자의(郭子儀, 697 ~ 781)는 당나라의 무신으로써 당 현종(玄宗)부터 숙종(肅宗) 연간에 걸쳐 9년간 당나라를 뒤흔들었던 안록산의 난에서 장안과 낙양을 탈환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워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져 곽분양이라고도 불렸다. 숙종을 이은 대종(代宗) 때에는 반란군을 회유하여 진압하고 잃은 영토를 회복하였다. 대종을 이어 당나라의 9대 황제가 된 덕종(德宗) 때까지 당나라의 4왕을 섬기며 두 번 재상에 오르고 덕종으로부터는 ‘상보(尙父)’라는 존칭까지 듣는 신분이 되었다.
▶상보(尙父) :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여 받들어 모시거나 그런 높임을 받는 사람. |
곽자의는 그가 세운 공으로 인하여 평생 동안 칭송을 받으며 살았을 뿐 아니라, 85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며, 부인과의 사이에 여덟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을 두었는데, 아들과 손자뿐 아니라 사위들도 모두 출중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다. 특히 곽자의의 여섯째아들은 8대 황제인 대종(代宗)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그 사이에서 낳은 딸이 11대 황제인 헌종의 왕비가 되었다. 또한 손자들이 많아 그들이 함께 문안을 올리면 일일이 알아보지 못하고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는 고사가 있을 정도로 자손까지 번창하였다. 이런 곽자의의 삶을 가리켜 “권력이 천하를 흔들어도 조정에서 미워하는 자가 없었으며, 공(功)이 세상을 덮어도 황제가 의심하지 않았으며, 욕심을 다 이룰 정도로 사치하였어도 나쁘다 논하는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곽자의는 매우 아름다운 별장에서 다복과 사치를 누리며 편안하고 안락한 노후를 보냈다. 한마디로 부귀공명과 장수, 다자다손(多子多孫)까지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복을 누린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는 그런 곽자의의 노년 생일잔치 장면을 그려, 그가 누렸던 부귀와 장수, 다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하였던 그림이다. 조선의 곽분양행락도는 중국에서 기원한 곽분양에 대한 그림을 바탕으로, 화려한 진채(眞彩)의 궁중회화 양식으로 새롭게 구성되어 주로 병풍으로 제작되었다.
왕실의 기록으로는 17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숙종(肅宗)이 곽분양행락도에 대한 시문을 남긴 것이 있고, 1802년 순조(純祖)와 순원왕후(純元王后)의 혼례에도 실제 곽분양행락도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후로도 곽분양행락도는 왕실 혼례에 꾸준하게 병풍화로 제작되었다.
현재 전하는 곽분양행락도는 청록으로 그려진 산수와 세밀한 인물 묘사, 다채로운 색의 사용 등이 특징으로, 거의 대개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곽자의의 별장에서 벌어진 잔치를 중심으로 8폭에서 12폭까지의 병풍으로 꾸며졌다.
병풍 형식의 곽분양행락도는 화면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인 오른쪽은 당대에도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곽분양의 별장 안에 있는 여인들과 아이들이 주로 그려진다.
4폭의 앞쪽 건물 안에 있는 여인은 곽분양의 부인이다. <곽분양행락도>에서 부인은 통상 이렇게 따로 그려진다.
그림의 중심인 연회장면이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고 학이 노니는 정원의 차일 아래 곽분양이 앉아, 무희들의 춤과 기녀들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곽분양의 주위에는 아들과 사위, 신하들이 모여 있다. 대체로 오른쪽에는 여덟 아들이, 왼쪽으로는 일곱 사위가 모두 조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곽분양은 늘 그 앞에 재롱떠는 손자와 함께 그려져, 인생의 마지막 즐거움이라는 ‘손자와 노는 즐거움[농손락(弄孫樂)]’ 까지 더하여 못 누린 것이 없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왼쪽 부분은 연못과 정자가 있는 별장의 정원과 계속 찾아오는 축하객의 모습이 그려진다. 지금 전하는 병풍들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구성과 배치를 보여준다.
또한 <곽분양행락도>는 온갖 복록을 상징하는 요소들로 채워진다. 그림 전체는 상서로운 구름들로 덮여 있고 그 안에 장수를 기원하는 학, 사슴, 바위가 있으며 부귀와 평안을 상징하는 모란이 만발해 있다. 또한 연못에는 백년해로를 뜻하는 기러기와 원앙도 보인다. 별장의 담 너머로는 심산유곡을 연상시키는 풍경 속에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폭포가 보인다. 역시나 장수를 상징하는 것이다.
18세기 후반 유득공이 저술한 세시풍속지인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婚屛 百子圖 郭汾陽行樂圖 瑤池宴圖’라고 하여 왕실뿐 아니라 사가(私家)에서도 혼례에 곽분양행락도를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장수와 복록에 대한 소망으로 민간에서도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민화풍 곽분양행락도는 왕실에서 제작하던 광물성 안료 대신 저렴한 안료로 그려지고 장황도 조촐해진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한국민속예술사전(국립민속박물관), 조선후기 병풍 연구(김수진, 2017, 서울대학교대학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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