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163

연암 박지원 13 - 민옹전

박지원이 오랜 병으로 몸이 지쳐 남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던 시절, 민유신(閔有信)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 때 박지원은 열여덟 살이었고 민유신은 73세였다. 그 후 나이 차를 넘어 두 사람은 서로 말동무가 되어 수년간을 지내다가 그가 죽자 그에 대한 일화를 엮어 1757년에 을 지었다. 민옹(閔翁)은 사람을 황충(蝗蟲)같이 여겼고 노자(老子)의 도를 배웠네. 풍자와 골계로써 제멋대로 세상을 조롱하였으나 벽에 써서 스스로 분발한 것은 게으른 이들을 깨우칠 만하네. 이에 민옹전(閔翁傳)을 짓는다. 민옹(閔翁)이란 이는 남양(南陽)1 사람이다. 무신(戊申)년 난리2에 출정하여 그 공으로 첨사(僉使)가 되었는데, 그 뒤로 집으로 물러나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옹(翁)은 어..

우리 선조들 2019.11.20

연암 박지원 12 - 예덕선생전

역시 박지원이 스무 살 때인 1756년에 지은 글이다. 선비가 먹고사는 데에 연연하면 온갖 행실 이지러지네 호화롭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는다해도 그 탐욕 고치지 못하거늘 엄행수(嚴行首)는 똥으로 먹고살았으니 하는 일은 더러울망정 입은 깨끗하다네 이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1을 짓는다. 선귤자(蟬橘子)2에게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벗이 한 사람 있다. 그는 종본탑(宗本塔)3 동쪽에 살면서, 날마다 마을 안의 똥을 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지냈는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엄행수(嚴行首)라 불렀다. ‘행수(行首)’란 막일꾼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칭호요, ‘엄’은 그의 성(姓)이다. 자목(子牧)이 선귤자에게 따져 묻기를,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벗의 도를 들었는데, ‘벗이란 함께 살지 않는 아내요, 핏..

우리 선조들 2019.11.19

연암 박지원 11 - 마장전

은 박지원이 스무 살 때인 1756년에 지은 글이다. 오륜(五倫)1 끝에 벗이 놓인 것은 보다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마치 오행(五行)중의 흙이 네 철에 다 왕성한 것과 같다네2 친(親)과 의(義)와 별(別)과 서(序)에 신(信)아니면 어찌하리3 상도(常道)가 정상적이지 못하면 벗이 이를 시정하나니 그러기에 맨 뒤에 있어 이들을 후방에서 통제하는 것이라 세상 피해 떠돌면서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논하는데 그들의 얼굴이 비치어 보이는 듯하네. 이에 마장전(馬駔傳)4을 짓는다. 말 거간꾼이나 집주릅5이 손뼉을 치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것6이나, 관중(管仲)과 소진(蘇秦)이 닭, 개, 말, 소의 피를 바르고 맹세했던 일7은 신뢰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어렴풋이 헤어지잔 말만 들어도 가락지를 벗어던지고 수..

우리 선조들 2019.11.18

연암 박지원 10 -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은 박지원이 쓴 아홉 편의 전(傳)이 실려 있는 한문 단편소설집이다. 『연암집』 8권 별집(別集)에 수록되어 있는데, 맨 앞에 자서(自序)가 있고 이어서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양반전(兩班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의 순서로 실려 있다. 이 중 역학대도전과 봉산학자전은 유실되어 목록만 있고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 아들 박종채는 「방경각외전」에 대하여 「과정록」에 이렇게 적었다. 세상의 벗 사귐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좇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세태가 꼴불견이었는데,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이런 세태를 미워하셨다. 그래서 아홉 편의 ..

우리 선조들 2019.11.17

연암 박지원 9 - 글짓기

아버지는 금강산을 유람하실 때 라는 시를 한 수 지으셨다. 판서 홍상한(洪象漢)1이 아들 집에서 그 시를 보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도 이런 필력이 있었던가? 이는 거저 읽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중국 붓 크고 작은 것 2백 개를 문객(門客)으로 하여금 갖다 주게 하여 정중한 뜻을 표하였다. 「과정록」 라는 시는 ≪연암집≫에 실려 있지만 ≪열하일기≫에도 실려 있다. 연행 길에 동행들이 청돈대(靑墩臺)에 해 뜨는 구경을 가자고 청해왔지만 박지원은 조용히 잠을 자기 위해 사양하였다고 적었다. 그리고는 예전 총석정에서 해돋이 구경을 하고 지은 시라며 이 시를 실었다. 박지원 자신도 꽤 잘 지은 시라 자부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7언 70구(句)로 된 이 한시(漢詩)는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

우리 선조들 2019.11.14

연암 박지원 8 - 의청소통소(擬請䟽通䟽)

아버지께서 세상과 어긋나자 사람들 또한 발길을 뚝 끊었는데, 아버지는 상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 세 검서(檢書)1는 지난날의 제자로서 변함없이 아버지를 흠모하였다. 세 사람은 품성이 착하고 지혜와 식견이 있었으며, 남이 잘 되고 못 되고에 따라 요리조리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한 가지 방대한 책을 엮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계셨는데, 세 사람이 그 해박한 지식과 견문으로 전고(典故)를 대고 변증(辨證)해주었으므로 아버지는 그들을 늘 아끼고 사랑하셨다. 이들의 벗들로 문학에 취미가 있는 서상수, 이희경, 이희명, 이공무, 정수, 김용행 등 여러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찾아와 아버지를 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다시 아버지가 아무나 사귄다고 막 비방해댔다. (「과정..

우리 선조들 2019.11.10

연암 박지원 7 - 벗 홍대용

아들 박종채가 「과정록」에 기록한 글들을 보면 박지원의 사람 사귐이 마냥 털털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말과 의론이 엄정하셨다. 겉으로만 근엄하고 속마음은 그렇지 못한 자나 권력의 부침(浮沈)에 따라 아첨하는 자들을 보면 참지 못하셨으니, 이 때문에 평생 남의 노여움을 사고 비방을 받는 일이 아주 많았다. 외삼촌 지계공(이재성)이 쓴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가장 참지 못한 일은 위선적인 무리와 상대하는 일 그래서 소인배와 썩은 선비들이 늘 원망하고 비방했었지. 라고 하였으니 , 가히 아버지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할 만하다. '위선적인 무리’로 번역된 글의 원문은 ‘향원(鄕愿)’이다. 향원(鄕愿)은 시세에 영합하면서도 점잖고 성실한듯이 행동하여 순박한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부류..

우리 선조들 2019.11.09

연암 박지원 6 - 벗 유언호

박지원을 연암골로 피신하게 만든 유언호는 나이가 박지원보다 7살이나 위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벗으로 지냈고 그 친분은 꽤 오래되고 깊었다. 유언호는 정조에게 박지원을 가리켜 ‘벼슬하기 전에 사귄 벗’이라고 했는데 유언호가 과거에 급제한 것이 32세 때인 1761년이니 박지원으로서는 25세 전부터 유언호와 알고 지낸 사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1765년에는 박지원과 유언호가 함께 금강산 유람을 하기도 하였다. 유언호는 박지원을 연암골로 보내고 나서 안심이 안 되었는지 곧 그를 뒤쫓아 왔다. 자원하여 개성유수 (開城留守)로 발령받은 것이다. 이 내용이 「과정록」에 있는데 박종채는 개성유수를 외직(外職)이라고 하였지만 개성유수는 종2품의 경관직(京官職), 즉 내직(內職)이다. 이에 유공(兪公)은 외직을 구..

우리 선조들 2019.11.07

연암 박지원 4 - 문체에 대한 생각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에는 답안지를 작성하는데 쓰는 문체와 요령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박지원도 친구들과 어울려 과거시험의 글쓰기를 익혔다고 했다. 박지원의 처남인 이재성이 고금의 과체(科體)1를 모아 「소단적치(騷壇赤幟)」2란 책을 지었는데 박지원이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이란 글로, 인(引)은 서문(序文)의 의미다. 글을 잘 짓는 자는 아마 병법(兵法)도 잘 알 것이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이란 적국(敵國)이요, 글자를 묶어서 구(句)를 만들고 구를 모아서 장(章)을 이루는 것은 대오를 이루어 행군하는 것과 같다. 운(韻)에 맞추어 읊고 멋진 표현으로써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는 것과 같으며, 앞뒤의 조응(照應)3이란 봉화를 올리는 것이요, 비유란 기습..

우리 선조들 2019.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