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1 - 조선의 대문호
정조는 치세 당시 문풍(文風)이 예스럽지 못하고 소설이나 패관잡기 등에서 사용되는 자유분방한 패사소품체 (稗史小品體)가 성행하는 것을 두고 그 원인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 ~ 1805)과 그가 지은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죄라고 지적하였다. 정조는 명말청초(明末淸初) 중국 문인들의 문집에서 사용되는 문체를 배격하고 순정(醇正)한 고문(古文)의 문풍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정조가 생각하는 좋은 문체란 전한(前漢)시대에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나 후한(後漢)의 반고가 쓴 『한서(漢書)』같은 문체, 한대(漢代) 이전의 형식을 제창하여 산문 문체를 개혁한 당나라의 한유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제창했던 당나라 유종원 같은 문체였다. 정조로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에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