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68 - 안식구의 행차는 검소해야 한다.

從心所欲 2021. 8. 23. 18:10

[이방운(李昉運) <빈풍칠월도첩(豳風七月圖帖)> 中 2면, 견본채색, 34.8 x 25.6cm), 국립중앙박물관 ㅣ <빈풍칠월도>는 『시경詩經』의 「빈풍칠월편」을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주(周)나라 농민들이 농사와 길쌈에 종사하는 생활을 읊은 일종의 월령가(月令歌)를 그린 것이다. 이 시가는 중국의 주공(周公)이 어린 조카 성왕을 위하여 백성들의 농사짓는 어려움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 율기(律己) 제3조 제가(齊家) 6
내행(內行)이 내려오는 날에는 행장을 아주 검소하게 해야 한다.
(內行下來之日 其治裝 宜十分儉約)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고, '가정을 바로 다스리는 것‘을 뜻하는 제가(齊家)는 그 가운데 3번째이다.
▶내행(內行) : 어머니나 아내 등 안식구의 부임지 행차

 

쌍마교(雙馬轎)는 좋은 제도가 아니다. - 태평차(太平車) 보다 못하다 - 그러나 여자가 태어나면 쌍교 탈 것을 축원하니 어머니를 모시는 자는 불가불 쌍교를 사용해야 하지만, 아내에 대해서는 꼭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무식한 부녀자들이 마음으로 원한다면 남의 쌍교를 빌되, 한 역참(驛站)만 가거나, - 남쪽길은 과천(果川)까지, 서쪽길은 고양(高陽)까지, 동쪽길은 평구(平丘)까지면 된다. - 아니면 하룻길을 가서 - 곧 2참(站) - 그만두는 것이 좋다. 독마교(獨馬轎) 청익장(靑翼帳)에 주렴을 드리우고 읍에 이르더라도 영화롭지 않겠는가. 하루만 타더라도 태어났을 때의 축원을 이룬 셈인데 꼭 10일을 타야만 마음이 쾌하단 말인가.

어머니가 타는 가마와 아내가 타는 가마 외에 일행의 인마(人馬)는 관노(官奴)나 관마(官馬)를 사용해서는 안 되고, 집의 하인이나 집의 말이나 혹 사람을 사거나 말을 세내서 사용하는 것이 예(禮)에 맞는 것이다.

▶쌍마교(雙馬轎) : 쌍가마(雙駕馬)로 말 두 필이 각각 앞뒤 채를 메고 가는 가마.
▶태평차(太平車) : 나귀나 말이 끄는 수레.
▶독마교(獨馬轎) : 말 한 필이 끄는 가마.

 

《야인우담(野人迂談)》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두황상(杜黃裳)이 상부(相府)에 있을 적에 부인(夫人)은 다만 죽두자(竹兜子)를 탔다고 했는데, 하필 쌍교로 행차를 해야만 예(禮)가 되겠는가. 우리나라는 중고(中古) 이전에는 비록 재상의 부인이라 하더라도 말을 타고 너울[羃羅]을 쓰고 다녔는데, 요즈음은 부화(浮華)한 풍속만 날로 더욱 심해져서 인마(人馬)의 징발에 한도가 없어졌다. 쌍교 하나가 가는데 좌우로 옹위하는 사람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고, 심하면 많은 인부를 징발하여 천릿길을 메고 가게 하는 자도 있다. 대개 쌍교는 군왕(君王)이 타는 것으로, 어깨에 메는 쌍교는 군왕도 타지 않는 것이니 그 참람함이 어떠하겠는가. 옛날에는 감사 부인도 독마교(獨馬轎)를 탔는데 요즈음은 시정의 천한 여자도 그 남편이 현의 수령이 되면 쌍교를 타니 그 참람함이 어떠하겠는가.”

▶두황상(杜黃裳) : 당(唐)나라 때 재상을 지낸 관리.
▶상부(相府) : 재상이 일을 보는 관부(官府).
▶죽두자(竹兜子) : 대로 만든 가마.

 

생각하건대, 수령으로 뜻이 있는 사람은 중국에서 배워다가 태평차(太平車) 한 대를 만들어서 그 어머니를 모시고 가면 영화롭기도 하려니와, 백성의 원망도 없게 될 것이다.

한억(韓億)이 하북전운사(河北轉運使)가 되었을 적에 어머니를 태평차에 앉히고 둘레를 갈대 자리로 드리웠으며, 헌숙공(獻肅公) - 그의 아버지이다. - 은 나귀를 타고 수레 뒤를 따랐으니, 검소함이 이와 같았다.

 

한억(韓億)과 이약곡(李若谷)은 아직 급제하지 못하였을 때는 모두 가난하였다. 함께 경사(京師)에 가서 시험을 치를 적에, 나아가 알현(謁見)할 적마다 서로 바꾸어서 하인 노릇을 하였다. 이약곡이 먼저 등과(登科)하여 장사현 주부(長社縣主簿)를 제수 받고 부임할 때, 손수 아내가 탄 나귀의 고삐를 끌었으며, 한억은 상자 하나를 지고 갔다. 현까지 30리 되는 지점에 이르자, 이약곡이 한억에게,

“현 사람들이 올까 두렵네.”

하면서, 상자 안에 돈이 겨우 6백전이 있었는데 그 절반을 한억에게 주고 서로 붙들고 크게 통곡한 후 떠났다. 그 뒤에 한억도 급제하여 다 같이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한억(韓億)과 이약곡(李若谷) : 송(宋)나라 때의 벼슬아치.

 

윤석보(尹碩輔) - 연산조(燕山朝) 사람. - 는 풍기 군수(豊基郡守)가 되어 부임할 때에 오직 사내종 하나와 계집종 하나를 데리고 갔고 - 처자는 데리고 가지 않았다. - 뒤에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어서는 그의 처 박씨가 임신한 지 8개월이 되었는데도 말을 타고 가도록 하고 가마는 쓰지 못하게 하였다. 박씨의 남동생 중간(仲幹)이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어서 찾아와 보니 관에서 공급하는 것이 매우 빈약하므로 소금 몇 말을 보내 주었더니 공은 즉시 돌려보내며, 마치 자신이 더러워지는 듯이 하였다.

 

살피건대, 국초(國初)에는 사족(士族)의 부녀는 너울을 쓰고 말을 탔던 것이 분명하다.

효헌공(孝憲公) 송흠(宋欽)이 수령으로 부임할 적마다 신영마(新迎馬) 3필뿐이었으니, 대개 공이 타는 말이 1필, 어머니와 처가 각 1필씩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삼마 태수(三馬太守)라 하였다.

 

자제들은 반드시 초교(草轎) - 지붕이 없는 가마이다. - 를 타는데, 관노(官奴)를 시켜 좌우에서 옹위하도록 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소년들은 안장 얹은 말을 타는 것을 배워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언치[屉鞍] - 방언으로 길마[吉鞍]라 한다. - 에 행구(行具) - 방언으로는 짐[負擔]이라 한다. - 를 싣고 타기도 하며 걷기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신영마(新迎馬) : 새로 부임하는 수령에게 고을 관아에서 제공하는 말.

 

내행(內行)이 떠나기 하루 전에는 데리고 갈 아전과 종들에게 술ㆍ떡ㆍ국 같은 음식을 먹여야 한다.

수령이 떠날 때에 이와 같이 먹이는 일이 없는 것은 수령은 엄해야 하고 또 공적인 행차여서 먹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행은 자선(慈善)을 주로하고, 또 사적인 행차이기 때문에 먹여야 하는 것이다.

내행이 고을에 도착한 지 3일 만에 또 먹여서 따라온 수고에 보답해야 한다.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