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236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8

기방(妓房)은 조선 전기에는 없었다. 기방들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방이 발달한 것은 조선 후기, 특히 정조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방 갈 때 매번 하인에게 볏가마니 등짐지고 따르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니 우선 화폐의 유통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통상 엽전(葉錢)이라고 불리는 상평통보(常平通寶)는 인조때 처음 발행됐으나 결과가 나빠 유통을 중지했다. 그러다 숙종 때인 1678년 다시 발행을 시작했다. 현대에도 신용카드가 정착하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듯이 상평통보가 사회 전반에 걸쳐 화폐로 두루 통용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영조 때에 이르면 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졌겠지만 한편으로 다른 변수가 발생했다. 재위기간이 무려 51년 7개월이나 되었던 영조는 재위기간 중 근 50년..

우리 옛 그림 2018.12.06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6

같은 풍속화라도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은 다르다. 주제도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누구라도 보면 어떤 그림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신윤복의 그림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김홍도가 직선적이라면 신윤복은 은은하다. 김홍도가 남성적이라면 신윤복은 세밀하다. 김홍도는 선이 강하고 빠른 반면 신윤복의 선은 가늘고 유연하다. 김홍도는 주제를 살리기 위해 배경을 생략하는 구성을 즐겨 썼지만, 신윤복은 오히려 세밀한 주변 배경 묘사로 주제를 부각시켰다. 되도록 채색을 절제하며 주로 엷은 갈색을 사용한 김홍도에 비해 신윤복은 부드러운 담채 바탕에 빨강, 노랑, 파랑의 산뜻하고 또렷한 원색들을 즐겨 사용했다.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색의 사용이 세련되어 보인다. 신윤복이 이처럼 채색 감각..

우리 옛 그림 2018.12.01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5

영조 24년인 1748년. 숙종의 어진을 다시 제작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누구에게 이 일을 맡길 것인가를 두고 영조와 어진제작에 참여하는 신하들과 논의하는 중에 다시 조영석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세조어진 제작에 참여를 거부한 이후 조영석이 비록 친구가 부채 하나 그려달라고 해도 거절한다는 말을 듣고 영조는 “이번에도 어렵겠구나!”라고 했지만 어쨌든 조영석을 다시 불렀다. 이에 조영석이 또 다시 거부했다는 설도 있고, 이때는 조영석이 감동관(監董官)으로 참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왕이 이처럼 어진을 그리는 화가에까지 관심을 갖는 이유는 선왕(先王)의 어진을 제작한다는 것은 자손으로써 조상을 추모하는 효(孝)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개인적 일이기기도 하지만, 제작된 어진을 진전(眞殿)에 봉안하여 조종(祖宗)이 ..

우리 옛 그림 2018.11.26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4

성협이라는 화가가 그린 또 다른 말 징 박기 그림이다. 편자를 박는 모습은 앞의 두 그림과 다르지 않은데 징을 박는 일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노인이 등장한다. 왼 손의 모양으로 보아 일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노인은 누구일까? 말의 주인일까? 알 수 없다. 노인은 말과 상관없는, 그냥 길 가던 사람일 수도 있다. 버둥대는 말에 매달려 징을 박고 있는 사람들의 일하는 품새를 보니 어설퍼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노인은 그간 자신이 보아왔던 말 징 박는 일에 대한 안목을 바탕으로 훈수를 한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노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하던 일에 열중이다. 이런 상상으로 그림을 보면 그림의 제목을 이라 불러도 될 듯싶다. 기술의 발전..

우리 옛 그림 2018.11.22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3

조영석의 「사제첩(麝臍帖)」에 있는 그림들은 기존에 있던 그림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 종이의 재질이나 크기가 각각 다르고 초고(草稿), 그리다 만 것, 완성작 등이 뒤섞여 있다. 또 뛰어난 수작이 있는가하면 수준이 떨어지는 그림들도 있다. 그림의 종류로는 영모화(翎毛畵)와 초충도(草蟲圖)도 있으나 풍속화 쪽에 속하는 그림들이 가장 많다. 바느질, 새참, 목기 깎기, 마구간의 작두질, 여물 끓이는 마동, 마구간, 소, 젖을 빠는 송아지, 소젖 짜기 등의 이름이 붙은 그림들이다. 이라고도 불리는 김홍도의 그림은 어딘가 왁자지껄한 분위기인데 비하여 조영석의 그림은 조용하고 잔잔하다. 조영석이 서민의 삶을 옮기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면 김홍도는 거기에 살을 붙여 그림을 한층 풍성하고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조영석의 ..

우리 옛 그림 2018.11.18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2

조선 후기 풍속화의 문을 연 인물은 윤두서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우리의 풍속화라고 하기에는 그리 친근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우리 것 같지가 않고 어딘가 중국 냄새가 난다. 우리의 풍속화에서 이 중국 냄새를 걷어내고 후기 풍속화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 조영석이다. 조영석은 풍속화를 그리면서 여러 가지 색다른 시도를 했다. 배경을 과감히 생략하여 인물에 집중하면서 생동감을 주려 했고 등장인물에 해학적 요소도 가미하려고 했다. 과감한 구도도 선보였다. 그러면서 소위 전통화법이라는 종래의 중국풍과는 다른 그림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후에 불세출의 화가 김홍도에게까지 연결이 되었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 1686~1761). 오늘날 조영석의 화명(畵名)이 높지는 않지만, 흔히 ..

우리 옛 그림 2018.11.16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

풍속화하면 대뜸 떠오르는 인물이 김홍도와 신윤복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그림이 우리에게 친숙해져 있다는 증거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주목받는 다른 풍속화가들이 없었다는 얘기도 된다. 풍속화 또는 풍속도는 문자 그대로 풍속을 그린 그림이다. 좁은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궁궐이 아닌 민간의 생활상을 다룬 그림으로 한정하여 사인풍속도(士人風俗圖) · 서민풍속도(庶民風俗圖)로 나눌 수 있다. 사인풍속도는 사대부의 생활상을 그린 것으로 수렵도, 계회도, 시회도, 평생도 등이 주제가 된다. 반면 서민풍속도는 일반 백성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다룬 것이다. 궁중에서도 임금이 정치의 참고 자료로 삼기 위하여 서민 풍속화를 제작하였는데, 빈풍7월도(豳風七月圖)1, 경직도(耕織圖)2 등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여인들의 생..

우리 옛 그림 2018.11.08

동기창의 반전

동기창(董其昌, 1555 ~ 1636)은 문명(文名)이 높아 시인, 서가, 문인화가로서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감식(鑑識)에도 높은 안목을 가진 명나라 말 제일의 문인으로, 각 방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당대의 영향력뿐 아니라 그가 주장한 남북이종론(南北二宗論)은 이후 300년간 문인화 창작의 지침으로 작용하였다. 더욱이 청나라 4대 황제인 강희제(廣熙帝)와 6대 황제 건륭제(乾隆帝)가 그의 서풍을 좋아하였다는 사실은 중국과 조선에서 그의 명성을 더 한층 높이는 데 일조했다. 글씨는 처음에 안진경(顔眞卿)을 배웠다가 또 우세남(虞世南)을 배우고, 위진(魏晉)시대 대가들의 서풍(書風)을 드나들면서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그의 서체는 왕희지(王羲之)를 주종으로 삼으면서도 글씨 체형보다 내..

우리 옛 그림 2018.10.22

문인화 11

일제강점기의 미술사학자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 ~ 1944)선생은 동양예술에서 강조하는 도덕성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였다. “예술작품 그 자체에서 예술가의 행동을 곧 본다. 안진경(顔眞卿)1의 서(書)가 존귀한 것은 그 자체가 존(尊)함이 아니라 안진경 그 자신의 인물이 갸륵한 까닭이다. 모연수2의 화격(畵格)이 높았으나 동일기시(同日棄市, 동시대의 화가들과 같이 버려질 것)의 일구(一句)로 평가절하됨은 그 위인의 박덕(薄德)의 소치이다. 이와 같이 예술가와 예술작품은 동일한 행동가치를 갖고 있다. 이것이 동양예술의 도덕성이다.”3 문인화는 정신 우위의 그림이다. 소재나 기법 같은 형식 보다는 작가의 정신이 중요하고 그림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가가 중요하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書如其人]..

우리 옛 그림 201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