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묵란도 12폭 병풍>에 쓴 제발에는 병풍에 대한 당시의 풍습을 유추해볼 수 있는 내용이 들어있다.
【…… 병풍이라는 것은 대개 주련(珠聯) 두 쌍을 일러 병풍이라 하는데, 이것은 옛날에 일컫던 것이다. 근래에 와서 우리나라의 풍습이 어그러져 6첩을 소병(小屛)이라 하고 8첩을 대병(大屛)이라 하는데, 요사이 또 악습이 더욱 심해져 12첩을 병풍이라 하고 그것을 나
누어 6첩 2병(二屛)을 만들고는 스스로 ‘기이하고 환상적인 묘계가 나보다 나은 자 누구인가’라고 한다 하니 그렇게 말하는 자의 면목(面目)이 가증스럽다.
무릇 병풍이라고 하는 것은 산수, 영모, 절지로 그린 것은 많지만 혜란(蕙蘭)으로 병풍을 만든 것은 드물다. 지금 12첩을 무엇 때문에 적다고 하는가? 그림을 구하는 자의 욕심 때문이니 금강산 만이천봉도 오히려 그 마음을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총론 하건대, 병풍이란 것은 옛날에는 두 쌍을 벽에 걸어 진적 서화를 늘 눈앞에 두었지만, 요즘 풍속은 생애의 물건으로 삼으니 병 조리 하는 곳에 요긴한 것이요, 제사지내는 곳에 배설하기 위한 것이요, 서재 안의 주요 물품이요, 혼례할 때 둘도 없는 매개체이다. 처음에는 대대로 전하는 물건으로 삼지 않고 빌려 쓰고 세내어 쓰는 물건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 이것을 애통해하고 한스럽게 여긴 지 오래이다.……】
19세기가 되면서 민간에서의 병풍 사용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는데, 조선 후기 병풍을 연구한 김수진은 그의 논문에서 그 원인으로 두 가지를 주목했다.
첫 번째는 왕실 오례와 마찬가지로 민간 사례(四禮)가 병풍의 확산을 가져왔다는 것으로, 이는 양반 의식을 갖춘 양인 계층이 증가하면서 병풍을 활용한 의례가 증가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봤다. 두 번째로는 민간의 문화가 발달하면서 실내 장식과 놀음 무대에 병풍이 활용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증보사례편람』에는 여자가 시집을 갈 때에는 계례(筓禮)에 사용할 병풍 1점, 신부의 집 혼례상에 사용될 병풍 2점, 마당에서 사용할 병풍 1점을 준비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한 번의 혼례에 여러 병풍이 준비되었던 것은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혼례를 행함에 있어 득남을 기원하기 위한 백동자도 병풍과 보고 즐길 수 있는 화조도 병풍을 배설한다’는 기록도 있다.
▶『증보사례편람』 :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관리였던 이재(李縡)가 편술한 관혼상제의 사례(四禮)에 관한 종합적인 참고서인 『사례편람(四禮便覽)』을 증보한 예서(禮書)이다. 가례(家禮)를 중심으로 선유(先儒)들의 여러 설을 참작하고 수록하여 각 권마다 그 의절(儀節)에 따른 도식도 실어 이용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일반 가정에까지 많이 보급되어 관혼상제의 예절에 대한 지침이 되었다. ▶계례(筓禮) : 남자가 머리를 빗어 올려 상투를 틀고 관모를 쓰는 성인례(成人禮)를 관례(冠禮)라 하는데 대하여, 여자가 쪽을 지어올리고 비녀를 꽂는 성인례를 계례라 한다. 여자가 15세가 되면 치르는 의식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혼사가 결정되었을 때 혼례와 함께 치러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궁중에서 의식에 병풍을 사용하던 전례가 사족(士族)을 거쳐 서민층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양반 집안이라 해도 처음부터 비용이 많이 드는 병풍을 제작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유득공이 저술한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공적인 큰 잔치에는 제용감(濟用監)에서 모란을 그린 큰 병풍을 쓴다. 또 문벌이 높은 집안의 혼례 때에도 이 모란병풍을 빌려다 쓴다.”라고 하여 왕실에서 제작한 병풍이 민간에 유전된 내력을 짐작할 수가 있다. 또한 1893년에 쓰인 《광례람(廣禮覽)》에도 신부 측에서 준비할 ‘혼례제구목록’에 ‘모란병풍은 제용감에서 빌리라’는 대목이 있어, 왕실 병풍의 대여는 당시 일상화된 관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행이 민간에서의 병풍 사용이 확산되는데 크게 일조했을 것이지만 이런 혜택이 서민층에까지 돌아갔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제용감(濟用監) : 조선 시대에 각종 직물 따위를 진상하고 하사하는 일과 채색, 염색, 직조하는 일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 ▶《광례람(廣禮覽)》 : 조선 말기에 사례(四禮) 가운데 상례·제례·관례 등에 관하여 긴요한 내용만을 간추려 만든 책 |
우리나라 민간에서는 예로부터 나쁜 귀신을 쫓는 벽사(辟邪)를 위한 그림을 대문에 붙이던 풍습이 있었다. 거기에 시간이 가면서 경사스러운 일을 바라는 기복화에 대한 수요가 일어나고, 신앙과 관련된 그림, 집 안팎을 단장하기 위한 그림에다 병풍과 같은 일상생활과 직결된 그림에 대한 수요들이 서민층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도화서 화원이나 뛰어난 실력의 화가들이 그런 수요를 다 충족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서민층을 위한 그림은 이름 없는 화가나 그림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비전문적이고 숙련이 덜 된 화가들에 의하여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림들을 지금 민화라는 이름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민화가 단순히 비전문적인 화가나 일반인들의 치졸한 작품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민화에는 무엇보다 민중들의 생각과 욕구와 전통적으로 이어온 생활 습속이 반영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민화는 궁중화나 사대부들의 그림에 비하여 묘사의 세련됨이나 격조는 떨어지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분방하며 파격적이라는 특성도 갖고 있다.
아래의 모란도 민화 병풍에도 그런 특성이 나타나 있다.
멀리서 보면 모란꽃으로만 장식된 것 같은 이 병풍차는, 가까이 보면 각 폭마다 새들이 보인다. 모란도에다 화조영모도를 조합한 형태다. 각 폭마다 각기 다른 새들을 그려 넣은 것은 화조영모도 형식인데, 각기 다른 화초가 등장하는 화조영모도와는 달리 식물은 오직 모란꽃만 그려져 있다. 딱히 모란도라 부르기도, 화조영모도라 부르기도 애매한 형태다. 또한 병풍차가 따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모란꽃이 같은 도안의 반복이 아니라 각기 다르다는 점도 궁중의 장식 모란 병풍과는 차이가 있다.
한 병풍 안에 이렇게 여러 요소가 담기게 된 것은 서민층 수요자의 뜻이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병풍 하나에 원하는 이것저것을 모두 넣어 가성비를 높이고 싶은 욕심을 화가가 받아들여준 것이 아닐까 싶다.
아래 <고사도 8폭 병풍>에도 그런 특성이 드러난다.
소장품명은 고사도(故事圖)라고 되어있지만 전통적인 고사도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우선 1폭에는 생뚱맞게도 ‘축산(畜産)조합’이 들어가 있다. 이 병풍이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제작된 것이어서 이런 내용이 그려졌겠지만, 어쨌거나 병풍차의 조합이 뜬금없기는 하다.
이어서 연꽃 아래서 노는 오리를 그린 연압도(蓮鴨圖), 소설 구운몽(九雲夢)의 육관대사와 팔선녀, 모란도, 다시 또 구운몽의 난양공주, 봉황과 오동나무가 차례로 그려졌다.
7폭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孟浩然)이 일생 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고 녹문산에 은거하면서, 이른 봄이면 매화를 찾기 위해 나귀를 타고 당나라 수도인 장안의 파교(灞橋)를 건너 설산(雪山)으로 들어갔다는 고사[파교심매(灞橋尋梅) 또는 설중기려(雪中騎驢)]를 그렸다. 그리고 8폭은 송학도(松鶴圖)이다.
각양각색의 소재가 혼합된 이 병풍차들은 병풍 제작의뢰인의 주문에 의하여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아마도 축산조합과 관련된 어떤 인물이 의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다.
이처럼 민화 병풍에는 특정한 장르로 분류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소재들이 다양하게 동원되는 경우가 많다.
참고 및 인용 : 국립민속박물관, 조선후기 병풍 연구(김수진, 2017, 서울대학교대학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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