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88 - 장부에 기록되지 않는 물건은 더욱 아껴 써야 한다.

從心所欲 2021. 11. 16. 10:27

[경직도 12폭 병풍(耕織圖 十二幅屛風) 中 3폭, 면본채색, 병풍전체크기 137.2 x 406.8cm, 국립민속박물관]

 

● 율기(律己) 제5조 절용(節用) 7
무릇 아전과 노복들이 바치는 물건으로서 회계가 없는 것은 더욱 절약해야 한다.
(凡吏奴所供 其無會計者 尤宜節用)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율기(律己)의 제5조인 ‘절용(節用)’은 씀씀이를 아끼는 일이다.

 

관부(官府)에서 쓰는 모든 물건은 다 백성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니 회계하지 않는 것은 - 속칭 무하기(無下記)라 한다. - 백성에게 매우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고 땅에서 물처럼 솟는 것이 아니니 씀씀이를 절약하면서 그 폐해를 살펴 백성들의 힘이 다소나마 펴이게 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채소ㆍ오이ㆍ박 등속은 원노(園奴) - 속칭 원두한(園頭漢)이라 한다. - 가 바친다. 이런 공로 때문에 으레 창노(倉奴) - 창고지기[倉庫直]이다. - 가 되어서 좁쌀이나 쌀을 함부로 거두어다가 - 색락미(色落米)라고 한다. - 그 바치는 것을 벌충한다. 함부로 거두는 것을 금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그 해를 입고 갑자기 그런 짓을 엄금하면 창노(倉奴)들은 파산하게 되니, 어찌 그 근원을 맑게 해서 말단의 폐단을 막아버리는 것만 하겠는가.

무릇 채소는 그 일정한 법식을 엄하게 정해서 날마다 몇 근씩 바치게 하되 그 수량을 넘어서는 안 된다. 한 줌[악(握)] 두 줌, 한 묶음[속(束)] 두 묶음이란 본래 우리나라의 엉성한 법이다. 줌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묶음에는 가볍고 무거움이 있어서 대중할 수가 없다. 저울을 쓰되 날마다 무슨 채소 1근, 무슨 나물 1근이라고 해서 일정한 법식으로 삼아야 한다. 일정한 법식 외에 혹 더 쓰는 경우에는 모두 본전을 주되, 무슨 채소 1근의 본전은 1문(文)이요, 무슨 나물 몇 근의 본전은 2문이라고 하여 또한 각각 법식이 있는 것이 좋다.

 

매양 보면 집안 법도가 엄하지 않은 수령일 경우에는 원노(園奴)가 채소를 중문(中門)에 바치면 내아(內衙)의 노비가 그것이 쓰다느니 나쁘다느니 소리 지르고, 박하다느니 작다느니 하며 성을 내어 광주리를 뒤엎고 함지박을 뒤집으며 소리소리 지르는데도 수령은 귀머거리처럼 듣지 못한 척하니 또한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심한 경우에는 내아의 종이 많이 거두어들여 그 남은 것으로 사사로이 관비(官婢)에게 주어 간음(姦淫)을 하려 하니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어석법(棜石法)을 엄하게 하면 이 폐단은 저절로 없어진다. 제가조(齊家條)에 보인다. -

양(梁)나라 채준(蔡撙)이 오흥 태수(吳興太守)가 되었는데, 벼슬살면서 오직 고을의 우물물만 먹었고, 거소(居所) 앞에는 흰 비름과 자색 가지를 심어서 평소의 음식으로 삼으니 임금이 조서(詔書)를 내려 그의 청백함을 표창하였다.

▶채준(蔡撙) : 중국 남조(南朝) 때의 관리.

 

최윤덕(崔潤德)이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있을 때 공무의 틈을 타서 청사 뒤 빈터에 손수 오이를 심고 호미질을 하였다. 소송하려고 온 사람이 공(公)인 줄을 모르고,

“상공(相公)은 지금 어디 계신가요?”

하고 물으니 공은 거짓으로 말하기를,

“아무 곳에 계시오.”

하고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소송을 처리하였다.

▶최윤덕(崔潤德) : 조선의 무신(武臣). 1376 ~ 1445. 본관은 통천(通川). 도통사(都統使), 절제사(節制使) 등의 직을 맡아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고 국경 북쪽의 야인(野人)들을 진압하는 등의 무공을 세웠으며 좌의정에 이르렀다.

 

절도사(節度使) 이득준(李得駿)이 강진 현감(康津縣監)으로 있을 때에 내사(內舍)의 앞뒤에 채전을 크게 마련해 놓고 내아의 노비들에게 거름도 주고 김도 매게 하였다. 그 채소가 무성하여 사철 끊어지지 않으니 원노(園奴)들이 바치는 것을 모조리 그만두게 하였고, 먹고 남는 것은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은덕을 칭송하며 미담(美談)으로 전해 오고 있다.

▶절도사(節度使) : 종2품의 무관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또는 정3품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가리킨다.

 

날마다 쥐참외[王瓜]는 10개, 참외[甘瓜]는 2개, 수박[西瓜]은 1개씩 수령에게 바치는 것을 일정한 법식으로 삼게 하고, 이보다 초과할 때는 모두 본전을 주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자손들을 많이 거느린 경우에는 철없는 어린아이가 한없이 외와 수박을 달라고 할 것이니 원노의 원망이 그칠 새가 있겠는가. 비록 1개라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박[瓠瓜]이나 호박[南瓜]도 또한 날마다 바치는 수량을 정해 놓고 그 수량을 벗어나면 모두 본전을 주어야 한다.

외와 박 등을 징수하는 법은 징수는 되도록 늦게 하는 것이 좋고 - 푹 익기를 기다린다. - 빨리 끝낼수록 좋으니 - 덩굴을 걷기 전에 한다. - 이도 또한 은혜로운 정치의 하나이다. 매양 보면 수령의 자제가 외ㆍ박 등을 징수하는 것이 너무 일러서 원노들이 사방으로 분주히 다니면서 구하지만, 혹 늦어지면 말하기를,

“이 지방 인심은 고약하다.”

하니, 이는 모두 수치스러운 일이다.

 

방촉(肪燭) - 속명은 육촉(肉燭)이다. - 은 포노(庖奴) - 육직(肉直) - 가 올리는데 으레 회계가 없으니 계속 댈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정당(政堂)에는 날마다 2자루씩 - 밤이 길면 3자루 - 바치고 내사(內舍) 책방에서는 향유(香油)로 점등하는 것이 좋다.

매양 보면 못난 자제들이 방촉을 함부로 거두어들여 쓰고 남은 초 도막을 모아서 내사에 모아 두고서 돌아가는 날을 기다리니 이런 일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방촉(肪燭) : 쇠기름으로 만든 초.
▶포노(庖奴) : 쇠고기를 바치는 관노(官奴). 주로 창고에서 부리는 노복(奴僕)인 창노(倉奴)가 맡는다.
▶육직(肉直) : 관아에 고기를 바치는 자.

 

후한(後漢) 때 파지(巴祗)가 양주 자사(揚州刺史)가 되었는데 벼슬살면서 처자는 데려오지 않고 밤에 손님과 함께 앉아 있을 적에 어두워도 관용(官用)의 초는 켜지 않았다. - 어느 책에는 “손님들과 술 마실 때에는 관용의 초는 켜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

▶파지(巴祗) : 중국 후한(後漢) 때의 관리.

 

임효택(林孝澤)이 벼슬살 때 가는 곳마다 청렴과 공평으로 일컬어졌다. 청장(淸漳)에 있을 때, 어느 날 저녁에 일을 마치자 촛불을 들고 내아(內衙) 안까지 배웅 나온 사람이 있었다. 임효택이 말하기를,

“이는 관용의 초인데 어찌 사실(私室)에서 쓸 수가 있겠는가.”

하고, 어서 가지고 가도록 하였다.

▶임효택(林孝澤) : 중국 송(宋)나라 때의 관리.
▶청장(淸漳) : 청장(淸漳)은 중국 산서성(山西省) 평정현(平定縣)에서 시작하는 강 이름.

 

정선(鄭瑄)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어떤 현령이 지극히 청렴하고 개결하였다. 서울에서 문서 - 공사(公事)였다. - 가 왔는데 관용의 초를 켜고 봉함을 뜯어보니 그중에 가정 안부가 있었다. 곧 관용의 초를 끄게 하고 글을 다 보고 나서야 관용의 초를 켜게 했다. 비록 너무 지나치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풍속을 격려하는 것이 좋다.”

무릇 타다가 남은 초 도막을 거두어 두고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자는 이 글을 읽으면 저절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장종련(張宗璉)은 명나라의 순리(循吏)였다. 고을에 부임할 때는 처자를 거느리고 가지 않았다. 어느 날 병이 위독하여 의원을 부르게 되었는데 방안에는 등잔도 촛불도 없었다. 동자(童子)가 밖으로 나가 기름 한 그릇을 얻어가지고 들어오니 장종련은 바로 물리쳤다. 그의 청렴하고 준엄함이 이와 같았다.

생각건대, 이는 너무 각박한 듯하니 꼭 이렇게 할 것은 아니다.

▶장종련(張宗璉) : 중국 명(明)나라 때의 관리.

 

혹 고을의 관례에 소용되는 쇠고기를 전혀 회계하지 않는 곳이 있는데, 이런 고을에 임명된 자는 듣고서 기뻐하여 좋은 관례라 하나, 이런 물건이 모두 나오는 데가 있는 것이요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지거나 땅에서 샘물처럼 솟을 리 없음을 모르는 것이다.

이미 회계가 없다면 반드시 백성에게 폐해가 되는 것이다. 혹 방(坊)과 동리를 떼어다가 계방(契房) - 사사로이 부역(賦役)을 거두는 것을 이름. - 을 만들거나 혹 창고의 곡식을 농간하여 그 남는 것을 쓰면 이익이 갑절이 되어 관(官)에서 나누어 먹는 까닭에 회계를 하지 않는 것이다.

 

혹시 옛날에는 이익이 후했는데 지금에 와서 박한 경우에는 1년 동안 고기를 바치느라 창고 포흠(逋欠)이 산더미처럼 져서 포노(庖奴)가 도망해 버리면 그 포흠을 포노의 친척이나 백성들에게서 징수하니 그 해독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도둑질한 것은 포노이지만 장물(贓物)을 먹은 자는 수령이다. 장물은 내가 먹고서 포노에게 도둑이라고 죄를 주니 사리에 합당한 일인가. 내가 그 장물로 우리 부모를 봉양하고 우리 조상에게 제사 지내면 효도는 어디에 있으며 복은 어디에서 내려오겠는가.

무릇 이런 고을에 임명된 수령은 속히 그 법을 고치고 그 본전을 정하여 회계를 밝혀야 한다. 그러고서 계방을 없애서 백성의 부역을 고르게 하고 창고의 자물쇠를 엄중히 단속하여 백성들의 폐단을 제거해야 할 것이니 이는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명행자(溟涬子)는 정사를 할 적에 일찍이 포목 한 자도 백성에게서 받아들인 적이 없었고, 닭 한 마리도 백성의 것을 먹은 적이 없었다. 돈으로 죽순(竹筍)을 사자면, 1백전으로 10근을 살 수 있는데 문지기가 11근을 받았더니, 명행자는 죽순을 판 자를 불러서 돌려주고 문지기를 곤장 쳤다.

▶명행자(溟涬子) : 송(宋)나라 사람 요응회(廖應淮)의 호.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