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관서십경도(關西十景圖) 1

從心所欲 2021. 8. 27. 19:01

[우리나라의 전통적 지역구분, 초등학교 사회교과서]

 

관서(關西)는 예전에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를 합친 평안도 일대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런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고려 때 관내도(關內道)라고 불리던 서울·경기 지방의 서쪽지방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고려시대에 설치된 철령관(鐵鈴關)의 서쪽지방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평안도가 서울·경기 지방의 서쪽이 아닌 북쪽에 있기 때문에 전자 보다는 후자의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철령관은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면과 지금의 강원도 고산군과 회양군 사이에 있는 해발 685m의 고개인 철령(鐵嶺)에 설치된 관으로, 예전 함경도로부터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조선시대에 평안도는 국경지역인 동시에 중국과 조선의 사신이 오가던 주요 교통로이기도 했다. 한성에서 개성을 거쳐 평양에 이른 뒤 이어 순안 - 숙천 - 안주 - 가산 - 정주 - 선천 - 용천 - 의주에 이르는 의주로라는 길이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는 경우, 조선에서는 정3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을 선위사(宣慰使) 또는 영위사(迎慰使), 영접사(迎接使)라는 이름으로 국경지역인 의주(義州)까지 보내어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한양까지 동행하는 예를 갖췄다. 도중 6곳에서는 그들에게 향연을 베풀어 접대하는 한편, 주변의 명승지나 유서 깊은 장소로 안내하기도 하였다. 중국 사신 중에는 멀리 금강산까지 유람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의주로 주변의 명승지를 방문했던 조선의 문사들이 글을 남기면서 관서팔경(關西八景)이니 십경(十景)이니 하는 말들이 생겨났고 또 이것이 그림으로도 그려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관서십경도(關西十景圖)」나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관서명승도첩(關西名勝圖帖)」들이 그런 유물들이다. 「관서십경도(關西十景圖)」의 소장품명에는 전(傳) 김홍도필(金弘道筆)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기는 하지만 필자미상이라는 꼬리표도 달고 있어 김홍도와의 관련성은 미지수다.

 

「관서십경도(關西十景圖)」의 1폭은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이다. 안주는 평양 북쪽 청천강(淸川江) 하류의 남쪽에 위치했던 고을이다. 평안도라는 지명이 평양과 안주의 머리글자를 따온 것일 만큼 과거에는 관서지방의 중요한 도읍이었다. 안주에는 고구려의 석성(石城)인 안주성이 있고, 이곳은 611년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또한 1627년의 정묘호란 때는 평안도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을 비롯하여 안주목사 김준(金浚) 등이 후금에 대항하여 격전을 벌이다 무기가 떨어져 성이 함락되자, 성에 불을 지르고 불 속에 뛰어들어 순직한 역사도 지니고 있다.

 

[평안남도 안주]

 

백상루(百祥樓)는 옛 안주성 서장대(西將臺) 터에 세워진 누각이다. 백상루(百祥樓)는 100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백상루가 언제 지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4세기 고려충숙왕이 쓴 시에 백상루에 대하여 읊은 구절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 때부터 있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천강 기슭에 높이 솟은 언덕 위에 자리 잡아 청천강의 자연경치와 잘 어우러져, 관서팔경(關西八景) 가운데서도 첫째로 꼽히며 ‘관서제일루(關西第一樓)’라는 칭송을 받았다.

 

[전김홍도필 관서십경도(傳金弘道筆關西十景圖) 중 <안주(安州) 백상루(百祥樓)>, 지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안주성에서의 백상루 위치, 중국학@센터 자료]

 

[「관서명승도첩(關西名勝圖帖)」 속의 백상루, 서울역사박물관]

 

선조 때의 문신이었던 허봉(許篈, 1551 ~ 1588)은 1574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로 가던 길에 백상루에 들려 이런 글을 남겼다.

 

백상루는 성(城)을 따라서 지었는데, 청천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강은 성 아래에 이르러 나누어져 3군데를 흐르고 있었다. 백상루가 자리한 곳은 사면이 넓게 트여서 여러 산이 띠처럼 둘러 있고, 넓은 들이 끊임없이 멀리 뻗었으니, 연기에 덮인 수목의 푸름과 물가의 굴곡(屈曲)이 한눈에 1000리나 보이는 듯하여 그 경치가 자못 웅장하고 수려하였으며, 이곳이 곧 수나라의 군사가 함목(陷沒)한 땅이다. 강가에 석불 7기가 있었는데, 세상에 전하는 말이 극히 괴이하고 황탄하여 믿을 만하지 못하였다. 누대에서는 묘향산을 바라볼 만하였는데, 산의 형체가 하늘의 끝에 은은하여서 구름 기운이 공중에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낭랑하게 주자의 “지초(芝草) 캐는 사람이 있어서, 서로 연우(烟雨) 밖에서 기약하였네”라는 시구를 읊으니 정신과 혼이 나는 듯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

 

백상루는 조선시대 여러 차례 보수를 거듭하다가 영조 25년인 1735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의 사진에 보이는 백상루는 건물 한쪽을 나무로 받쳐놓을 정도로 훼손된 모습이다. 주변 환경 또한 과거의 명성을 무색케 한다.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백상루, 한국학중앙연구원]

 

[일제강점기 때의 백상루, panzercho.egloos.com]

 

이마저도 6·25 때 소실되었다. 이후 북한에서는 원래의 위치에서 400m 떨어진 곳에 백상루를 다시 복원하고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로 지정하였다. 안주성 안에는 주위가 550m나 되는 인공 연못인 칠성지가 있었는데 북한은 이것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백상루와 칠성공원, 평화문제연구소]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신정일, 2012, 다음생각), 한국문화사 - 관리로서의 유람, 환유(宦遊)와 실경산수화.(박은순, 우리역사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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