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79 - 조정 고관의 사사로운 부탁을 들어주지 말라.

從心所欲 2021. 10. 5. 06:02

[최우석(崔禹錫) <경직도(耕織圖)> 10폭 병풍 中 4폭, 견본담채, 병풍 각폭크기 131 x 38.5cm, 국립민속박물관]

 

● 율기(律己) 제4조 병객(屛客) 4
무릇 조정의 고관이 사서(私書)를 보내어 관절(關節)로 청탁하는 것은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
(凡朝貴私書。以關節相託者。不可聽施)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율기(律己)의 제4조인 ‘병객(屛客)’은 지방 관청에서 책객(册客), 겸인(傔人) 등 객인(客人)과 외부로부터의 청탁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관절(關節) : 권세 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청탁하는 일

 

질도(郅都)가 제남(濟南)의 수령이 되었는데 위인이 공평하고 청렴하여 사서(私書)를 떼어보지 않고 선물을 받지 않으며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이미 부모를 등지고 벼슬길에 나섰으니 본디 직분을 다하고 절조를 위해 죽어야 할 것이요, 끝내 처자들을 돌보지 않겠다.”

하였다.

▶질도(郅都) : 한(漢)나라 관리.

 

위(魏)나라 사마지(司馬芝)가 하남윤(河南尹)으로 있을 때에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북돋아서 사사로운 청탁[私請]이 감히 행해지지 않았다. 내관(內官)이 사마지에게 일을 청탁하고 싶어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사마지의 처백부(妻伯父)인 동소(董昭)에게 부탁하여 뜻을 통하려고 하였으나 동소도 사마지를 꺼려하여 통하지 못하였다.

▶사마지(司馬芝), 동소(董昭) : 모두 삼국(三國)시대 위(魏)나라 관리.

 

진태(陳泰)가 병주 태수(幷州太守)로 있을 때에 서울의 귀인들이 편지를 많이 보내왔으나, 그는 모조리 벽에 걸어 놓고 그 편지를 뜯어보지 않았다. 다시 부름을 받아 상서(尙書)가 되자 편지를 죄다 본인에게 돌려주었다.

▶진태(陳泰) : 삼국(三國)시대 위(魏)나라 관리.

 

조염(趙琰)이 청주 자사(靑州刺史)로 있을 때에 요직에 있는 귀인으로부터 온 청탁 서신을 모조리 물속에 던져버리고 그 이름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공익(孔翊)이 낙양령(洛陽令)으로 있을 때에 청탁 편지를 받으면 모조리 물속에다 던져버렸다.

▶공익(孔翊) : 진(晉)나라 관리.

 

포증(包拯) - 자는 희인(希仁) - 이 개봉 지부(開封知府)로 있었는데, 사람됨이 굳세고 엄하여 사정(私情)으로 청탁할 수가 없었다. 서울 사람들이,

“청탁이 통하지 않는 데는 염라대왕(閻羅大王) 포노인(包老人)이 있다.”

하였다.

왕한(王閑)이 기주(冀州)를 다스릴 때에 사서(私書)를 떼어보지 않고 호족(豪族)들을 용서하지 않으니 왕독좌(王獨坐)라 불렀다.

마준(馬遵) 개봉윤(開封尹)으로 있을 때 항상 권세가와 호족들의 청탁 때문에 다스릴 수가 없었다. 손이 와서 청탁을 하면 매양 잘 대우하여 거절하지는 않고 손이 물러간 뒤 그 일을 처리할 때는 일체 법대로만 하였다. 오랫동안을 그렇게 하니 사람들이 그에게는 사사로운 청탁을 해서는 안 됨을 알게 되어 고을에는 드디어 아무 일이 없게 되었다.

질도(郅都)나 진태(陳泰)에게는 오히려 원한이 있을 것이니 마준(馬遵)을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마준(馬遵) : 송(宋)나라 관리.

 

진양(陳襄)이 포성현 주부(蒲城縣主簿)가 되었을 때 읍에는 세족(世族)들이 많아서 전후의 수령들이 제어할 수가 없고 청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상례(常例)로 생각하였다. 공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폐단을 없애기에 힘썼다.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사류(士類)임을 아껴서 갑자기 법으로 다스리지 않으려 하여 매양 송사를 들을 때에는 반드시 몇 사람을 자기 앞에 둘러앉게 하니, 사사로이 청탁하는 사람이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을 사람들이 청탁할 수 없음을 알고 노숙한 간인(奸人)과 노련한 장리(贓吏)들이 손을 거두고 기가 죽었다.

▶진양(陳襄) : 송(宋)나라 때의 문신이자 학자.
▶장리(贓吏) : 장물죄(贓物罪)를 범(犯)한 관리(官吏)

 

참판(參判) 유의(柳誼)가 홍주 목사로 있을 때 내가 금정역(金井驛)에 있으면서 편지를 띄워 공사(公事)를 의논하였으나 답이 없었다. 그 뒤에 홍주에 가서 만나 보고서,

“왜 답서를 하지 않았소?”

하니, 유공은,

“내가 벼슬살 때는 본래 편지를 뜯어보지 않소.”

하고, 시동(侍童)에게 명령하여 서롱(書籠)을 쏟으니 한 상자의 편지가 모두 뜯기지 않았는데 이는 모두 조정의 귀인들이 보낸 편지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본래 그런 것이지만, 내가 말한 것은 공사(公事)였는데 어찌 뜯어보지 않았소?”

하니, 유공이,

“만일 공사였다면 왜 공이(公移)로 보내지 않았소?”

하였다. 내가,

“마침 비밀에 속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소.”

하니, 유공은,

“만일 비밀에 속한 일이라면 왜 비이(秘移)하지 않았소?”

하기에, 나는 거기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가 사사 청탁을 끊어 버림이 이와 같았다.

▶유의(柳誼) : 조선 후기 문신(1734 ~ 미상). 본관은 전주(全州).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냈다.
▶금정역(金井驛)에 있으면서 : 정약용은 33세 되던 정조 19년(1795) 7월에 천주교의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사건에 연루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내다가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어 나갔었다.
▶공이(公移) : 관청 사이에 왕래하는 공문의 총칭
▶비이(秘移) : 편지 겉봉에 ‘기밀을 요하는 서신’이라는 의미의 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