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김알지의 탄생설화 그림

從心所欲 2021. 12. 28. 12:51

설화에 따르면 신라 초기에 알에서 태어난 인물이 셋 있었다. 서라벌이라는 나라를 세운 박혁거세(朴赫居世), 신라 4대왕인 석탈해(昔脫解), 그리고 김알지(金閼智)이다. 그 가운데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된 김알지에 대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내용은 이렇다.

 

신라 4대왕인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9년 3월에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의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시림에 다다라 보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듣고 왕은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기뻐하며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라 하여 거두어 길렀으니, 그 아이는 자라감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그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다. 또, 금빛 궤짝에서 나옴을 연유로 하여 성을 ‘김(金)’씨라 부르고,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를 삼았다.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9년 : 서기 65년.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록된 설화도 부분적인 차이가 있긴 하나 전체적 줄거리는 같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이사금은 신라의 13대 왕으로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궤도(金櫃圖)>는 바로 이러한 김알지의 탄생설화를 그린 것이다.

 

[조속 &amp;lt;금궤도(金櫃圖)&amp;gt;, 견본채색, 축(軸) 크기 105.5 x 56cm, 그림크기 132.4 x 48.8㎝, 국립중앙박물관]

 

청록산수의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삼각형 모양의 원산(遠山)을 배경으로 나뭇가지에 걸린 금궤와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흰색의 닭, 그리고 탈해왕의 명령을 받아 계림을 찾아온 호공(瓠公)을 중앙에 배치했다. 발이 고른 비단에 진채를 사용하여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공필화(工筆畵)이다. 화면 내 비교적 크게 그려진 인물을 중심으로 배경처럼 펼쳐진 산수 표현은 조선중기에 크게 유행했던 절파계 산수에서 흔히 보이는 구성이라고 한다.

 

[조속 &amp;lt;금궤도(金櫃圖)&amp;gt; 부분]

 

그림 속 하인을 거느린 귀인 차림의 인물이 호공(瓠公)이다. 호공(瓠公)은 박혁거세 때부터 등장하는 신라 건국 초기의 인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래 왜국(倭國) 사람이었으며,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달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박을 뜻하는 ‘표주박 호(瓠)’ 자를 써서 호공(瓠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탈해이사금은 신라 왕실을 이은 박, 석, 김 3성(姓) 가운데 석(昔)씨를 여는 첫 왕으로,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뒤 그 이듬해인 58년에 호공을 당시의 최고 관직인 대보(大輔)로 삼아 국정을 운영토록 했다.

 

그림 위쪽에 해서로 적은 어제(御製)는 인조가 내린 글인지 아니면 효종이 내린 글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왕이 이 그림을 위하여 내린 글이다.

 

[조속 &amp;lt;금궤도(金櫃圖)&amp;gt; 어제 부분]

 

“이 분은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시조로서 금궤 안에서 그를 얻었기에 성을 김씨라 하였다. 금궤는 나무 위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울고 있어서 보고 가져와 보니 금궤 안에는 남자 아이가 있는데, 석(昔)씨의 뒤를 이어서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그의 후손인 경순왕이 고려에 들어오매 순순히 온 것을 가상히 여겨 경순(敬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어제에 이어 제작경위와 시기를 밝힌 관지는 이렇다.

 

“을해(乙亥) 다음해 봄 삼국사기를 보고 그리라는 명령이 있었다. 이조 판서 김익희가 교시를 받들어 쓰고, 장령 조속이 교시를 받들어 그렸다.”

 

여기서 말하는 을해년은 인조 13년인 1635년이다. 그래서 글에서 말한 ‘을해 다음해’는 바로 병자호란이 일어난 병자(丙子)년이다. ‘병자년’을 굳이 ‘을해 다음해’라고 쓴 것은 치욕을 당한 병자년을 언급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해석이다.

관지에 따르면 이 <금궤도>는 1636년에 제작된 것이 되겠지만, 교시를 옮겨 쓴 김익희(金益熙)의 직위로 인하여 혼란이 생겨났다. 김익희가 이조판서가 된 것은 효종 7년인 1656년 5월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인조의 명을 받은 때로부터 20년 후의 일이다. 1636년 봄, 김익희의 관직은 사간원의 정6품직인 정언(正言)과 홍문관의 종6품직인 부수찬(副修撰)이었다. 또한 그림을 그린 조속이 사헌부 정4품인 장령(掌令) 직을 지낸 것도 효종 때의 일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라는 지시는 1636년 봄에 인조가 내렸으나 그 해 가을에 병자호란이 일어난 탓에 그림 제작이 미루어졌다가 효종 때인 1656년에 가서야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그렇다면 왕의 어제(御製)는 어느 왕의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림에 내리는 어제는 통상 왕이 그림을 보고 내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림의 어제는 인조가 아닌 효종의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왕의 명령으로 그려지는 그림을 도화서 화원이 아닌 사대부가 그렸다는 점도 매우 특이하다. 조속(趙速)은 과거에 급제한 기록은 없지만 아버지가 병조참판에 추증된 집안이고, 본인은 인조 정란에 가담한 뒤 비록 훈명(勳名)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나 덕산 현감을 비롯한 지방 수령을 지냈고 중앙 조정의 정3품직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런 사대부가 궁정의 회화 제작에 참여하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화원풍의 공교한 청록산수를 그렸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어제를 적은 김익희는 그림을 그린 조속의 조카사위다. 이런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를 고려하면 그림의 제작경위에 대한 또 다른 추측도 가능할 법한데, 그에 대한 별 다른 기록은 없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민족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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