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안 짓고 시골살기 53

사과가 빨갛다고 맛있는 것은 아니다.

추석이 다가온다. 과일, 그 중에서도 사과는 가장 일상적인 추석선물의 하나다. 백화점에서 선물용으로 파는 사과들은 하나 같이 빨갛고 크다. 따라서 값도 비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사과들은 보기에 먹음직하면 맛도 좋다는 속설을 깨뜨린다. 이 사과들은 애초에 맛있는 사과를 생산해내기 위해 재배된 사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과 특유의 향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그냥 보기에만 좋은 사과일 뿐이다. 각 지역 농협에서 사과를 수매할 때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색깔과 크기다. 겉모양만 좋으면 맛과는 상관없이 높은 등급을 받고 높은 가격을 받는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농사짓는 입장에서는 굳이 사과 맛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맛있는 사과보다는 보기 좋은 사과를 키워내야 더 소득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나무 ..

혼술

집에서 혼자 술 마신다는 사람 평생 이해 못하고 살다가 시골에 내려오고 난 후에는 혼술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시골에서 밖에 나가 술을 마신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성가신 일이다. 우선은 마땅한 술집 찾기가 어렵다. 혹시 있더라도 거리가 좀 있으면 오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여기저기 들리느라 시간 오래 걸리고 낮에도 뜨문뜨문 다니는 버스는 생각할 수도 없고 술 한 잔 마시자고 매번 몇 만원씩 왕복 택시비를 써야하는 것도 마뜩치 않다. 대리운전 부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친구 집에 가서 술을 마시는 날이면 그 집에서 자고 와야 한다. 그렇지만 민폐도 싫고 남의 집에 자는 것도 불편하다. 그래서 친구가 술 마시자고 불러도 자꾸 핑계대고 피할 궁리만 하게 된다. 시골에 내려올 때 매일 친구나 이웃과 어울려 ..

의미 없는 요일

시골에 내려오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 한편에 이런 그림을 그리면서 내려왔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사는 즐거움과 그 속에서의 한가하고 여유로운 삶. 때때로 먼 도시의 친구가 찾아와 함께 즐기는 꿈도 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사를 짓기 시작하는 때부터 그 꿈들은 헛된 망상이 된다. 직장에서는 업무마다 완료라는 개념이 있지만 농사는 수확할 때까지 ‘끝’이라는 개념이 없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농사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작물과 농법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하루 더 돌보고 안 한 것의 차이는 수확 때 나타나고 그 사실을 경험 있는 농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하루도 마음 놓고 쉴 수가 없다. 매일 같이 일을 해도 늘 못한 일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농사인 듯하다. 무슨 날이라고..

친구네 과수원

작년에는 사과나무에 꽃이 많이 피고 열매도 많이 달려 풍년을 예상했는데 장마철 오랜 비로 사과가 제대로 익질 못했다. 수확한 사과도 제 맛이 나지 않았다. 농사를 망친 해다. 금년에는 시작부터 꽃이 적게 열리더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꽃이 피는 시기에 냉해까지 입어 그야말로 사과가 듬성듬성 달렸다. 농촌생활 10여년에 이미 농부가 돼버린 친구는 그것만이라도 잘 자라기를 바라며 푹푹 찌는 날씨에도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농촌에 워낙 일손이 모자라다보니 또 불려갔다. 시나노스위트라는 품종의 사과다. 아오리와 같은 계통의 품종이라 하는데, 8월 하순부터 수확하는 아오리는 조생종이고 이 품종은 조금 늦게 9월 초에 수확하는 중생종이다. 관심이 별로 없어서 3년을 과수원에 드나들면서도 이제야 겨우 머릿속에 정리..

시골의 동양화

시골의 먼 산 골짜기에 구름이 일고 흩어지는 광경을 보게 되면 불현듯 동양화가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 옛 산수화의 화폭에 왜 그토록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구름과 연기의 자리를 넓게 할애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산 계곡을 따라 안개가 피어오르는 광경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마치 그곳에 신선이라도 살고 있을 것 같은 신비로움까지 더해진다. 혹시라도 산수화를 그릴 능력과 기회가 있다면, 산에 걸친 안개와 구름은 뺄 수 없을 것 같다.

송홧가루 날리는 풍경

바람이 산자락을 한번 훑고 지나가는 듯 싶더니 갑자기 건너편 산골짜기에서 불이라도 난 듯 연기가 확 피어올랐다. 노란색과 초록색이 합쳐진 색깔의 연기다. 알고 보니 송홧가루가 바람에 휘날리는 광경이었다. 송홧가루는 소나무의 꽃가루이다. 소나무는 이렇게 바람을 이용하여 가루받이를 한다. 온 산이 송홧가루로 온통 뿌옇다. 그래도 이런 장관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소나무가 많은 지역에서 살다 보니 만날 수 있는 진기한 풍경이었다.

봄의 다양한 초록 빛깔

초록동색(草綠同色). 처지가 같은 사람들끼리 한 편이 되어 어울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이 말의 원래 의미는 풀빛과 녹색(綠色)은 같은 빛깔이란 뜻이다. 잎이 한창 무성한 여름에는 짙은 녹색으로 산의 색깔이 거의 같지만, 봄 산은 다르다. 나무마다 처음 내는 나뭇잎 색깔이 달라, 같은 녹색 안에서도 울긋불긋함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을 모두 녹색이라는 한마디로 뭉뚱그리는 것은 너무 무신경한 말 같아 나무들에게 미안하다. 나뭇잎의 서로 다른 색깔 차이를 느끼든 못 느끼든 살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의 희비애락은 또 무엇이 특별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