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84 - 의복과 음식은 검소해야 한다.

從心所欲 2021. 10. 29. 06:07

[최우석(崔禹錫) <경직도(耕織圖)> 10폭 병풍 中 9폭, 견본담채, 병풍크기 131 x 38.5cm, 국립민속박물관]

 

● 율기(律己) 제5조 절용(節用) 3
의복과 음식은 검소함을 법식으로 삼아야 하니 조금이라도 법식을 넘어서면 지출에 절제가 없게 되는 것이다. (衣服飮食 以儉爲式 輕踰其式 斯用無節矣)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율기(律己)의 제5조인 ‘절용(節用)’은 씀씀이를 아끼는 일이다.

 

의복은 수수하고 검소하게 입도록 힘써야 한다.

아침저녁의 밥상은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김치[虀] 한 접시, 장 한 접시 - 제(虀)란 침채(沈菜)요, 장(醬)이란 시청(豉淸)이다. - 이 네 접시로 한해야 한다. 네 접시란 옛날의 이른바 이두(二豆) 이변(二籩)이다. 곧 구운 고기 한 접시, 어포(魚脯) 고기 한 접시, 절인 나물 한 접시, 육장(肉醬) 한 접시이니 여기에서 더해서는 안 된다.

▶시청(豉淸) : 한자로는 맑은 메주라는 뜻으로, 간장으로 해석됨.
▶이두(二豆) 이변(二籩) : 두(豆)와 변(籩)은 제기(祭器)를 가리킨다. 두(豆)는 젖은 음식을 담는 나무그릇, 변(籩)은 마른 음식을 담는 대나무그릇.

 

요즈음 관장(官長)들은 모든 일에는 체면을 세우지 못하면서 오직 음식에 있어서만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尊大)하여 옛 법을 따른다고 일컬으며 크고 작은 두 개의 반상에 홍반(紅飯) - 적두(赤豆)로 물들인 것이 홍반(紅飯)이 된다. - 과 백반(白飯)을 함께 차려 놓고, 내외의 두 군데 반찬은 수륙(水陸)의 진미(珍味)를 갖추어 차려놓고서 - 내사(內舍)나 외주(外廚)에 각각 성찬(盛饌)을 내놓는다. - 관장의 체면은 본디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먹고 남은 것은 노복과 기녀들에게 돌아간다.

▶적두(赤豆) : 붉은 팥

 

내 직분을 다하지 못하면 변변찮은 음식일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벼슬자리만 차지하고 녹만 받아먹는 것임을 모르고, 제 직책은 힘쓰지 않고 먹을 것만 찾으니 어찌 우습지 않은가.

경비를 남용하면 재정이 딸리게 되고 재정이 딸리면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게 된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노복과 기녀뿐이라 소만 보고 양은 잊어버린 셈이다. 백성에게서 약탈 해다가 기생들을 살찌게 하니 장차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소만 보고 양은 잊어버린 셈이다 : 見牛而忘羊.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에 “소는 보고 양은 보지 못하였다[見牛而未見羊].”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으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불쌍하게 여기고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

 

그러나 처음 도임했을 때는 어리석은 기개를 마음껏 부리다가 몇 달이 못 가서 처음처럼 계속하지 못하고 점차 박하게 줄이는 자가 많다. 그렇게 되면 아전과 백성들이 그 일정하지 못함을 서로 비웃을 것이니 수령 역시 부끄러운 빛이 없을 수 있겠는가.

진서산(眞西山)이 채(菜)를 논하기를,

“백성은 하루라도 채색(菜色)을 띠어서는 안 되고 사대부(士大夫)는 하루라도 채미(菜味)를 몰라서는 안 된다.”

하였다.

▶진서산(眞西山) : 송(宋)나라 때의 학자이자 관리.
▶백성은 ... 안 된다 : 백성은 하루라도 채색(菜色) 즉, 굶주린 기색이 있어서는 안 되고 사대부는 채미(菜味) 즉, 나물 맛을 몰라서는 안 된다는 말.

 

정선(鄭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백성이 채색(菜色)을 띠게 됨은 바로 사대부가 채미(菜味)를 모르는 데서 연유한다. 만약 말직(末職)에서부터 공경(公卿)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물 뿌리를 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제 직분의 소재를 알 것이니 백성들이 어찌 채색을 걱정하랴.”

후한(後漢)의 유우(劉虞)가 유주 자사(幽州刺史)로 있을 적에 해진 옷에 미투리를 신고 식사에는 두 가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

후한의 범단(范丹)은 자가 사운(史雲)이었는데, 내무(萊蕪)의 수령으로 있었다. 백성들이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

 

甑中生塵范史雲 시루에서 먼지 나는 범사운이요,

釜中生魚范萊蕪 가마 속에서 사는 물고기는 범내무로다.

▶범단(范丹) : 범염(范冉, 112 ~ 185)으로도 불린다. 벼슬을 피하여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도 여유롭고 의연했던 인물로, 다른 기록에 의하면 후한 환제(桓帝) 때 내무장(萊蕪長)에 임명되었지만 어머니 상을 당해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중앙의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시호는 정절선생(貞節先生).

 

송(宋)나라 하수(何須)가 안한령(安漢令)으로 있다가 거관(去官)하게 되었다. 그때 파(巴) 지방에 기근(饑饉)이 들었다. 아전을 보내어 백성들의 토란을 가져다가 자급(自給)하고는 실[線]로 돈을 매달아 그 값을 보상하였다.

▶거관(去官) : 전직을 그만두고 다른 관직에 임용되는 것.
▶파(巴) 지방 : 지금의 중국 사천성 지역.

 

제(齊)나라 유회위(劉懷慰)가 제군 태수(齊郡太守)로 있었는데 햅쌀 한 곡(斛)을 보내온 사람이 있었다. 유회위는 보리밥을 그 사람에게 보이면서,

“식생활이 넉넉하니 이런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된다.”

하였다.

▶곡(斛) : 옛날에 곡식을 계량하던 10말들이 그릇 또는 용량단위.

 

후주(後周) 배협(裵俠)이 하북 군수(河北郡守)로 있을 적에 몸소 검소하게 처신하고 먹는 것이라고는 오직 콩ㆍ보리ㆍ소금ㆍ나물뿐이었다. 배협이 한번은 여러 수령들과 주 문제(周文帝)를 알현하였는데, 문제는 배협을 따로 세워놓고 여러 수령들에게,

“배협은 청렴하고 곧기가 천하에 제일이다. 여러 사람 중에 배협과 같은 자가 있으면 그와 함께 나란히 서라.”

하니, 여러 사람은 모두 아무 말 못 하였고, 배협을 가리켜 독립사군(獨立使君)이라 불렀다.

 

당나라 풍원숙(馮元淑)은 시평현(始平縣)의 수령을 지냈는데 그가 타는 말에는 꼴과 콩을 주지 않고, 재마(齋馬)처럼 하도록 하였다.

▶재마(齋馬) : 재계(齋戒)하는 말, 즉 의식 따위를 치르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하는 말처럼 다루었다는 의미.

 

동사의(董士毅)는 촉주 태수(蜀州太守)로 있은 지 십 수 년 동안 겨우 베 도포 한 벌에 가죽신 한 켤레로 지냈다.

서창령(瑞昌令) 유공인(劉公仁)이 고안령(高安令) 엄모(嚴某)와 함께 대궐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謁見)하였다. 그때에 양부(楊溥)가 국정(國政)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을 시켜 몰래 그들의 행적을 엿보아오게 하였더니 돌아와서 복명하기를,

“엄(嚴)은 부귀를 누리는 것이 그 관직에 알맞고, 유(劉)는 짚자리, 무명이불, 옹기그릇에 매연(煤煙) 낀 부엌 등이 그대로 가난뱅이였습니다.”

하였다. 양부는 마음속에 기억해 두었다. 엄이 먼저 와서 보는데 금과 비단을 예물로 바쳤으나 양부는 이를 물리쳤으며, 뒤이어 유공인이 들어와 보는데, 차 한 포대와 꿀 한 단지의 예물이었지만 양부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얼마 뒤에 그를 발탁하여 어사(御史)로 삼았다.

▶서창령(瑞昌令) : 서창은 현(縣) 이름이다. 중국에서 영(令)은 현의 장관으로 1만 호 이상은 영(令), 1만 호 이하는 장(長)이라 하였다.

 

헌예(軒輗)는 절강안찰사(浙江按察使)로 있을 적에 봉급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취하지 않았다. 사철을 단벌의 푸른 베 도포로 지내면서 찢어지면 기워 입었고 나물밥도 배불리 먹지 못하였다. 동료들과 사흘 만에 쌀로 고기 한 근을 바꾸어먹기로 약속하였는데, 요속(僚屬)들도 견디지 못하는 자가 많았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그 이튿날 떠났는데 소속 하관(下官)들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어염운사(魚鹽運使)가 되었는데 청렴하다는 명성이 크게 떨쳤다. 일찍이 강가에 앉아 있었더니 한 동자(童子)가,

“물의 맑음이 사군(使君)의 맑음만 못하다.”

하였다.

 

첨사(僉事) 왕기(王奇)는 벼슬에 있을 때 청백해서 옷이 해어지면 종이로 그것을 기웠다.

왕서(王恕)가 운남(雲南)을 순무(巡撫)할 때 동복(童僕)을 데리고 가지 않았으며 행조(行竈) 하나, 죽식라(竹食籮) 하나, 하루에 유두(乳豆) - 유두란 두부(豆腐)이다. - 한 모, 채소와 장ㆍ초만 가지고 갈 뿐이고 물은 주인집에서 얻어 썼다.

▶행조(行竈) : 휴대용 취사도구
▶죽식라(竹食籮) : 대나무로 만든 도시락.

 

방극근(方克勤)은 순리(循吏)였다. 생활이 간소하여 베 도포 하나로 10년을 지내면서도 바꾸지 않았고, 하루에 고기를 두 번 먹지 않았다.

 

요희득(姚希得)이 정강(靜江)을 맡아 다스렸는데 전에는 관청의 장막을 비단으로 만들었다. 요희득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나는 서생(書生)의 집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이런 비단을 쓰겠는가.”

하고 포목으로 바꾸게 하였으며, 날마다 채소만 먹었다.

고려 기건(奇虔)이 제주안무사(濟州按撫使)가 되었는데 성격이 고집이 있고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제주에서는 전복이 생산되었는데, 백성들은 전복을 채취하는 것을 매우 괴로워하였다. 기건은,

“백성들이 이처럼 괴로워하는데 내가 차마 먹겠는가.”

하고 드디어 먹지 않으니, 사람마다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기건(奇虔) :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한 조선 전기의 관리(? ~ 1460). 고려라 한 것은 정약용의 착오로 보인다. 본관은 행주(幸州).

 

정 충정공(丁忠靖公) - 이름은 응두(應斗) - 이 7도(道)의 감사(監司)를 지내고 평안감사에 재임(再任)되었는데, 관내를 순시할 적에 화문석(花紋席)에 앉는 일이 없었으니, 복(福)을 아끼고 검소를 좋아함이 이와 같았다.

▶정 충정공(丁忠靖公)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응두(1508 ~ 1572). 충정(忠靖)은 시호이고 본관은 나주(羅州).

 

감사 정옥(鄭玉)은 약포 상공(藥圃相公)의 후손이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몸가짐이 청고(淸苦)하였다. 여러 읍을 순행할 때에 반찬은 두 접시만을 차리게 하였고, 이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죄를 주었다.

▶약포 상공(藥圃相公) : 조선 중기 좌의정을 지낸 정탁(鄭琢, 1526 ~ 1605). 호는 약포(藥圃) 본관은 청주(淸州).

 

내가 서읍(西邑)에 있을 때 보니 한 고을의 수령이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내외(內外)의 두 상을 차리게 하였는데, 그가 떠나게 되어서는 가하전(加下錢)이 40만 전이나 되어 수리(首吏)가 파산하게 되었다.

▶서읍(西邑) : 정약용(丁若鏞)이 정조 21년(1797) 윤 6월부터 정조 23년(1799) 4월까지 부사(府使)를 지냈던 황해도 곡산(谷山).
▶가하전(加下錢) : 지정된 액수보다 초과 지출한 돈.
▶내외(內外) : 여기서는 안채인 내사(內舍)와 관아가 있는 외아(外衙)의 주방.

 

유정원(柳正源)이 여러 번 군현의 수령을 지냈는데 매양 그만두고 돌아올 때는 채찍 하나로 길을 나섰고 의복과 기용(器用)도 늘지 않았다. 자인(慈仁)에서 휴가로 돌아와 집에 있는데, 현아(縣衙)에 있던 자제들이 쓰던 헌 농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되 속이 비면 쉽게 찌그러질까 염려하여 그 안을 짚으로 채웠다. 동네 부녀자들은 그것이 관(官)에서 온 것이라 하여 다투어 모여서 보았는데, 농짝 속에 든 것이 짚단임을 알고는 모두 한바탕 웃고 갔다. - 《대산집(大山集)》에 보인다. -

▶유정원(柳正源) : 조선 문신(1703 ~ 1761). 호는 삼산(三山), 본관은 전주(全州).
▶자인(慈仁)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속한 고을.
▶《대산집(大山集)》 : 조선 영조(英祖) 때의 문신 이상정(李象靖)의 문집. 이상정의 호는 대산(大山), 본관은 한산(韓山).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