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163

연암 박지원 2 - 학식(學識)

산기슭에 가려 아직도 백탑은 보이지 않는다. 말을 채찍질하여 수십 보를 못 가서 겨우 산기슭을 벗어나자 눈앞이 아찔해지며 눈에 헛것이 보일만치 벌어진 광경이 어마어마했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시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 데가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아 제 신대로 다니게 마련임을 알았다. 말을 멈추고 사방을 휘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말했다. “한바탕 울만한 자리로구나!” 박지원이 드넓은 요동벌판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다. 好哭場 可以哭矣. “곡하기 좋은 곳이다. 가히 울만하구나!” 생전 처음 접한 광경에 이런 특이하고도 기품있는 감탄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평소에 쌓은 학식과 오랜 사고의 훈련이 없다면 불현듯 입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감탄..

우리 선조들 2019.10.25

연암 박지원 1 - 조선의 대문호

정조는 치세 당시 문풍(文風)이 예스럽지 못하고 소설이나 패관잡기 등에서 사용되는 자유분방한 패사소품체 (稗史小品體)가 성행하는 것을 두고 그 원인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 ~ 1805)과 그가 지은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죄라고 지적하였다. 정조는 명말청초(明末淸初) 중국 문인들의 문집에서 사용되는 문체를 배격하고 순정(醇正)한 고문(古文)의 문풍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정조가 생각하는 좋은 문체란 전한(前漢)시대에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나 후한(後漢)의 반고가 쓴 『한서(漢書)』같은 문체, 한대(漢代) 이전의 형식을 제창하여 산문 문체를 개혁한 당나라의 한유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제창했던 당나라 유종원 같은 문체였다. 정조로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에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

우리 선조들 2019.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