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성시도>에는 상업 활동을 포함한 다양한 생활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조선의 그림 역사에 이처럼 다양한 백성들의 삶을 그린 그림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라 한다. 그림의 분위기는 완전히 우리나라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국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많다.
이런 류의 그림은 중국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 근원을 두고 있다. <청명상하도>는 북송(北宋) 시대의 수도인 변경(汴京)과 그 일대를 그린 그림이다. 북송 말기인 1120년경, 장택단(張擇端)이 청명절(淸明節)에 흥청거리는 인파와 번화한 도성의 모습을 길이 5m가 넘는 화권형식(畵卷形式)으로 그렸다.
▶변경(汴京) : 지금의 허난성 개봉(開封). 북송(北宋:907~1127) 때의 수도였다. 변하(汴河) 옆에 자리해서 생긴 명칭이다. ▶청명절(淸明節) : 동지가 지난 후 104일이 되는 날로 24절기의 5번째이며, 음력으로 3월 경이고, 양력으로는 4월 5일 전후이다. 춘분이 지나 따뜻한 봄기운이 시작될 무렵이라, 중국에서는 온 가족이 나들이에 나서 조상의 무덤에 성묘하고 민속놀이가 행해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
이 그림은 당시는 물론 후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원(元)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명과 청나라에 걸쳐 수많은 모본(摹本)이 만들어지면서 중국의 풍속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림 속 풍경은 화가가 상상하는 불특정의 장소 속의 번화한 세속풍경에 더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태평성시도>는 그런 모사본들의 영향을 받은 그림으로 보고 있다. 공교하게 그린 솜씨와 사용된 재료를 고려하면 궁중에서 왕실을 위하여 여러 화가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업과 도시의 발전, 그리고 그를 통한 의식주 걱정이 없는 태평성대에 대한 희망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은 태평성대를 원하는 모든 왕의 염원이기도 했을 것이다.
<청명상하도>에 그려진 인물이 500여명이라고 하는데 <태평성시도>에 그려진 인원은 2,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속에는 풍속화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일상의 거의 모든 장면들이 망라되어있다. 곳곳에 패루(牌樓)가 세워진 도심의 1층과 2층에는 번화한 상점이 늘어서 있고, 결혼행렬부터 시작하여, 장원급제자, 귀부인, 관리, 사대부의 행렬과 낙타를 타고 가는 행렬까지 길은 혼잡하기 이를 데 없다. 여인네들의 살림하는 집안모습부터 갖가지 일상이 그려졌고 멀리에는 여인들이 투호도 하고 그네를 타는 모습, 선비들의 모임도 보인다. 성을 지키는 군인들도 보이고 무예 훈련 장면, 농사 장면, 공연 장면, 패루를 새로 건설하는 장면에 서커스 같은 재주를 공연하는 장면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는 그림이다.그 옛날에 이처럼 좋은 볼거리가 어디 있었을까 싶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세계미술용어사전(1999, 월간미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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