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11 - 한궁도(漢宮圖) 1

從心所欲 2020. 12. 12. 08:35

조선 후기의 학자였던 이이순(李頤淳)의 『후계집(後溪集)』 5권에 들어있는 <대조전수리시기사(大造殿修理時記事)>에는 1802년 당시의 창덕궁 대조전에 장식된 벽화와 편액, 병풍 등에 대하여 기술한 내용이 있다.

그 가운데 병풍에 대한 구절만 추려보면 이렇다.

 

“ 당(堂)의 북벽 한 가운데 금전병(金箋屛) 두 쪽을 두었는데 대갈못으로 고정시켰다. 그 앞에는 10첩의 요지연도 병풍을 쳤다......동쪽 벽에는 모란도 병풍을 세우고........정중간의 한 칸 방 서쪽 벽에는 매화도 병풍을 세우고, 북쪽 벽에는 죽엽도 병풍을 세우고.......병풍이 무릇 십 여 부가 있는데, 금병(金屛) 하나는 일곱 마리의 학을 그렸고, 그 나머지는 신선이나 비룡, 또는 진기한 금수나 특이한 화초를 그렸는데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이 글로 미루어보면 병풍을 앉는 자리 뒤편에 하나만 달랑 놓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또한 궁궐의 방 내부가 지금 우리가 보듯 그렇게 썰렁한 분위기가 아니라 방안이 온갖 그림과 병풍으로 장식되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조전 하나에 설치된 병풍만도 십여 점이 넘었으니 그 큰 궁궐에 얼마나 많은 병풍들이 필요했을까!

김수진의 박사학위 논문에 따르면 1880년에서 1881년 사이에 왕의 처소인 대전에 딸려 있던 병풍고(屛風庫)의 발기(發記)에는 총 86점의 병풍 목록이 나온다.

▶발기(發記) : 조선시대 물품명과 그 수량을 적은 궁중문서.

 

제작년도가 밝혀지지 않은 30점에다, 1877년에 새로 만든 병풍이 28점, 같은 해 신정왕후 팔순을 기념하여 만든 계병 6점이 있었고 1878년에 10점, 그리고 1879년에는 12점이 새로 만들어졌다. 그런가 하면 동궁의 병풍고 발기에도 26점의 병풍 목록이 나온다.

그 병풍들의 개별 목록을 보면 장생도, 행락도, 요지연도, 경직도, 백자동, (빈풍)칠월편 같은 이름 외에 문방사우, 서원아집도, 효자도, 백납병, 책거리, 영모도, 홍지와당, 해상군선도, 화조도, 백수백복(白壽百福), 백접도(百蝶圖) 등의 명칭들이 등장한다.

 

이들 병풍의 제작과정을 보면 병풍들이 개별적으로 제작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궁궐에 어떤 경사나 행사가 있을 때 일시에 제작되는 일이 더 많아 보인다. 예를 들어 순종의 천연두가 완치된 것을 축하하여 1879년에 제작된 ‘기묘계병’은 각각 규장각, 의약청, 세자시강원, 세자익위사, 승정원, 무위소(武衛所)에서 2조씩 만들어 총 12점을 제작하였다. 그 목록은 문방사우, 해상군선도, 장생도, 화조도, 경직도, 해학반도, 화기(畵器), 효자도, 서원아집, 왕회도 등이다.

크기도 대대병(大大屛)부터 시작하여, 대중병, 대병, 중병, 소병(小屛) 등으로 다양한데 지금 전하는 것들을 보면 높이는 150cm에서 330cm에 이르는 것도 있고 형식은 4곡, 6곡, 8곡, 10곡, 12곡 등으로 다양하다. 반면 머리맡이나 사랑방 같은 데의 치장으로 치는 넓은 두 폭으로 만든 병풍인 침병(枕屛)은 2곡으로 되어 있다. 침병은 가리개 또는 머릿병풍으로도 불린다.

 

위의 발기(發記) 목록에는 나오지 않는 명칭이지만 지금 전하는 것 중에는 ‘한궁도(漢宮圖)’라고 불리는 병풍이 꽤 있다. 제작 형태로 미루어 궁중에서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병풍들이다.

한궁도(漢宮圖)는 ‘한(漢)나라 궁궐 그림’이라는 의미이지만, 정작 실재하는 궁궐이 아닌 중국풍의 이국적이고 화려한 전각들을 계화(界畵)로 그린 일종의 상상화라고 한다.

 

계화(界畵)는 자[계척(界尺)]를 이용하여 궁궐, 누각, 가옥 등 건축물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그림이다. 전통적으로 동양회화의 한 분야였다. 4세기 때 동진(東晉)의 화가였던 고개지(顧愷之)가 이미 그의 글 「논화(論畵)」에서 “건물은 일정한 형태를 지녔기 때문에 그리기는 어려우나 좋아하기는 쉽다. 그러나 생각을 옮겨 재창조하는 예술적 과정은 필요없다.”라고 계화의 특징을 논하였을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

 

중국에서는 원나라 이후 문인화풍이 각광을 받게 되면서 정밀한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전문화가의 그림들이 평가절하 받게 되었지만, 명(明), 청(淸)대에도 궁궐이나 건축물 그림에 대한 수요가 궁정을 중심으로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에 그 전통은 유지되었다.

 

조선에서도 궁중화가들을 통하여 그 명맥이 유지되었겠지만, 이 계화가 크게 발전한 것은 조선 후기이다. 1783년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을 뽑는 녹취재(綠取才)의 8개 기본 화문(畵門)에 전통적 도화서 화원 선발시험에는 없던 ‘누각(樓閣)’을 포함시킨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조선 후기에 계화로 그려진 건물도가 수록된 각종 의궤(儀軌)의 간행이 활발해진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각종 궁중행사도에도 계화로 그려진 건축물의 비중이 증가하였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모를 그린 <동궐도(東闕圖)〉는 이렇게 정조대부터 시작된 계화 발전의 결과물이다.

 

한궁도(漢宮圖)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서 생겨난 화목(畵目)으로 짐작된다. 전하는 한궁도 병풍은 거의 모두 높이가 1m를 넘지 않고 그림도 80cm가 넘지 않는 낮은 높이의 병풍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 병풍, 19세기 ~ 20세기 초, 견본채색, 병풍: 97.7 x 412.6cm, 화면: 73.6 x 406.8cm, 국립고궁박물관(www.gogung.go.kr)]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병풍 中 1폭]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병풍 中 2폭]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병풍 中 3폭]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병풍 中 4폭]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병풍 中 5폭]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병풍 中 6폭]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병풍 中 7폭]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병풍 中 8폭]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 병풍, 19세기 ~ 20세기 초, 견본채색, 병풍: 98.1 x 408.8cm, 화면: 76.4 x 403cm, 국립고궁박물관(www.gogung.go.kr)]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병풍 中 1,2폭]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병풍 中 3,4폭]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병풍 中 5,6폭]

 

[<한궁도병풍(漢宮圖屛風)> 8폭병풍 中 7,8폭]

 

 

 

 

참고 및 인용 : 국립고궁박물관, 조선후기 병풍 연구(김수진, 2017, 서울대학교대학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