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163

정조 1 - 수기치인

견해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종 다음으로 호감도가 높은 조선 왕은 정조일 것이다. 세종대왕이 성군(聖君)으로 추앙받는 왕이라면 정조는 그보다는 친근감이 느껴지는 왕이다. 할아버지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기구한 운명 속에서 성장하여 정치적 소용돌이를 뚫고 왕위에 올랐던 마치 영화 주인공 같은 캐릭터가 자주 소개되어서일지도 모른다. 또한 역대 조선 왕 가운데서도 정조만큼 비난거리가 없는 왕도 없다. 정조 사후 붕당정치가 끝나고 노론이 주도하는 세도정치로 이어지면서 실록에 정조에 대한 시빗거리가 실리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실제로 정조는 자신을 철저히 관리한 왕이었다. 『일성록(日省錄)』은 1760년(영조 36)부터 1910년까지 주로 왕의 주요업무와 국정을 담은 기록물이다. 『일성록(日省錄)』은 원래 정조의 개인..

우리 선조들 2020.06.07

연암 박지원 32 - 졸(卒)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는 키가 크고 풍채가 좋으셨으며, 용모가 엄숙하고 단정하셨다. 무릎을 모아 조용히 앉아 계실 때면 늠름하여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으셨다. 안색은 불그레하고 윤기가 나셨다. 또 눈자위는 쌍꺼풀이 졌으며 귀는 크고 희셨다. 광대뼈는 귀밑까지 뻗쳤으며 긴 얼굴에 듬성듬성 구레나룻이 나셨다. 이마에는 달을 바라볼 때와 같은 김은 주름이 있으셨다.” 중년에 박지원을 그린 초상화가 집안에 두 점이 있었는데 박지원이 별로 닮지 않았다고 하여 없애버렸다. 그래서 아들 박종채는 다시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으나 박지원의 허락을 받지 못하여 결국 초상화조차 남기지 못한 것을 비통해 했다. 지금 전하는 박지원의 초상화는 박종채의 아들인 박주수가 그린 것이라 한다. 박주수는 1866년 ..

우리 선조들 2020.05.15

연암 박지원 31 - 양양부사

박지원이 면천군에서 고을을 다스리는 방식은 안의현에 있을 때와 같았다. 부임한지 몇 달 만에 행차 때 벽제 소리 등 번거로운 의례를 없애버리거나 간소하게 한 뒤 관아가 조용해졌다. 관내에 일이 없어 수령의 도장이 상자 속에서 며칠씩 잠자고는 했다. 그리고 몇 달씩 감옥이 텅 빌 때도 있었다. 그때 살인 용의자 한 명이 오랫동안 혼자서 빈 옥에 갇혀있었는데 박지원은 그의 억울한 사정을 다시 심리할 예정이었다. 박지원은 그가 추위에 떨며 굶주리는 것을 불쌍히 여겨 목에 씌운 칼과 발에 채운 차꼬를 풀어주고 간수 방에서 지내게 해주었다. 죄수는 감동하여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면천군 남쪽에 양제(楊堤)라는 제방이 있었는데, 고을로 흘러드는 물을 가두어 모아두는 곳으로 그 물을 사용하는 농토가 꽤 ..

우리 선조들 2020.05.13

연암 박지원 30 - 면천군수

안의현감에서 물러나 한양으로 올라온 박지원은 한가로워지자 전원으로 돌아가 책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처남 이재성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이제 늙어 백발이 성성하니 다시 세상일을 도모할 수 있겠나? 장차 한적한 터를 하나 잡아 자네와 함께 소요(逍遙)한다면 여생이 지극한 즐거움이 될 것 같네.” 그리하여 지금의 종로구 계동에 있는 과수원 하나를 사서 터를 닦고 흙벽돌로 조그만 집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 박지원은 제용감(濟用監)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의금부 도사로 자리를 옮기고 이어 의릉령(懿陵令) 직을 맡았다. ▶제용감(濟用監) 주부 : 모시,·마포, 가죽,·인삼(人蔘) 등을 왕실에 올리는 일과, 왕이 하사하는 의복, 천, 비단 등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청. 주부(主簿)는 종6품 직. ▶의..

우리 선조들 2020.05.12

연암 박지원 29 - 청빈낙도

주변에서 박지원을 위하는 마음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공은 연세가 예순에 가까워서야 겨우 조그만 고을의 수령이 되셨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일에 뜻을 두지 않으시고 정자를 세우고 못을 파서 친구와 손님을 맞아들이고 있으며, 남에게 편지를 쓸 때면 늘 안의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 속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크게 자랑하고 계십니다. 이는 모두 부유하고 안락한 사람의 기상을 드러내는 것이나, 이래서야 어떻게 뒷날의 계책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궁상을 떨고 신병(身病)이 있다고 말해야만 남이 혹 동정하여 승진하도록 추천해줄 것입니다.” 그러자 박지원은 허허 웃으며 대답하였다. “내가 연암골에서 가난하게 살 때에도 남한테 가난의 ‘가’자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소. 지금 나는 물과 대나무가 아름다..

우리 선조들 2020.05.10

연암 박지원 28 - 하풍죽로

박종채는 아버지가 평소 소실을 둔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생을 가까이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지방 수령으로 있을 때에 노래하는 기생이나 가야금을 타는 기생이 늘 옆에서 벼루와 먹 시중을 들거나 차를 만들어 올리고 수건과 빗을 받들거나 산보할 때 수행하면서 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함께 지냈지만 한 번도 마음을 준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지원의 처남인 지계공은 “매양 술이 거나해지고 밤이 깊어 등잔불이 가물가물하면 담소는 한창 무르익고 앞자리의 기생들은 구성지게 노래를 불렀었지. 이즈음 사람들은 바야흐로 신이 나고 흥이 고조되었는데, 공(公)은 때때로 근엄한 낯빛에 엄숙한 목소리로 기생들을 그만 물러가게 하곤 했어. 그러면 사람들은 흥이 싹 식고 말았지. 그러나 공께서 왜 그러시는지는 알 수 없었는..

우리 선조들 2020.05.09

연암 박지원 27 - 이용후생(利用厚生)

박지원은 수령으로 있으면서 소송을 심리하거나 옥사(獄事)를 처리할 때 언성을 높이거나 성을 내는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판결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지만, 인륜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유독 엄중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형제가 재산문제로 다투거나, 남의 아내를 간음한 일 등에 대해서는 보통보다 더 엄격히 다스렸다. 또한 죄를 지은 자가 뉘우칠 때까지 반복하여 타이르고 깨우쳐주었다. 박지원은 아랫사람에게 매를 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득이 곤장을 쳐야 할 경우에는 곤장질이 끝난 후 반드시 사람을 보내 그 맞은 곳을 주물러 열을 풀어주게 하면서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고을 원 노릇은 좋은 일이지만 사람을 매로 다스리는 일만큼은 몹시 괴롭고 싫다.” 박지원 휘하..

우리 선조들 2020.05.07

연암 박지원 26 - 의옥(疑獄) 심리

박지원이 안의현에 부임하였을 때의 경상 감사는 정대용(鄭大容, 1749 ~ 1805)이었다. 정대용은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규장각직각을 거쳐, 1787년에는 영남좌도어사, 이듬해는 함경도에 흉년이 들자 북관위유어사(北關慰諭御史)로 파견되었으며, 1791년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평소 박지원의 명성에 감복해하던 인물로, 박지원이 부임 인사차 감영에 들리자, 직접 객사(客舍)에 찾아와 박지원과 밤새 담소를 나누었다. 정대용은 박지원보다 나이가 12살 어렸지만 관찰사인 그의 품계는 종2품이었고 현감인 박지원의 품계는 종6품이었다. 당시 도내(道內)에는 죄상이 복잡하여 쉽게 판정하기 어려워서 해가 지나도록 종결이 안 된 범죄 사건들이 여럿 있었는데 정대용은 박지원에게 이 사건들을 모두 판..

우리 선조들 2020.05.05

연암 박지원 25 - 구휼의 예(禮)

박지원이 안의현에 부임한 해에 흉년이 들었다. 박지원은 흉년의 피해를 감영에 보고할 때 과장하거나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자 아전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매번 감영에 재해를 보고하면 피해액을 삭감하는 것이 관례였사옵니다. 이제 만일 사실대로 감영에 보고하여 감영이 그 절반을 삭감한다면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줄 수 없게 되거늘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박지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장사치나 거간꾼들이 값을 부풀려 속여 파는 술책이다.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또 삭감될 것을 염려하여 부풀려 보고했다가 만일 보고한 대로 다 승인해준다면 그 남는 것을 장차 어떡하려느냐?” 그리하여 사실대로 감영에 보고했는데, 감영에서는 보고한 숫자대로 승인을 해주었다. 박지원은 흉년이 든 다..

우리 선조들 2020.05.04

연암 박지원 24 - 안의현감

박지원이 안의현 현감으로 부임한 것은 1792년 정월이었다. 아들 박종채는 안의현이 호남과 영남 사이에 위치한 산골마을로 풍속이 교활하고 사납다고 했다. 박지원이 부임하자 백성들이 박지원을 시험하려고 이치에도 닿지 않는 시시콜콜한 일들을 갖고 소송을 내는 바람에 그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박지원은 그 중 거짓말에 해당하는 송사 10여 건을 엄중히 가려내어 물리쳤는데, 그러자 백성들이 “원님이 총명하여 속일 수 없다”며 서로 경각심을 갖으면서 소송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백성들뿐만 아니라 아전들도 대단히 교활하고 간사하여, 매번 수령이 새로 부임할 때마다 익명으로 투서하여 서로의 비리를 들추어내곤 하였다. 박지원은 어느 날 자리 밑에 웬 편지가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박지원은 이를 못 ..

우리 선조들 2020.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