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건축물

우리 옛 건축물 15 - 기둥 1

從心所欲 2018. 6. 1. 09:36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


배흘림기둥.

어느 순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여 마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둥양식처럼 알려져 온 말이다. 그러나 기둥의

배흘림형태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양에서도 엔타시스(entasis)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어온 건축기법으로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이 그 대표적 경우로 알려져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한번쯤은 듣고 넘어갔을 도리스식,

코린트식 건축양식에도 흘림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모두 배흘림형태를 가진 기둥을 사용해왔다. 600년대

초에 지어진 일본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법륭사 금당(金堂)의 기둥도 배흘림기둥이다.

우리나라 옛 건물 기둥에 배흘림기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흘림 없는 기둥이 있는데 기둥의 입면 형태에

따른 것으로 흘림이 없는 기둥은 상하 직경이 같다. 흘림 없는 기둥은 살림집이나 부속채 같은 작은 건물에

사용하고 규모가 크거나 궁궐 및 사찰과 같은 권위건축에서는 보통 흘림기둥을 사용한다. 흘림기둥은 기둥

위아래의 지름을 달리하는 것을 말하며, 모양에 따라 다시 배흘림기둥과 민흘림기둥으로 나뉜다. 상부직경보다

하부직경을 크게 하여 사선으로 체감을 갖도록 한 기둥을 민흘림기둥이라고 하는데 단면이 방형인 기둥

(사각기둥)에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의성탑리 5층 석탑>


배흘림기둥은 기둥 중간에서 위와 아래로 곡선의 체감을 주어 양 끝으로 갈수록 직경을 점차 줄여 만든 기둥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략 지면에서 3분의 1지점이 가장 굵은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사전에는 배흘림의 이유를

구조상의 안정과 착시현상(錯視現象)을 교정하기 위한 수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착시라는 것은

거대한 원주에서 그 굵기를 같게 하면 중간 부분이 푹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배흘림기둥은

기둥 모양이 짓눌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은 채 지붕무게가 기둥을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마치 살아 있는 물체가 힘 안 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고분벽화의 건축도에서도 배흘림기둥이 묘사되어 있다고 하여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맥은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졌다. 배흘림 기둥은 현존하는 건물 중에서 고려시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과 조선시대 대부분의 정전건물에서 나타나며 팔작지붕보다는

맞배집에서 흘림이 강하다. 현존해 있는 목조건축 유구 중에서는 강릉 객사문1 기둥의 배흘림이 가장 강하다고 한다.



<강릉 객사문 기둥>


원기둥과 각기둥은 기둥의 단면형태에 따른 분류이다. 각기둥에는 사모기둥과 육모기둥, 팔모기둥이 있으나

원기둥과 함께 사모기둥이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사모기둥보다는 원기둥이 격이 높다고 생각해서 주요

정전이나 큰 건물에는 원기둥이 사용되었고, 사모기둥은 부속채나 작은 건물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추사 김정희 고택>


조선시대에는 살림집에서 원기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한양에서 먼 지역에서는

귀족들이 원기둥을 쓰기 시작했고 조선 후기에는 상당수 살림집에서도 원기둥을 사용하게 되었다. 살림집에서

쓰인 원기둥은 주로 대청에서 벽 없이 노출된 기둥이 많다.



<의성 김씨 종택 성주 사우당>


일반 민가에 원기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이유에 대해서는 재목을 사각으로 가공하면 아무래도 부재의

굵기가 작아지게 되지만 원목을 그대로 쓰게 되면 민가에서도 굵은 원목을 사용하여 규모가 큰 집을 지을 수

있게 됨으로써 규모로서의 궁궐의 위엄이 손상될 수도 있음을 염려한 측면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조선시대에 민가는 100칸을 넘지 못하도록 건물군 전체 규모에 대해 규제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원형

기둥의 사용금지는 단일 건축물의 크기에 대한 규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다.



이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알기쉬운 한국건축용어사전, 세계미술용어사전 등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1.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사를 말하는데 강릉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 본부객사로 총 83칸의 건물을 창건하고 임영관이라 하였으며 공민왕 15년(1366) 왕이 낙산사로 행차 도중 현액을 친필로 썼다고 전한다. 현재는 객사 문만이 남아 있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3, 초판 1994. 21쇄 2011. 돌베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