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심사정의 전이모사 1

從心所欲 2022. 3. 9. 12:55

심사정(1707 ~ 1769)은 겸재 정선(1676 ~ 1759)보다 약 30년 뒤의 화가다. 그가 활동하던 때 조선에서는 정선에 의해 주도된 소위 진경산수화가 한창 각광받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심사정은 그런 시류와는 상관없이 중국의 전통 화법을 연구하는데 전념했다. 조선의 산수화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정형화된 산수화 기법을 이해하고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유지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심사정의 선택은 당연한 순서였는지도 모른다.

 

6세기경 중국 육조시대 남제(南齊)의 화가이자 화론가였던 사혁(謝赫)은 ≪고화품록(古畫品錄)≫에서 회화에서 중요시되어야 하는 육법(六法)을 제시한 바가 있다. 그 육법의 하나인 ‘전이모사(轉移模寫)’는 앞선 화가들의 그림을 모방하여 그리면서 그 기법을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그림에 나타난 옛사람의 정신과 형태를 그대로 따라서 그리는 것은 동양 회화의 특수한 전통 중의 하나이다. 조선의 화가들도 거의 대부분 중국화풍을 모방하면서 그림을 배웠다. 심사정 역시 그런 전통을 따라 그림을 배운 것이다.

심사정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원대와 명대 그리고 청대까지의 남종화가 널리 유행했다. 심사정도 중국 역대의 대표적 남종화가들의 화풍을 널리 섭렵했다.

표암 강세황은 『현재화첩(玄齋畵帖)』발문에서 “현재는 처음에 심주(沈周)를 공부하여 초년에는 피마준(披麻皴)이나 혹은 미점법(米點法)을 사용했으며 중년에는 대부벽(大斧劈)을 시작했다.”고 기술했다.

 

심주(沈周)는 명나라 때의 대표적인 남종문인화가로 피마준법(披麻皴法)을 구사하였고, 미점법(米點法)은 북송(北宋)의 문인화가인 미불(米芾)의 대혼점(大混點)을 가리킨다. 대부벽준(大斧劈皴)은 중국 북송 후기에서 남송 초기의 화원 화가였던 이당(李唐)의 법이라고도 불리는데 주로 절파(浙派) 등의 북종화에서 쓰이던 준법이다.

 

심사정은 그림에 입문하면서부터 40대 초반까지는 남종화법을 이해하고 체득했으며, 이후 10년간은 북종화법 중 하나인 절파화풍을 남종화법과 결합시키는 시도를 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신만의 화법을 이룩해냈다고 한다.

심사정은 이런 과정 속에서 중국 화가들의 화풍이나 화의를 따라 수도 없는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심사정은 중국의 여러 화가들을 ‘방(倣)’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방(倣)’한다는 것은 옛 대가의 화의(畵意)를 후대의 화가가 어느 정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림의 주제나 구도, 화법 등이 원작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표절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전통적 동양 회화에서는 이 또한 하나의 창작활동이었던 것이다.

 

[심사정 <방심석전산수도(倣沈石田山水圖)>, 1758, 지본담채, 129.4 x 61.2cm, 국립중앙박물관] 

 

심석전(沈石田)은 명나라 때의 화가로 이름은 주(周)이고 석전(石田)은 호(號)이다. 원말사대가 이후 저조했던 남종화를 부흥하고 오파(吳派) 계통의 문인화를 정립시킴과 동시에 묵희(墨戯)로서의 문인의 화훼잡화(花卉雜畫) 양식을 부흥시킨 인물로 꼽힌다. 명나라 사대가(四大家)의 하나이다.

 

그림은 초옥에서 글을 읽고 있는 선비가 있는 전경과 바위 절벽의 중경, 그리고 뒤쪽의 주산 등 세 부분의 경물로 이루어져 있다. 집 뒤의 나뭇가지와 절벽 위의 소나무 가지를 통하여 시선을 자연스럽게 근경에서 중경을 거쳐 원경으로 유도함으로써 화면 속 경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통일감을 갖게 한다는 평을 받는다.

‘무인(戊寅)’이라는 관지를 통하여 1758년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심사정이 52세 때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심사정 자신이 ‘방심석전법(倣沈石田法)’이라고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주(沈周)의 화풍과는 별로 연관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원경의 산과 근경의 언덕묘사, 수지법(樹枝法) 등에서 남종화법을 썼으나 왼편 중경의 절벽 표현에서는 부벽준이 구사되어 남종화법과 북종화법이 함께 혼합된 심사정 특유의 절충적 화풍을 나타내고 있다는 평이다.

 

[심주 <고은도(高隱圖), 지본수묵, 111 x 58cm]

 

[심주 <추산도(秋山圖), 지본담채, 131 x 61cm]

 

명나라대의 문인화에 큰 영향을 끼친 화가로 예찬(倪瓚, 1301 ~ 1374)은 심주보다 앞선 원나라 말기의 화가이다. 심사정이 예찬을 방(倣)한 작품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심사정 <방운림(倣雲林)산수>, 지본담채, 30.8 x 42.1cm 선문대박물관]

 

[심사정 <방예운림법(倣雲林法)산수>, 25.6 x 34cm]

 

[심사정 <방운림필의(倣雲林筆意)> 또는 <송죽모정(松竹茅亭)>, 지본담채, 29.9 x 21.2cm, 간송미술관]

 

예찬은 오진(吳鎭)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 등과 함께 원말 4대가로 꼽히는 화가이다. 여러 가지 호를 사용하였지만 운림(雲林)이란 호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위의 세 그림은 모두 근경에 나무들을 배치하였는데 이는 예찬 그림의 특징이다. 그의 대표적 작품인 <육군자도(六君子圖)>와 <용슬재도(容膝齋圖)>뿐만 아니라 <우산임학도(虞山林壑圖)>, <어장추제도(渔庄秋霽图)> 등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예찬 <용슬재도>, 1372년, 지본수묵, 74.7 x  35.5cm  타이페이국립고궁박물원]

 

[예찬 <우산임학도(虞山林壑圖)> 1372년 94.6 x 35.9cm,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예찬의 그림들은 물기 적은 갈필(渴筆)에 연한 먹을 묻혀 간결하게 그리고 근경과 원경을 똑같은 농담(濃淡)으로 그리는 특징을 나타낸다. 그렇게 그린 그의 그림들은 소략하여 적막하고 담백하다 못해 쓸쓸함이 넘쳐 난다.

심사정이 방한 그림에도 그런 분위기가 흐른다. 특히 <송죽모정>은 근경의 빈 정자와 강을 사이에 두고 먼 산을 포치(布置)한 것이 전형적인 예찬식 구도에다, 차갑고도 담백한 의경(意境)과 쓸쓸하면서 적적한 그림의 품격이 속되지 않다는 평을 받는다.

산수화에 짚이나 억새로 지붕을 이은 정자인 모정(茅亭)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예찬이 처음이라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