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163

선비는 의당 죽어야 한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皇天)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황현(黃玹, 1855 ~ 1910)이란 선비가 대한제국 말에 자결에 앞서 쓴 ‘자식들에게 남기는 글’이라는 유서이다. 매천(梅泉) 황현은 철종 때인 1855년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 중에는 세종대왕 때의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가 있었지만, 인조정변이후로는 가문이 몰락하여 그가..

우리 선조들 2021.01.23

한말 보수주의자 최익현(崔益鉉)

선조 때의 조헌만큼이나 격렬하고 열정적인 인물이 조선말에도 있었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 ~ 1907)이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최익현은 종9품인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典籍),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이조정랑, 예조좌랑을 거쳤다. 그리고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친 1868년에 정4품인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최익현은 즉시 자신의 임무에 따라 를 올렸다. 그는 이 상소를 통하여 경복궁 중건 등의 토목 역사를 중지하고, 공사 자금을 위해 세금 걷는 것을 그치며, 상평통보 대신 발행되었던 당백전(當百錢)을 혁파하고, 사대문세(四大門稅)를 금지하는 네 가지를 주장하였다. 당시는 흥선대원군이 나이어린 ..

우리 선조들 2021.01.21

토정(土亭) 이지함

《조선왕조실록》에는 조헌이 평생에 세 인물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이 이 세상에서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이 셋이 있는데 이지함·성혼·이이입니다. 세 사람이 성취한 학문은 다른 점이 있지만 깨끗한 마음과 욕심을 적게 가지는 자세, 그리고 뛰어난 행실이 세상의 모범이 되는 것은 똑같은데, 신이 일찍이 그들의 만에 하나라도 닮아보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제독(提督)의 임무를 맡고 나서 알량한 재주와 견문을 헤아리지 않고 세 사람이 신에게 가르쳐 준 것으로 어진 선비들을 깨우치려 하였으나...】(《선조수정실록》 선조 19년(1586년) 10월 1일 3번째 기사) 조헌이 스승으로 꼽은 세 사람 중 이이와 성혼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학자들인 반면, 이지함은 「토정비결」이 먼저 떠올라 의아한 ..

우리 선조들 2020.08.18

조헌 2 - 칠백의총

병자호란 때의 대표적 척화파였던 김상헌(金尙憲, 1570 ~ 1652)이 쓴 조헌의 신도비명에는 조헌의 어린 시절과 성품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성이 효순(孝順)하고 태도가 순진(純眞)하고 확고하였다. 집안이 본래 농사에 종사하였는데 또래 아이들을 따라 놀이를 즐기지 않았고 일체의 행동을 부친의 명에 따라 부지런히 일하였다. 평소에는 독서에 열중하여 눈에 신외(身外)의 일을 아랑곳하지 않았으므로, 동배(同輩)들이 깍듯이 섬기고 감히 함부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겨우 강보(襁褓)를 면하게 되고부터 벌써 부모를 섬기는 예절을 알았으므로 부모가 명하시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대답하였고 매사를 공경스럽게 받들었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서 계모(繼母)에게 실애(失愛)하였으나 마침내 계모의 마음을 기쁘게..

우리 선조들 2020.08.13

조헌 1 - 조선의 상소왕

‘말을 함부로 한다’는 표현도 있고 ‘말을 가려서 한다’는 표현도 있다. 이것은 말을 듣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예의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처세술이기도 하다. ‘말을 가려서 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으려는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말을 함부로 하여’ 평생 고난을 자초한 인물이 있다. 선조 때의 문신 조헌(趙憲, 1544 ~ 1592)이다. 그는 왕에게 올리는 상소를 통하여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왕의 잘못을 지적하기를 서슴지 않았는데 그의 상소는 늘 ‘말이 지나치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과격하였다. 그렇다고 요즘의 일부 정치인들처럼 어그로를 끌려고 아무 얘기나 던져놓고 보는 막말을 한 것은 아니다. 틀린 일과 옳은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달..

우리 선조들 2020.08.12

정조 16 - 친민(親民)·치국(治國)

【나라의 안위는 민심에 달려 있다. 백성이 편안하면 윗사람을 가까이 하고 수고로우면 윗사람을 원망하는 법이다. 방백(方伯)이나 수령(守令)된 자들이 '백성을 어지럽히지 않는다(不擾民)'는 세 글자를 염두에 둔다면 기근에 흉년이 든 해라도 그 마음이 결코 흩어질 리가 없으니, 이와 같으면 태평의 기반이 되지 않는 날이 없을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백성을 사랑하는 데서 벗어나지 않는데 한번 당론(黨論)이 갈린 뒤로 조정에서는 오직 언의(言議)의 가부(可否)만을 일로 간주하고 백성의 근심과 나라의 계책은 우선 한쪽에 놓아두고 있으니, 이 어찌 나라를 위해 깊이 생각하는 도리겠는가. 사대부가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기면서 백성과 만물을 사랑하는 데 뜻을 두었다면 이와 같아서는 안 될 것이다.】 ▶언의(..

우리 선조들 2020.07.09

정조 15 - 지(知)·행(行)·지(志)

이형록(李亨祿)은 책가도로 유명했던 궁중화원이었다. 그의 책가도는 구도가 짜임새 있고, 색채가 중후하며, 표현이 매우 섬세한 것이 특징이라 한다. 이형록은 57세인 1864년에 이응록(李膺祿), 64세인 1871년에 이택균(李宅均)으로 두 번 개명하였다. 책가도(冊架圖)는 우리말로 ‘책거리(冊巨里)’라고도 한다. 책거리에는 책을 놓은 선반인 책가가 있는 그림뿐만 아니라 책가가 없이 책을 비롯한 기물들을 나열한 그림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책거리가 책가도보다는 상위 개념이다. 책거리(冊巨里)는 일거리, 이야깃거리처럼 책을 비롯한 문방사우 등 사랑방의 여러 물품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책과 문방사우(文房四友) 등을 주제로 한 책거리 그림은 학문에 대한 열망에서부터 인생의 행복과 장수까지 상징하는 길상화(吉祥畵..

우리 선조들 2020.07.08

정조 14 - 함양공부

【함양공부(涵養工夫)가 가장 어렵다. 나는 함양 공부가 부족해서 언제나 느닷없이 화를 내는 병통이 많다.】 ▶함양공부(涵養工夫) : 사물과 맞닥치기 전, 희노애락 감정이 발동하지 않은 상태인 평상시의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 주자학에서는 거경공부(居敬工夫)를 가리키는데, 거경(居敬)은 내적(內的) 수양법으로서 항상 몸과 마음을 삼가서 바르게 가지는 것을 의미. 【함양(涵養)은 바로 휴식을 취할 때의 공부이고 성찰(省察)은 바로 행동할 때의 공부이다. 그러나 본체가 확립된 뒤에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므로 학자의 공부는 당연히 함양을 우선으로 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함양만 중요한 줄 알고 성찰에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러기에 덕성을 존중하고 학문을 하는 것 중 어느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된다.】 【사람이 ..

우리 선조들 2020.07.07

정조 13 - 일득록(日得錄)

정조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홍재전서(弘齋全書)』는 180권 100책 10갑에 달하는 정조의 문집이다. ‘홍재(弘齋)’는 정조가 세손시절 자신의 거처에 붙였던 이름으로 「논어」태백(泰伯)편에 있는 “선비는 뜻이 크고 의지가 강인해야 하니,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라는 공자의 말씀에서 ‘홍(弘)’자의 뜻을 얻어 가져온 것이라 한다. 정조는 ‘홍재’를 자신의 호로도 썼다. 『홍재전서』는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국왕 재위기간 동안 지었던 여러 시문(詩文), 윤음(綸音), 교지와 편저 등을 모아 60권 60책으로 편집되었다가, 이후 몇 차례의 편찬을 거치면서 자료가 추가되어 활자본에서는 100책으로 늘어났다. 이 『홍재전서』중 권161∼..

우리 선조들 2020.07.06

정조 12 - 초대검서관

이덕무는 1741년생, 박제가는 1750년생, 유득공은 1748년생, 서이수는 1749년생으로, 이덕무를 제외하면 나머지 세 사람은 나이가 비슷비슷하였다. 이덕무는 40이 다 되어가는 39세에 검서관이 되었고 세 사람은 30전후였다. 누가 어떤 경로를 거쳐 이들을 추천하였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은 검서관에 발탁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문재(文才)로 세간에서는 꽤 이름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 이들 세 사람과 이서구를 포함한 4인이 함께「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이덕무의 친구이자 유득공의 숙부였던 유련(柳璉)이 같은 해 중국을 방문하면서 이 시집을 가져가 청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자 학자인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에게 ..

우리 선조들 2020.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