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6

겸재 정선 입암도(立巖圖)

우뚝 선 바위. 그림에 정선의 관지는 오른 쪽에 찍힌 겸재(謙齋)라는 도장뿐인데, 위치로 보면 정선이 그림을 그리고 찍은 것이 아니라 나중에 누군가가 후관(後款)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 적은 제시(題詩)의 내용은 이렇다. 屹立風濤百丈奇 바람과 파도 속 우뚝 솟은 백장 높이 기이한데 堂堂柱石見於斯 당당한 돌기둥 바로 이곳에서 보는 도다. 今時若有憂天者 지금 만일 하늘이 무너질까 근심하는 이 있다면, 早晩扶傾舍厼誰 조만간에 떠받칠 이 너 아니면 누구인가! 제시 끝에는 입암(立巖)이라 적었다. ‘입암(立巖)’을 우리말로 표현 하면 ‘선바위’인데, 이런 ‘선바위’라는 명칭은 우리나라 전국에 여러 곳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정선의 생애 기간 중 여행한 곳과 남겨진 여러 작품을 통해 이것을 외금강 동쪽 동해..

우리 옛 그림 2021.08.16

여름에 어울리는 정선 그림

당대부터 이름이 높았던 정선의 그림은 전하는 작품 수도 많지만 전하는 형태도 다양하다. 13개의 화첩 외에도 개별 작품으로 전하는 것도 다수이고, 또 수장가들이 모은 여러 화가들의 작품첩 속에 들어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심사정,정선,최북 합벽첩(合壁帖)」도 그런 경우의 하나다. 이 첩에는 정선의 그림 6점이 들어있는데 그 가운데 더위를 피해 물과 산을 찾아 떠나는 지금처럼 더운 여름에 보면 산과 물의 청량한 기운을 느낄 법한 그림들이 몇 점 있다. 워낙 주목받지 못한 그림들이라 그림 제목도 없지만, 선인들이 즐겼다는 와유(臥遊)를 하기에 부족함은 없어 보인다. 아래 그림들은 제목도 없이 그저 '정선필산수도(鄭敾筆山水圖)'로 전해지는 그림들이다.

우리 옛 그림 2021.07.28

정선 경교명승첩 1

겸재 정선(鄭歚) 하면, 금강산이 떠오를 정도로 정선은 금강산 그림을 많이 그렸고 또 뛰어난 작품들도 남겼다. 그런데 금강산 말고도 정선이 많이 그린 그림 소재가 있다. 한양과 한양 근교의 풍경이다. 정선만큼 한양과 한양 주변 풍경을 많이 그린 화가도 없을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경교명승첩」이다.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은 한양 근교와 한강변의 이름난 경치와 명소를 진경산수화로 그린 그림첩이다. 여기에 몇 점의 인물화도 포함되어 있다. 1741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여 정선이 사망한 1759년경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교명승첩」은 원래는 1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1802년 2권으로 다시 엮어졌다고 한다. 상첩(上帖)에는 친구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 아래..

우리 옛 그림 2019.07.12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 3

정선의 금강산 화첩 중 「신묘년 풍악도첩」은 정선이 36세이던 1711년에, 「해악전신첩」은 그로부터 다시 36년 뒤인 1747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알려진 대로 1712년 8월에도 정선은 이병연의 초청으로 이병연의 아버지인 이속, 동생 이경성 등과 금강산을 여행한 후 30여 폭의 《해악첩》을 만들어 이병연에게 주었지만 그 화첩은 전하지 않는다. 1747년 정선은 그 해에 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에 상심하다가 세 번째 금강산 여행을 하고 지금 전하는「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남겼다. 「해악전신첩」은 1712년 화첩의 재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림은 21점으로 줄었지만 이병연은 이 화첩에 자신이 1712년의 화첩에 썼던 제화시를 다시 썼고, 이미 고인이 된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시..

우리 옛 그림 2019.01.24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 2

정선이 금강산 내산을 그린 그림은 말고도 전하는 그림이 여럿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신묘년 풍악도첩」에 들어있는 이다. 알려진 대로 1711년 첫 번째 금강산 여행 때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는 내금강의 주요 봉우리와 사찰의 이름들이 적혀 있다.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 그렇다. 은 그림의 규모도 크거니와 단풍에 물든 가을 금강산의 형상과 정취를 진채를 구사하여 화사하면서도 장엄하게 그려냈다. 공을 굉장히 많이 들인 그림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그림에다 명승고적의 이름을 꼼꼼히 적어놓았다. 진경산수화는 지도처럼 보이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는데 정선이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왜 그랬을까?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추정했다.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그리면서 그림 속..

우리 옛 그림 2019.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