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강산무진도 속의 사람 사는 모습 3

從心所欲 2022. 3. 1. 14:45

이태백의 <촉도난(蜀道難)>은 계속 이어진다.

 

劍閣崢嶸而崔嵬 검각(劍閣)은 삐죽삐죽 높기도 하여
一夫當關 한 명이 관문(關門)을 지키면
萬夫莫開 만 명도 못 당하고
所守或匪親 수문장이 친하지 않다면
化爲狼與豺 승냥이와 다를 바 없다.
朝避猛虎 아침엔 호랑이 피하고
夕避長蛇 저녁엔 구렁이 피하니
磨牙吮血 이로 으깨고 피를 빨아
殺人如麻 사람 잡아 낭자하다.
錦城雖云樂 금관성(錦官城)이 좋다고 해도
不如早還家 일찌감치 집으로 가느니만 못하리라.

蜀道之難 촉도의 험난함이여
難於上靑天 하늘 오르기보다 어려워라.
側身西望長咨嗟 몸 기우려 서쪽 향해 긴 한숨만 쉬노라.

 

검각(劍閣)은 잔도(殘徒)의 다른 이름이고 금관성(錦官城)은 사천성의 성도(成都)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명성이 자자한 금관성은 그 험한 산길 너머에 존재했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에도 험준한 산세 속에 번성한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0/14]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0/14의 부분 1]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0/14의 부분 2]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0/14의 부분 3]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0/14의 부분 4]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1/14]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1/14의 부분 1]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1/14의 부분 2]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1/14의 부분 3]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1/14의 부분 4]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2/14]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2/14의 부분 1]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2/14의 부분 2]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2/14의 부분 3]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2/14의 부분 4]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2/14의 부분 5]

 

 

<강산무진도>는 사람들이 사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 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다해도 강산은 다함이 없다는 말을 하는 듯하다.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3/14]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3/14의 부분 1]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3/14의 부분 2]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13/14의 부분 3]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그림 끝 여백에는 ‘김정희(金正喜)’라는 백문방과 ‘추사진장(秋史珍藏)’이라는 주문방이 찍혀있어 한때 추사 김정희가 간직했던 그림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인문 <강산무진도> 14/14의 끝부분]

 

이태백은 장안에 갔을 때 자신이 지은 <촉도난(蜀道難)>을 하지장(賀知章)에게 보여줬다. 하지장은 당나라 초기의 시인으로 당시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빈객(賓客)으로 있었다. 하지장은 <촉도난(蜀道難)>을 다 읽기도 전에 네 번이나 찬탄하며, 이태백에게 '죄를 지어 이 세상에 내려온 신선'이라는 뜻의 ‘적선인(謫仙人)’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리고는 허리에 찼던 금 거북을 풀어 술과 바꾸어서 함께 취하도록 마셨다고 한다. 또한 하지장은 이태백을 현종 임금에게도 추천하기까지 하여 지금도 하지장은 이태백이라는 위대한 시인을 발견한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참고 및 인용 : 완역해설 고풍악부가음(진옥경, 노경희, 2014, 역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