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기 40

나이 값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우리 사회에서 쉽게 반박될 수 없는 사회적 가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말을 앞세우는 사람도 드물고 그런 가치는 어디에서도 동의를 얻기 힘들다. 이제 나이는 더 이상 이 사회에서 대우나 존경 같은 예우를 받는 조건이 아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 흔한 말로 젊은 세대들의 생각이 변했기 때문일까? 그들이 진부한 과거의 통념을 거부했기 때문일까? 나이 먹은 자들이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라 생각한다. 나이만 먹었지 존경받을 구석이 없는 까닭 때문이다. 노마지지(老馬之智)란 고사성어가 있다. 춘추시대에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러 갔다가 산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늙은 말[老馬]의 도움으로 길을 찾아 무사히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

춘래불사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이 몇 주째 계속되고 있다. 독일 출생으로 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었던 헤르만 헤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의 유일한 효용은 바로 사랑은 증오보다, 이해는 분노보다, 평화는 전쟁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뿐이다.” 전쟁으로 고통당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크라이나 소식보다 우리나라 소식에 더 불안하다. 새로 뽑힌 대통령이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한다고 한다. 안보를 의식한 쇼라고 해도 너무 유치하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모르니까 저런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하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이 떠오른다. “잘못된 지식을 경계하라. 그것은 무지보다 위험하다.” 대통령이 되면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줄 ..

시골의 크리스마스

예전의 12월 길거리는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로 가득 찼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와 아무 상관이 없고 크리스마스에 특별한 계획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공연히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턴가 저작권 문제가 거론되더니 길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길거리에 넘쳐나던 세모 분위기도 사라졌고, 12월의 거리는 그냥 춥고 차가운 겨울의 일부로 돌아갔다. 도시가 그럴진대 시골은 말할 것도 없다. 크리스마스가 내일 모레지만 시골의 풍경은 평소와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 읍내 로터리에 매년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다는 것은 알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안에 들어앉는 시골에서는 그걸 구경할 기회도 별로 없다. 도시의 교회 크리스마스 장식에도 못 미칠 만큼 소박하지만, 어둠이 가득한 ..

회사후소(繪事後素)

논어 에 나오는 구절이다.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여쭈었다. "‘교묘한 웃음에 보조개여, 아름다운 눈에 또렷한 눈동자여, 소박한 마음으로 화려한 무늬를 만들었구나.' 라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다음이라는 것이다[繪事後素]." 자하가 말하였다. "예(禮)는 나중입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나를 일으키는 자는 너로구나. 비로소 함께 시(詩)를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공자의 말은 ‘소박한 마음의 바탕 없이 눈과 코와 입의 아름다움만으로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은 좋은 바탕을 먼저 기른 뒤에 문식(文飾)을 더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사포서 별제였던 김홍도는 1775년 2월, 영조에게 이런 말을 ..

사과 공부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간간이 친구네 과수원에 불려 다닌 지가 벌써 4년째다. 그런데도 아직 사과 종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관심이 없어서일 것이다. 비교적 이름이 익숙한 아오리나 부사도 먹을 때 색깔로 어림짐작하는 수준이라, 과수원에 열린 사과를 보고 품종을 알아낼 실력이 없다. 그래서 아오리를 따야 하는데 아직 익지도 않은 다른 품종의 사과를 따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4년이나 드나들면서도 여전히 친구에게 물어봐야 하는 처지가 민망해서, 올해는 꼭 잘 기억하리라 다짐을 하며 열심히 머릿속에 저장중이지만, 겨우내 잊고 있던 나무들을 내년에 다시 본다고 해서 제대로 알아볼 것 같지는 않다. 친구네 과수원엔 사과 품종이 많다. 아오리나 홍로, 부사와 같이 익숙한 이름부터 썸머킹, 시나노스위..

허균 21 - 한정록(閑情錄) 퇴휴(退休) 2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퇴휴(退休)는 4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선비가 이 세상에 살면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포부를 갖는 법인데, 어찌 금방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결별하고 오래도록 산림(山林) 속에 은둔할 계획을 하겠는가. 심(心)과 사(事)가 어긋나거나 공적(功迹)과 시대가 맞지 않거나, 아니면 또 만족하고 그칠 바를 알거나 일의 기미(幾微)를 깨닫거나, 또 아니면 몸이 쇠하여 일에 권태롭거나 하면 비로소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자기 허물을 잘 고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4 ‘퇴휴(退休)’로 한다. ● 이강보(李疆父)가 일찍이 육화탑시(六和塔詩)를 지었는데..

우리 선조들 2021.09.08

허균 20 - 한정록(閑情錄) 퇴휴(退休) 1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퇴휴(退休)는 4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선비가 이 세상에 살면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포부를 갖는 법인데, 어찌 금방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결별하고 오래도록 산림(山林) 속에 은둔할 계획을 하겠는가. 심(心)과 사(事)가 어긋나거나 공적(功迹)과 시대가 맞지 않거나, 아니면 또 만족하고 그칠 바를 알거나 일의 기미(幾微)를 깨닫거나, 또 아니면 몸이 쇠하여 일에 권태롭거나 하면 비로소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자기 허물을 잘 고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4 ‘퇴휴(退休)’로 한다. ● 초(楚) 나라 영윤(令尹)인 우구자(虞丘子)가 장왕(莊..

우리 선조들 2021.09.07

파란 마음 하얀 마음

예전 우리나라의 자랑이 ‘높고 푸른 가을하늘’ 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기자들이 방금 공항에 내린 외국인에게 다짜고짜 “한국의 가을하늘이 어떠냐?”고 묻고는 그 외국인의 입 발린 칭찬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싣곤 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Do you know...?" 이니 기자들은 정말 공부도 안 하고 취재준비도 안 하나 보다. 오랫동안 회색 구름과 비만 보다가 간만에 하늘이 개였다. 시골이라도 이런 색의 하늘 보기는 쉽지 않다. 지금은 낯선 이 시리도록 파란 빛깔의 하늘이 어린 시절에는 언제 어디에나 있었다. 밤이면 도시에서도 은하수는 물론 온 하늘을 덮은 수많은 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면 꼭 누군가가 견우직녀 얘기를 꺼냈고 서로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이 별 저별을 손가락질하며 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