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5

허균 19 - 한정록(閑情錄) 한적(閒適) 2

● 낙성(洛城) 안팎 60~70리 사이의 모든 도관(道觀)과 불사(佛寺)와 고적지(古跡址)와 별장 가운데 천석(泉石)이나 화죽(花竹)이 있는 곳은 놀아보지 않은 데가 없고, 좋은 술과 거문고가 있는 인가(人家)는 들러보지 않은 데가 없고, 도서(圖書)와 가무(歌舞)가 있는 곳은 구경하지 않은 데가 없다. 낙천(洛川)의 수재(守宰)로부터 포의가(布衣家)에 이르기까지 연유(宴遊 :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놂)할 일로 부르는 자가 있으면 또한 때때로 찾아갔다. 매양 좋은 계절, 좋은 경치나 혹은 눈 내린 아침, 달뜨는 저녁에 호사자(好事者)들이 서로 찾아올 때면, 반드시 그들을 위해 먼저 술항아리를 꺼내 마시고 다음엔 시 상자[詩篋]를 열어 놓고 읊으며, 술이 이미 거나해지면 이내 거문고를 가져다가 궁성(宮聲)..

우리 선조들 2021.09.02

허균 17 - 한정록(閑情錄) 고일(高逸) 2

● 양적(陽翟)의 신군(辛君)은 선배들 가운데 어진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의 덕으로 벼슬을 얻었으나 은거(隱居)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는 소자용(蘇子容) 승상(丞相)의 처남(妻男)이고 이정(二程 : 정호(程顥)ㆍ정이(程頤)) 선생의 외숙(外叔)이다. 당시 소 승상이 한창 성할 때여서 자주 그를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천(伊川 : 정이(程頤)) 선생이 원풍(元豐) 연간에 해마다 낙중(洛中)으로부터 와서 영창(潁昌)에 있는 한지국(韓持國 : 지국은 한유(韓維)의 자)을 방문했는데, 양적을 지날 때는 반드시 신군의 집에서 10여 일씩 머무르곤 하였다. 그의 집에는 7칸짜리 대옥(大屋)이 있었는데, 집 뒤에는 온통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피어 있어 평생토록 자락(自樂)하였다. 《와유록(臥遊錄)》 ●..

우리 선조들 2021.08.18

허균 15 - 한정록(閑情錄) 은둔(隱遁) 3

● 진도남(陳圖南 : 도남은 송(宋) 진박(陳搏)의 자)은 무당산(武當山)에 들어가서 20년 동안이나 벽곡(辟穀) 연기(鍊氣)하고, 뒤에는 화산(華山) 운대관(雲臺觀)에 살았다. 태평흥국(太平興國 : 송 태종(宋太宗)의 연호) 때 진박이 두 번 입조(入朝)하였는데, 제(帝)가 매우 후대(厚待)하였다. 이때 다시 와서 제를 알현하니 제가 재신(宰臣)에게 이르기를, “진박은 독선기신(獨善其身)하고 세리(勢利)를 구하지 않으니, 이른바 방외지사(方外之士)이다.”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를 중서성(中書省)까지 전송하였다. 재상(宰相) 송기(宋琪) 등이 조용한 여가에 묻기를, “선생은 현묵(玄黙 : 노자의 도) 수양(修養)의 방법을 터득하였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하니, 진박이, “나는..

우리 선조들 2021.08.11

허균 14 - 한정록(閑情錄) 은둔(隱遁) 2

● 사마덕조(司馬德操 : 덕조는 후한 사마휘(司馬徽)의 자)는 인륜(人倫)이 있는 사람이었다. 형주(荊州)에 있을 때 유표(劉表)가 혼암(昏暗)하여 반드시 착한 사람들을 해치게 될 것을 알아차리고서, 입을 다물고 다시는 논평을 하지 않았다. 이때 인물(人物)들을 놓고 사마덕조에게 묻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초부터 인물들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번번이 좋다고만 말하므로, 그 아내가 간(諫)하기를,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바를 질문하면, 당신이 마땅히 분별해서 논해 주어야 하는데 모두 좋다고만 하니, 어찌 사람들이 당신에게 물어보게 된 본의이겠습니까?” 하니, 사마덕조가, “당신의 말 역시 좋은 말이오.” 하였다. ● 남군(南郡) 방사원(龐士元 : 사원은 촉한(蜀漢) 방통(龐統)의 자)이 사마덕조가 영천(穎川)에..

우리 선조들 2021.08.10

허균 13 - 한정록(閑情錄) 은둔(隱遁) 1

● 소부(巢父)는 요(堯) 시절의 은자(隱者)인데, 산 속에 살며 세속의 이욕(利慾)을 도모하지 않았다. 늙자 나무 위에 집을 만들어 거기에서 자므로 당시 사람들이 ‘소부’라고 했다. 요(堯)가 천하(天下)를 허유(許由)에게 양여(讓與)하려 할 때, 허유가 소부에게 가서 그 말을 하자 소부가, “자네는 어찌하여 자네의 형체를 숨기지 않고 자네의 빛깔을 감추지 않는가?” 하며, 그의 가슴을 밀쳐 버리므로 허유가 서글픔을 주체하지 못하여, 청랭(淸冷)한 물가를 지나다가 귀를 씻고 눈을 씻으며 말하기를, “전일에 탐욕스러운 말을 들음으로써 나의 벗을 저버리게 되었도다.” 하고, 드디어 떠나 일생을 마치도록 서로 만나지 않았다. 《고사전(高士傳)》 ● 허유는 사람됨이 의리를 지키고 행신이 발라, 부정한 자리에는..

우리 선조들 2021.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