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유숙 고사인물도 2

從心所欲 2021. 8. 5. 16:48

[유숙 「유숙필고사인물도(劉淑筆故事人物圖)」 中 <무후대불도(武后大佛圖)>, 지본담채, 114.5 x 47.3cm, 국립중앙박물관]

 

【唐武后欲造大佛 使天下僧尼 日出一錢 以助其功

당나라 측천무후가 대불(大佛)을 만들고자 천하의 중들로 하여금 매일 1전(錢)을 내어 그 공사를 돕도록 하였다.】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624 ~ 705)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이다.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황후로, 고종이 사망한 뒤 두 아들을 황제에 즉위시켰다가 모두 폐위시킨 뒤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는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로 바꾸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洛陽)로 옮겼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측천무후는 당나라가 대주(大周)의 황제였던 셈이다.

 

설화에 따르면 고종이 측천무후에게 보살의 아름다움을 지녔다며 칭찬을 했다. 그러자 측천무후는 기뻐하는 대신 얼굴에 슬픔에 가득해져서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백년이 지나면 썩어 한줌의 흙이 될 뿐”이라는 탄식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고종은 고민 끝에 세월이 지나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측천무후의 모습을 남기겠다고 약속하고 신하들에게 측천무후의 모습을 담은 불상 조성을 명령했다. 그래서 완성된 것이 바로 용문석굴(龍門石窟)의 봉선사동(奉先寺洞) 대불(大佛)이라는 것이다. 이 대불은 바위를 깎아 만든 마애석불로 높이가 17m에 이른다.

대불의 제작 배경에 대해서는 고종의 고사(故事) 외에 측천무후가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과 닮은 불상에 엎드려 경배하게 함으로써 황제로서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조성했다는 설도 있다.

 

유숙은 그림에 가능한 대불이 눈에 띄지 않도록 희미하게 그려넣고 앞쪽은 짙은 넝쿨로 가려놓았다. 

 

[유숙 「유숙필고사인물도(劉淑筆故事人物圖)」 中 <무후대불도(武后大佛圖)> 부분]

 

[유숙 「유숙필고사인물도(劉淑筆故事人物圖)」 中 <원장배석도(元章拜石圖)>, 지본담채, 114.5 x 47.3cm, 국립중앙박물관]

 

원장(元章)은 북송(北宋) 때의 서가이자 화가인 미불(米芾, 1051 ~ 1107)의 자(字)이다. 글씨에 있어서는 소동파, 황정견 등과 더불어 송4대가로 꼽히고, 그림에 있어서는 아들 미우인(米友仁)과 더불어 ‘미법산수(米法山水)’로 이름을 얻었다. 금석(金石)과 고기(古器)를 좋아하여 고동서화(古董書畫)의 수장가(收藏家)이기도 하였다.

 

미불은 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기행(奇行)이 심했다고 전한다. 북송대 명사들이 정원에 모여 한때를 즐기는 모습을 담은 고사인물화인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에 미불은 바위벽에 글씨를 쓰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모습은 ‘석벽제시(石壁題詩)“라는 화제로 따로 그려지기도 했다. 아울러 바위에 대고 절을 하는 모습을 그린 ‘원장배석(元章拜石)’과 그림과 글씨를 배에 싣고 유람하는 ‘미가서화선(米家書畵船)’도 미불을 소재로 하는 고사인물도들이다.

 

고동서화 수장가로서 남달리 그림과 글씨를 좋아했던 미불은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일대인 강회(江淮)에서 지방의 물자를 중앙으로 운송하는 조운을 책임지던 관리인 발운사(發運使)로 재직할 때, 자신이 타는 배에 서화를 모두 싣고 ‘미가서화선(米家書畵船)’이라는 깃발을 세우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미불은 괴석(怪石)을 유난히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불은 길을 가다가도 마음에 드는 돌을 보면 도포와 홀(笏)을 갖추고 정중하게 절을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그가 태수로 있을 때 어떤 곳에 괴석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명하여 자기 고을에 옮겨다 놓게 하고는, 그 괴석이 도착하자 “내가 돌 형님[석형(石兄)]을 보고 싶어 한 것이 이십년이 됐습니다[吾欲見石兄二十年矣].”한 뒤 자리를 깔고는 뜰아래에서 돌을 향해 절을 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이처럼 돌을 사랑한 미불의 일화를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이 ‘원장배석도(元章拜石圖)’이다.

 

[유숙 「유숙필고사인물도(劉淑筆故事人物圖)」 中 <화외소거도(花外小車圖)>, 지본담채, 114.5 x 47.3cm, 국립중앙박물관]

 

중국 송나라의 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소옹(邵雍, 1011 ~ 1077)에 관한 그림이다. 소옹은 나이 54세 때에 부친이 죽자 그동안 살던 곳에서 낙양의 천진교(天津橋)에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였다. 그 때에 사마광(司馬光, 1019 ~ 1086)을 비롯한 그의 벗들이 돈을 모아 그에게 집과 농토를 마련하여 주었다.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서로 꼽히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한 사마광(司馬光)은 북송(北宋)때의 왕안석(王安石) 등 신법당(新法黨)에 맞섰던 구법당(舊法黨)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런 사마광이 어느 날 소옹과 자신의 별서(別墅)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여 술상을 준비하고 기다리는데 소옹이 나타나질 않았다. 기다리다 끝내 소옹이 오지 않자 사마광은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시 한 수를 읊었다.

 

淡日濃雲合復開 옅은 해 짙은 구름에 가렸다 다시 열리고
碧嵩淸洛遠縈回 푸른 숭산 맑은 낙수 저 멀리 둘러있네.
林間高閣望已久 숲 속 높은 누각에서 바라본 지 오래건만
花外小車猶未來 꽃 밖에서 작은 수레는 아직도 오지 않네.

 

이 시 속의 ‘꽃 밖의 작은 수레’라는 화외소거(花外小車)는 이후 소옹을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이를 소재로 하는 화외소거도(花外小車圖)는 고사인물도(古事人物圖)의 주요 화목(畵目)이 되었다.

 

[유숙 「유숙필고사인물도(劉淑筆故事人物圖)」 中 <신선도(神仙圖)>, 지본담채, 114.5 x 47.3cm, 국립중앙박물관]

 

【終日長蔬曰 綠葵 紫蓼 春韮 秋菘

오래도록 먹을 수 있는 채소는 녹색 아욱, 자주색 여뀌, 봄 부추, 가을배추이다.】

 

주옹(周顒)은 남북조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남경(南京)의 북쪽에 있는 종산(鍾山)에 은거했던 인물이다. 그러다 임금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나아갔는데, 임금이 “산중에서는 무슨 맛난 것을 먹는가?” 하고 묻자, “첫봄의 부추와 늦가을 배추가 맛이 좋습니다.” 라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유숙이 쓴 화제가 꼭 주옹(周顒)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래서 그냥 <신선도(神仙圖)>로 불린다.

 

 

 

참고 및 인용 : 중국인물사전(한국인문고전연구소), 한시작가작품사전(2007, 국학자료원), 한시어사전(전관수, 2007, 국학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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