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117 - 영하판관의 상영에 대한 예는 극진하여야 한다.

從心所欲 2022. 3. 13. 08:53

[경직도(耕織圖) 8폭 병풍 中 4폭, 각폭 115 x 35cm, 삼척시립박물관]

 

●봉공(奉公) 제3조 예제(禮際) 5
영하판관(營下判官)은 상영(上營)에 대하여 각별히 공경하며 예를 극진히 하여야지, 소홀한 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營下判官 於上營 宜恪恭盡禮 不可忽也)
▶봉공(奉公)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3편인 봉공(奉公)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공경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등, 공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6조로 나누어 논하였다. 봉공(奉公)의 제3조인 예제(禮際)는 ‘예의 있게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영하판관(營下判官), 상영(上營) : 감사나 병사는 감영(監營)이나 병영(兵營) 소재지 고을의 수령을 겸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런 감사나 병사를 상영(上營)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상영이 고을 수령을 겸할 경우 그 고을의 행정관으로 종5품의 판관이 임명되었다. 이를 영하판관(營下判官)이라 한다.

 

정백자(程伯子)가 진녕 판관(鎭寧判官)이 되었는데, 그때 태수가 엄혹(嚴酷)하고 각박하며 시기가 많아서, 통판(通判) 이하는 감히 그에게 일을 논하지 못하였다. 태수가 처음에는 정(程)선생은 일찍이 조정에서 대헌(臺憲)으로 있던 사람이니, 직무에 힘을 다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또 자기를 업신여길 것이라 염려하였는데, 지내보니 정 선생은 그를 섬기기를 매우 공손하게 하였다. 비록 여러 고(庫)를 관리하는 자잘한 일일지라도 성심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일이 조금이라도 타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함께 변론하니, 드디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서로 교분이 두터워져서, 여러 차례 중대한 옥사(獄事)를 심리하여 죽지 않게 된 자가 전후에 십여 명이 되었다.

▶정백자(程伯子) : 북송(北宋)의 대유(大儒)였던 정호(程顥).
▶대헌(臺憲) : 북송시대 어사대(御史臺)의 관직. 정호(程顥)는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냈다.

 

진정부수(眞定府帥) 왕사종(王嗣宗)이 기(氣)를 믿고 그의 속관(屬官)들을 모욕하며 불법을 행한 지 오래되어 감히 통판(通判)이 되려는 자가 없었다. 왕(王) 모가 - 이름을 잊었다. -  통판이 되니 왕사종은 점차 기(氣)로 그를 누르려 하였으나 공은 다투려 하지 않고 예(禮)로써 대하니, 왕사종은 굴복하여 무릇 옥사를 처리하고 정사를 결정함에 있어서 일체 공의 말만 들었다.

그는 비록 가부(可否)를 분별하기는 하나 모든 정사가 다 왕사종으로부터 결정되어 나오는 것으로 하니, 부중(府中)에서도 공의 도움 때문인 줄을 몰랐으며, 온 부(府)가 잘 다스려졌다. 선비들은 이로써 그를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 《왕형공집(王荊公集)》에서 나왔다. -

▶왕사종(王嗣宗) : 중국 송나라 때의 관리.
▶《왕형공집(王荊公集)》 : 왕안석의 문집. 그가 형국공(荊國公)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붙여진 서명(書名)이다.

 

왕질(王質)이 소주통판(蘇州通判)으로 있을 적에, 매양 지주(知州) 황종단(黃宗旦)과 일을 다투어 황종단이 좋아하지 않았다. 왕질은 말하기를,

“나는 왕명을 받아 공(公)을 보좌하고 있으니, 일을 하자면 다투어야 하는 것이 직책입니다.”

하였다.

▶왕질(王質), 황종단(黃宗旦) : 중국 송나라 때의 관리.

 

상국(相國) 오윤겸(吳允謙)이 옥당(玉堂)에서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갔는데, 계림군(鷄林君) 이수일(李守一)이 그때 병사(兵使)로 있었다. 전 통판(通判)은 문사(文士)라 해서 스스로 교만하며 귀한 체하여 절도사(節度使)를 무관(武官)이라고 변변찮은 사람으로 여기니, 이공(李公)이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오공(吳公)이 판관(判官)이 되자, 공손한 태도로 그를 섬기되 오직 근신하니, 이공도 크게 탄복하여 마음을 통하여 서로 의지하였다. 관하의 비장들을 더욱 단속하니, 비장들도 감히 본부에 폐를 끼치지 못했고, 부내는 화평하게 다스려졌다.

▶오윤겸(吳允謙) : 광해군 때 동래 부사(東萊府使)ㆍ호조 참의ㆍ충청도 관찰사ㆍ좌부승지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지냈고, 인조 때에 예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본관은 해주(海州).
▶계림군(鷄林君) 이수일(李守一) : 선조 때 선전관(宣傳官)ㆍ밀양 부사(密陽府使)ㆍ성주 목사(星州牧使) 등을 지냈고 광해군 때는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세 번 역임하면서 야인(野人)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인조 때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副元帥)로서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계림 부원군으로 봉해지고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가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경주(慶州).

 

조석윤(趙錫胤)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있을 적에, 매일 새벽녘에 병마사에게 문안을 드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은 임금의 명을 공경하는 까닭입니다.”

하고, 끝내 그만두지 않았다. 

민유중(閔維重)이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있을 적에, 병마사에게 문안드리기를 꼭 조공(趙公)이 하듯 하였다. - 《동평문견록(東平聞見錄)》-

▶조석윤(趙錫胤) : 인조 때 수찬(修撰)ㆍ이조 정랑ㆍ진주 목사ㆍ대사간ㆍ이조 참판ㆍ종성 부사(鍾城府使)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배천(白川).
▶민유중(閔維重) : 숙종의 계비(繼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 숙종 때 호조 판서ㆍ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으로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여흥(驪興).
▶《동평문견록(東平聞見錄)》 : 효종의 사위인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책.

 

요즈음 사람들은 스스로 망녕되이 교만 자중(自重)하여, 굽혀서 윗사람을 섬기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상영(上營)과 일을 만들어 겨루기를 좋아하니, 이는 순리(順理)로운 일이 아니다. 혹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다투어도 좋다.

 

판서 권대재(權大載)는 몸가짐이 검소하고 벼슬살이에 청렴하고 간편하였다. 일찍이 공주 판관(公州判官)으로 있을 적에, 감사가 쓰는 물자도 모두 절약하여 보내줌으로써 남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감영(監營)의 이속(吏屬)들이 일을 만들기를 도모하여 배당한 땔나무를 몰래 빼돌렸으므로, 감사의 방은 항상 차가왔다.

감사가 물으니 그들은,

“배당한 땔나무가 본래 적습니다.”

하였다. 감사가 권 판관을 꾸짖으니 권 판관은,

“감히 살피지 않으리까?”

하고, 그날 몸소 감독하여 배당한 땔나무를 다 때니, 방이 화로같이 뜨거워서 감사가 견디어 내지 못하였다. 급히 사람을 보내어 사과하기를,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하자, 권 판관은 그제서야 물러갔다.

▶권대재(權大載) : 효종 때 병조 좌랑ㆍ전라도 도사ㆍ대구 판관(大丘判官) 등을 역임하고, 숙종 때 형조참의ㆍ전라도 관찰사ㆍ대사간ㆍ대사헌ㆍ제학(提學)ㆍ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안동(安東).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