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생활 18

사과 공부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간간이 친구네 과수원에 불려 다닌 지가 벌써 4년째다. 그런데도 아직 사과 종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관심이 없어서일 것이다. 비교적 이름이 익숙한 아오리나 부사도 먹을 때 색깔로 어림짐작하는 수준이라, 과수원에 열린 사과를 보고 품종을 알아낼 실력이 없다. 그래서 아오리를 따야 하는데 아직 익지도 않은 다른 품종의 사과를 따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4년이나 드나들면서도 여전히 친구에게 물어봐야 하는 처지가 민망해서, 올해는 꼭 잘 기억하리라 다짐을 하며 열심히 머릿속에 저장중이지만, 겨우내 잊고 있던 나무들을 내년에 다시 본다고 해서 제대로 알아볼 것 같지는 않다. 친구네 과수원엔 사과 품종이 많다. 아오리나 홍로, 부사와 같이 익숙한 이름부터 썸머킹, 시나노스위..

의미 없는 요일

시골에 내려오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 한편에 이런 그림을 그리면서 내려왔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사는 즐거움과 그 속에서의 한가하고 여유로운 삶. 때때로 먼 도시의 친구가 찾아와 함께 즐기는 꿈도 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사를 짓기 시작하는 때부터 그 꿈들은 헛된 망상이 된다. 직장에서는 업무마다 완료라는 개념이 있지만 농사는 수확할 때까지 ‘끝’이라는 개념이 없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농사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작물과 농법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하루 더 돌보고 안 한 것의 차이는 수확 때 나타나고 그 사실을 경험 있는 농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하루도 마음 놓고 쉴 수가 없다. 매일 같이 일을 해도 늘 못한 일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농사인 듯하다. 무슨 날이라고..

친구네 과수원

작년에는 사과나무에 꽃이 많이 피고 열매도 많이 달려 풍년을 예상했는데 장마철 오랜 비로 사과가 제대로 익질 못했다. 수확한 사과도 제 맛이 나지 않았다. 농사를 망친 해다. 금년에는 시작부터 꽃이 적게 열리더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꽃이 피는 시기에 냉해까지 입어 그야말로 사과가 듬성듬성 달렸다. 농촌생활 10여년에 이미 농부가 돼버린 친구는 그것만이라도 잘 자라기를 바라며 푹푹 찌는 날씨에도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농촌에 워낙 일손이 모자라다보니 또 불려갔다. 시나노스위트라는 품종의 사과다. 아오리와 같은 계통의 품종이라 하는데, 8월 하순부터 수확하는 아오리는 조생종이고 이 품종은 조금 늦게 9월 초에 수확하는 중생종이다. 관심이 별로 없어서 3년을 과수원에 드나들면서도 이제야 겨우 머릿속에 정리..

시골의 동양화

시골의 먼 산 골짜기에 구름이 일고 흩어지는 광경을 보게 되면 불현듯 동양화가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 옛 산수화의 화폭에 왜 그토록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구름과 연기의 자리를 넓게 할애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산 계곡을 따라 안개가 피어오르는 광경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마치 그곳에 신선이라도 살고 있을 것 같은 신비로움까지 더해진다. 혹시라도 산수화를 그릴 능력과 기회가 있다면, 산에 걸친 안개와 구름은 뺄 수 없을 것 같다.

봄의 다양한 초록 빛깔

초록동색(草綠同色). 처지가 같은 사람들끼리 한 편이 되어 어울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이 말의 원래 의미는 풀빛과 녹색(綠色)은 같은 빛깔이란 뜻이다. 잎이 한창 무성한 여름에는 짙은 녹색으로 산의 색깔이 거의 같지만, 봄 산은 다르다. 나무마다 처음 내는 나뭇잎 색깔이 달라, 같은 녹색 안에서도 울긋불긋함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을 모두 녹색이라는 한마디로 뭉뚱그리는 것은 너무 무신경한 말 같아 나무들에게 미안하다. 나뭇잎의 서로 다른 색깔 차이를 느끼든 못 느끼든 살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의 희비애락은 또 무엇이 특별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귀룽나무

이름도 생소한 귀룽나무는 시골이라고 해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귀룽나무는 보통 200에서 1,000m 고지의 깊은 산골짜기나 비탈, 계곡가에 주로 자라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무가 있는 곳도 600m 고지다. 자라면 높이가 10 ~ 15m까지 이른다고 한다. 나무가 커지면 가지가 길고 무성하게 나와 아래로 쳐지기 때문에, 햇빛을 잘 받으면 사진처럼 전체적으로 둥그런 모양이 된다. 원래 5월 초에 꽃이 피는데 올해는 4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했다. 흐드러지게 핀다는 표현이 딱이다.

Cherry Blossom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가는 듯하다. 봄도 그렇다. 어느새 왔는가 싶으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가버리고 만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종달새 지저귐은 봄이 오는 소리가 아니라 이미 와버린 봄이 지나가는 소리인 듯하다. 사람들이 한창 봄이 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봄은 이미 저만치 가서 자신이 남긴 뒷모습을 돌아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벚꽃이 지자 체리나무에 꽃이 피었다. 연한 분홍빛을 띠는 벚꽃과 달리 체리 꽃은 흰색이다. “봄날은 가네. 무심히. 꽃잎은 지네. 바람에.“ 봄처럼 상큼하고 아련한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

밤이 오는 시골 풍경

아침에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보면 왜 태극(太極)을 남색과 홍색으로 그렸는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저녁놀의 색 대비는 아침처럼 강렬하지는 않다. 그래도 저녁놀이 만들어내는 하늘 색깔은 황홀하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담은 듯도 하여 엄숙하기도 하다. 나뭇가지 끝에 걸린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면 마음 가득한 온갖 욕심들이 모두 허망해진다. 해가 아침 동쪽에서 떠서 하늘 높이 올랐다 다시 서쪽으로 넘어가는 일을 반복하며, 우리의 삶이 그와 같음을 매일 알려줘도 깨닫지 못함은 욕심에 사로잡힌 어리석음 때문이리라. 황혼처럼 아름다운 색을 내며 인생의 끝자리를 맞는 이는 얼마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