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안 짓고 시골살기

백로도 고단하다.

從心所欲 2021. 3. 13. 05:06

백로는 그 몸의 흰 빛과 고고해 보이는 자태로 인하여 우아하고 고상한 새로 인식되어 왔다. 물속에 발을 담그고 미동도 없이 서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세상의 모든 명리를 잊은 듯 너무도 초연해 보여 매일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던 지난 삶을 돌아보게도 만든다.

그런데 오래 지켜보니 백로의 삶 또한 우리 인간사와 하나도 다름이 없다. 그 고상하고도 초연해 보이는 모습이 사실은 먹이를 노리는 백로의 삶의 현장이었다.

 

 

물속에 일렬로 줄지어 선 이 모습이 신기해 보이지만 백로들은 흐르는 물의 길목에 각기 자리를 잡고 지켜 서서 물속의 고기를 노리고 있는 중이다. 고상해 보이는 이 백로들끼리는 영역 싸움도 한다. 먼저 자리를 잡았지만 먹이가 없어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새가 뒤늦게 오면 그 새가 멀리 도망갈 때까지 쫓아다니면서 괴롭힌다.

 

백로를 괴롭히는 또 다른 존재는 오리들이다. 이곳에서 부화하여 계속 텃새처럼 지내고 있는 오리들은 자신들보다 덩치가 큰 백로를 전혀 개의치 않는다. 뿐만 아니라 백로 주변을 돌며 계속 자맥질을 하여 정중동(靜中動)으로 물속의 고기를 노리고 있는 백로를 당황케 한다. 백로가 오리들을 피해 걸음을 옮기면 오리들도 같이 따라가며 연신 자맥질을 해댄다.

결국 견디다 못한 백로는 기껏 잡은 자리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날아갈 수밖에 없다.

 

한가롭고 여유 있어 보이는 백로의 삶도 이처럼 고단하다. 비오는 날 소나무 위에서 잔뜩 웅크린 채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는 백로를 보면 그나마 비를 피할 수 있는 거처라도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런 백로를 보면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해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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