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공(奉公) 제3조 예제(禮際) 8
상사가 명령한 것이 공법(公法)에 어긋나고 민생에 해가 되는 것이면 꿋꿋하게 굽히지 말고 확실하게 지켜야 한다.
(唯上司所令 違於公法 害於民生 當毅然不屈 確然自守)
▶봉공(奉公)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3편인 봉공(奉公)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공경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등, 공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6조로 나누어 논하였다. 봉공(奉公)의 제3조인 예제(禮際)는 ‘예의 있게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오패(吳沛)가 그의 자제들을 가르치기를,
“너희들이 벼슬살이하거든 관물(官物)을 내 물건처럼 여기고, 공사(公事)를 내 일처럼 보아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백성들에게 죄를 짓느니보다 차라리 상관에게 죄를 짓는 것이 낫다.”
하였다.
- 자하산인(紫霞山人)이 말하기를 “백성에게 죄를 짓는 것은 곧 하늘에 죄를 짓는 것이므로 감히 하지 못한다.” 하였다. -
▶오패(吳沛) : 송나라 때의 관리. ▶자하산인(紫霞山人) : 정약용 자신을 가리키는 별호로 추정. |
한(漢)나라 임연(任延)이 무위 태수(武威太守)가 되자, 광무황제(光武皇帝)가 친히 접견하고 경계하기를,
“상관을 잘 섬겨 명예를 잃지 않도록 하라.”
하니, 임연이 말하기를,
“신이 듣자옵건대, 충신은 사사로울 수 없고, 사정(私情)이 있는 신하는 불충(不忠)합니다. 바른 것을 이행하고 공(公)을 봉사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요, 상하가 뇌동(雷同)하는 것은 폐하의 복(福)이 아닙니다. 상관을 잘 섬기라는 분부를 신은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황제는 탄식하며,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장종련(張宗璉)이 상주(常州)로 좌천되자, 어사 이립(李立)이 강남(江南)의 군적(軍籍)을 정리하였는데, 장종련에게 공문을 보내어 수행(隨行)하게 하였다. 이립(李立)이 간활한 군리(軍吏)의 말을 듣고 평민을 잡아다가 군오(軍伍)의 수를 채우는 일이 많으므로 장종련이 이를 반대하여 자주 다투었다. 이립이 화를 내자 장종련은 문득 땅에 누워 매를 쳐 달라 하면서,
“백성을 대신하여 죽겠습니다.”
하니, 이로 인해서 부당하게 징발되지 않고 면제된 사람이 많았다.
▶장종련(張宗璉) : 명나라 때의 관리. ▶군오(軍伍) : 군의 대오(隊伍). |
조예(趙豫)가 송강부(松江府)를 맡았을 때 청군어사(淸軍御史) 이립(李立)이 와서 군대의 수를 늘리는 데만 오로지 힘써서, 친척이나 동성(同姓)에까지 관련시켜 조금이라도 변명하면 혹형으로 다루니, 인심이 크게 소란해지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염사(鹽史)가 소금 굽는 인부까지 긁어모아 또한 다른 민호(民戶)에게까지 미치어 백성들이 받는 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예는 글을 올려 이를 극력 논해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되었다.
▶조예(趙豫) : 명나라의 관리. ▶염사(鹽史) : 소금의 생산과 수급을 맡은 관직. 염사(鹽司). |
생각하건대, 어사가 하는 일이나 상사가 하는 일이 폐정(弊政)이라면, 수령이 글을 올려 극력 논할 수 있으니, 명나라 법이 참으로 좋다.
우리나라는 오로지 체통만을 보고 상사가 하는 일이 비록 불법을 저지르더라도 수령으로서 감히 한마디도 말을 못하니, 민생의 고통이 날로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고려 때 정운경(鄭云敬)이 밀양지군(密陽知郡)이 되었는데, 충혜왕(忠惠王) 때 어느 밀양 사람이 재상 조영휘(趙永暉)의 베를 빌린 일이 있었다. 조영휘가 어향사(御香使) 안우(安祐)에게 부탁하여 통첩을 내어 이를 징수하려 하였다. 정운경은,
“밀양 사람이 베를 빌린 것은 조영휘 자신이 징수할 일이지 당신이 물을 것이 아닙니다.”
하니, 안우가 노하여 좌우에 있는 하관들에게 명령하여 욕보이려 하였다.
정운경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이제, 이미 교외(郊外)에서 천자(天子)의 명을 맞아들였는데, 어떻게 나를 죄줄 수 있겠습니까? 공은 천자의 덕음(德音)을 펴서 먼 곳 백성에게 은혜가 미치도록 하지 않고 감히 이런 일을 한단 말입니까.”
하니, 안우가 굴복하고 그 일을 중지하였다.
▶어향사(御香使) : 고려 후기에 원나라에서 고려의 명승대찰에 사신을 보내 축원을 하였는데, 어향사는 그 사신을 말한다. 어향사는 원에서 직접 파견하기도 하지만 고려인이 맡기도 하였다. ▶교외(郊外)에서 천자(天子)의 명을 맞아들였는데 : 정운경이 교외로 나가 어향사를 영접하였으므로 천자의 명을 받들었다고 말한 것. |
박환(朴煥)이 금구 현령(金溝縣令)으로 있을 때, 청(淸)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 사람 - 한족(漢族)을 말한다. - 을 찾아 보내도록 요구하였는데, 조정에서도 감히 거부하지 못하였다. 각 군읍에 영이 내리니, 각 군읍이 떨고 놀라 다 샅샅이 찾아내지 못하면 중한 견책을 당할까 걱정하여 찾아내느라고 어수선하였다. 그는 탄식하기를,
“나는 허리에 찬 관인(官印)의 끈은 풀 수 있으나 이 일만은 할 수 없다.”
하고, 우리 현에는 찾아낼 한인(漢人)이 없다고 신보(申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 현에 사는 한인만은 태연히 지낼 수 있었다. 보고 듣는 사람마다 그의 의리에 탄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박환(朴煥) : 조선 인조와 현종 때의 관리. 본관은 반남(潘南). 금구(金溝)는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에 속했던 고을. ▶허리에 찬 관인(官印)의 끈은 풀 수 있으나 : 관인(官印)은 관서(官署) 또는 관리(官吏)가 직무상 사용(使用)하는 도장(圖章)을 가리키는 것으로 관직을 그만둔다는 의미. ▶신보(申報) : 하급 관서나 관원이 상급 관서나 관리에게 보고하여 알리는 것. |
이영휘(李永輝)가 안협 현감(安峽縣監)으로 있을 때, 그 도의 감사(監司)가 자신의 처를 관내에 장사 지내면서 물자를 각 군읍에 요구하는 것이 매우 많았는데, 군읍에서는 뒤질세라 요구대로 따랐다. 그는 말하기를,
“상관으로서 사사(私事)로 하관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미 의(義)가 아닌 것이요, 하관으로서 상관에게 비위 맞추어 섬기는 것은 내가 곧 아첨이 된다. 그러나 그가 상례(喪禮)를 핑계로 요구하니 거절할 수도 없다.”
하고는 물건을 간략하게 하여 보냈더니, 감사가 노하여 고의로 행전도사(行田都事)의 손을 빌어 법으로 중상하였다.
▶이영휘(李永輝) : 조선시대 관리(1624 ~ 1688). 안협(安峽)은 지금의 강원도 이천군에 속한 고을로 북한지역이다. ▶행전도사(行田都事) : 조선 후기 각 군현(郡縣)의 농지를 종합적으로 점검하는 것을 행전도회(行田都會) 혹은 검전도회(檢田都會)라 하였다. 여기서는 감사를 대리하여 입회하는 도사(都事)를 가리킨다. |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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