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록 14

허균 27 - 한정록(閑情錄) 숭검(崇儉) 1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글이다. 숭검(崇儉)은 7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퇴거(退去)한 사람은 맛 좋은 음식이나 화려한 의복을 취해서는 안 되고 오직 검소해야 돈도 절약이 되고 복(福)도 기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7 ‘숭검(崇儉)’으로 한다.” ● 안자(晏子)가 제 나라 재상으로 한 벌의 여우 갖옷[狐裘]을 30년 동안이나 입었다. 《권계총서(勸誡叢書)》 ● 손숙오(孫叔敖)는 초 나라 영윤(令尹)이 되어 사슴 갖옷[鹿裘]으로 조회하였으며 그가 살고 있던 가옥은 띠로 지붕을 덮은, 비바람을 가릴 수 없을 정도의 집이었다. 《권계총서》 ● 오고대부(五羖大夫 : 백리해(百里奚))는 피곤하여도..

우리 선조들 2021.09.29

허균 26 - 한정록(閑情錄) 아치(雅致) 2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글이다. 아치(雅致)는 6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한정(閑情)을 좋아하는 선비의 뜻은 자연히 달라서, 속인(俗人)은 비웃고 고인(高人)은 찬탄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6 ‘아치(雅致)’로 한다.” ● 유여려(兪汝礪)가 말하였다. “부귀(富貴)를 누리는 선비는 강산(江山)이나 송죽(松竹)의 즐거움에 뜻을 두지 못하고, 산천(山川)ㆍ괴기(怪奇)ㆍ연운(煙雲)ㆍ죽석(竹石)ㆍ시주(詩酒)ㆍ풍월(風月)은 오직 세상을 만나지 못한 사람만이 비로소 그 즐거움을 독차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 사이에 있는 웅위(雄偉)하고 범상치 않는 곳은 하늘이 어진 사람에게 주어 그들의 우울한 생각을 풀..

우리 선조들 2021.09.23

허균 25 - 한정록(閑情錄) 아치(雅致) 1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아치(雅致)는 6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한정(閑情)을 좋아하는 선비의 뜻은 자연히 달라서, 속인(俗人)은 비웃고 고인(高人)은 찬탄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6 ‘아치(雅致)’로 한다.” ● 곽임종(郭林宗 : 임종은 후한(後漢) 곽태(郭泰)의 자)은 길을 가다 여관(旅館)에 묵게 되면 몸소 청소를 하고 날이 밝으면 떠났다. 오는 사람들이 보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곳은 곽유도(郭有道 : 유도(有道)는 곧 유도지사(有道之士)의 뜻)가 어제 자고 간 곳일 것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유도지사(有道之士) : 도덕(道德)을 갖추고 있는 사람 ● 손자형(孫子荊 :..

우리 선조들 2021.09.22

허균 24 - 한정록(閑情錄) 유흥(遊興) 2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유흥(遊興)은 5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산천(山川)의 경치를 구경하여 정신을 휴식시키는 것은 한거(閑居) 중의 하나의 큰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5 ‘유흥(遊興)’으로 한다.” ● 왕면(王冕)이 큰 눈이 내린 뒤 맨발로 잠악봉(潛嶽峯)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외쳤다. “온 천지가 모두 백옥(白玉)처럼 변해서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해맑게 만드는구나. 이대로 신선이 되어 떠나가고만 싶다.” 《옥호빙(玉壺氷)》 ● 왕인(王寅)은 불교에 대한 얘기를 즐겨 일찍이 불제자(佛弟子)의 예(禮)를 행한 적이 있었다. 고봉선사(高峯禪師)를 만나 예를 올리고 꿇어앉아..

우리 선조들 2021.09.16

허균 23 - 한정록(閑情錄) 유흥(遊興) 1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유흥(遊興)은 5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산천(山川)의 경치를 구경하여 정신을 휴식시키는 것은 한거(閑居) 중의 하나의 큰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5 ‘유흥(遊興)’으로 한다.” ● 순 중랑(荀中郞 순선(荀羨))이 경구(京口)의 북고산(北固山)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비록 삼산(三山 : 봉래(蓬萊)ㆍ방장(方丈)ㆍ영주(瀛洲))은 못 보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속세(俗世)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일게 하였다. 만약 진시황(秦始皇)이나 한무제(漢武帝)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옷을 벗고 바다로 뛰어들려 했을 것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우리 선조들 2021.09.15

허균 22 - 한정록(閑情錄) 퇴휴(退休) 3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퇴휴(退休)는 4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선비가 이 세상에 살면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포부를 갖는 법인데, 어찌 금방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결별하고 오래도록 산림(山林) 속에 은둔할 계획을 하겠는가. 심(心)과 사(事)가 어긋나거나 공적(功迹)과 시대가 맞지 않거나, 아니면 또 만족하고 그칠 바를 알거나 일의 기미(幾微)를 깨닫거나, 또 아니면 몸이 쇠하여 일에 권태롭거나 하면 비로소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자기 허물을 잘 고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4 ‘퇴휴(退休)’로 한다. ● 사대부(士大夫)가 산림(山林)에 은거함에 있어 참으로 ..

우리 선조들 2021.09.11

허균 21 - 한정록(閑情錄) 퇴휴(退休) 2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퇴휴(退休)는 4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선비가 이 세상에 살면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포부를 갖는 법인데, 어찌 금방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결별하고 오래도록 산림(山林) 속에 은둔할 계획을 하겠는가. 심(心)과 사(事)가 어긋나거나 공적(功迹)과 시대가 맞지 않거나, 아니면 또 만족하고 그칠 바를 알거나 일의 기미(幾微)를 깨닫거나, 또 아니면 몸이 쇠하여 일에 권태롭거나 하면 비로소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자기 허물을 잘 고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4 ‘퇴휴(退休)’로 한다. ● 이강보(李疆父)가 일찍이 육화탑시(六和塔詩)를 지었는데..

우리 선조들 2021.09.08

허균 19 - 한정록(閑情錄) 한적(閒適) 2

● 낙성(洛城) 안팎 60~70리 사이의 모든 도관(道觀)과 불사(佛寺)와 고적지(古跡址)와 별장 가운데 천석(泉石)이나 화죽(花竹)이 있는 곳은 놀아보지 않은 데가 없고, 좋은 술과 거문고가 있는 인가(人家)는 들러보지 않은 데가 없고, 도서(圖書)와 가무(歌舞)가 있는 곳은 구경하지 않은 데가 없다. 낙천(洛川)의 수재(守宰)로부터 포의가(布衣家)에 이르기까지 연유(宴遊 :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놂)할 일로 부르는 자가 있으면 또한 때때로 찾아갔다. 매양 좋은 계절, 좋은 경치나 혹은 눈 내린 아침, 달뜨는 저녁에 호사자(好事者)들이 서로 찾아올 때면, 반드시 그들을 위해 먼저 술항아리를 꺼내 마시고 다음엔 시 상자[詩篋]를 열어 놓고 읊으며, 술이 이미 거나해지면 이내 거문고를 가져다가 궁성(宮聲)..

우리 선조들 2021.09.02

허균 18 - 한정록(閑情錄) 한적(閒適) 1

● ‘한(閒)’ 자의 자의(字義)에 대하여 어떤 이는 달[月]이 대문(大門) 안에 들이비치는 것이 바로 한(閒) 자라고 한다. 옛날에는 모두 문(門) 안에 일(日)을 넣은 간(間) 자와 같이 보아 왔지만, 그 음(音)만은 달리 쓰이는 경우가 있다. 아무튼 한가로움이란 저마다 얻기 어려운 것이다. 이를테면 두목지(杜牧之)의 시(詩)에, 不是閒人閒不得 한인(閒人)이 아니고야 한가로움을 얻을 수 없으니 願爲閒客此間行 이 몸이 한객(閒客) 되어 이 속에 놀고파라 하였다. 이에 오흥(吳興 :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포성현(浦城縣))에 한정(閒亭)을 건립하였다. 나는 본시 한가로움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한가로운 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여 시(詩)를 짓고 술[酒]을 마련하거나 꽃나무를 가꾸고 새[禽]들을 길들이는..

우리 선조들 2021.08.25

허균 17 - 한정록(閑情錄) 고일(高逸) 2

● 양적(陽翟)의 신군(辛君)은 선배들 가운데 어진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의 덕으로 벼슬을 얻었으나 은거(隱居)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는 소자용(蘇子容) 승상(丞相)의 처남(妻男)이고 이정(二程 : 정호(程顥)ㆍ정이(程頤)) 선생의 외숙(外叔)이다. 당시 소 승상이 한창 성할 때여서 자주 그를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천(伊川 : 정이(程頤)) 선생이 원풍(元豐) 연간에 해마다 낙중(洛中)으로부터 와서 영창(潁昌)에 있는 한지국(韓持國 : 지국은 한유(韓維)의 자)을 방문했는데, 양적을 지날 때는 반드시 신군의 집에서 10여 일씩 머무르곤 하였다. 그의 집에는 7칸짜리 대옥(大屋)이 있었는데, 집 뒤에는 온통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피어 있어 평생토록 자락(自樂)하였다. 《와유록(臥遊錄)》 ●..

우리 선조들 2021.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