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53

병풍 33 - 수군조련도(水軍操練圖)

조선은 정유재란 이후 수조(水操)라는 이름으로 주기적인 수군(水軍) 훈련을 실시했었다. 수조에는 각도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주관하는 도수조(道水操)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주관하는 합조(合操)가 있었다. 도수조는 각도 수사(水使)가 예하의 각 진(鎭), 포(浦) 수졸과 병선을 징발하여 그 도(道)의 앞바다에서 해전에 필요한 제반훈련을 하는 것이다. 반면 합조는 통제사가 경상, 전라, 충청의 수군을 모아 합동훈련을 하는 것이다. 통상 도수조는 8월에 실시하여 추조(秋操)라 하고 합조는 2월에 실시하여 춘조(春操)라 불렀다. 수조는 선조37년인 1604년부터 체계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하여 1605년에 추조, 1606년에 춘조를 시행한 것으로 전한다. 이때의 훈련에 참석했던 전선(戰船)은 불과..

우리 옛 병풍 2021.03.02

병풍 32 - 종정도(鐘鼎圖)

종정도(鐘鼎圖)에서의 종정(鐘鼎)은 울리는 종과 음식을 삶는 솥[鼎]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고대 중국에서 제례 때 사용하던 금석(金石)붙이의 의례기(儀禮器)를 의미한다. 이러한 고대의 종정(鐘鼎)에는 공적을 송축하는 글이나 사물의 내력을 기록한 글 등이 새겨졌었는데 이를 명(銘)이라고 한다. 은(殷)ㆍ주(周) 시대의 종정의 명(銘)에 쓰인 글자는 고문, 주문(籒文), 대전(大篆)과 같은 한문 자체(字體)로 종정문자 혹은 종정고문(鍾鼎古文)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들 명문(銘文)은 동양 금석학(金石學)의 대상이었다. 종정도는 기명도(器皿圖) 또는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와 유사하게 고동기(古銅器)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기물의 형태만이 아닌 기물에 새겨진 문자도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진 그림이다...

우리 옛 병풍 2021.02.02

병풍 31 -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궁궐에서 사용된 물품 가운데 그 권위를 가장 확실하게 나타내는 것이 일월오봉도병(日月五峯圖屛)이다. 일월오봉도 병풍은 바로 왕을 뜻하는 상징물이었다. 일월오봉도 병풍은 왕이 있는 곳에는 실내외를 막론하고 반드시 어좌(御座) 뒤에 일월오봉도가 배설되었다. 또한 왕이 서거했을 때 신주를 모셔 두는 혼전(魂殿),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봉안하는 공간에도 일월오봉도를 배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궁중에서 제작된 모든 의식의 그림에는 왕의 모습 대신 비어있는 어좌(御座) 뒤의 이 일월오봉도 병풍을 통하여 왕이 참석했음을 나타냈다. 일월오봉도병은 궁중에서 훈련된 화원들이 그린 최고 수준의 그림이다. 짙은 채색과 정교한 필선으로 소재 구성의 엄격한 좌우대칭을 통하여 화려하면서도 높은 품격이 돋보이도록 제작된 그림이..

우리 옛 병풍 2021.01.30

병풍 30 - 효제문자도(孝悌文字圖)

글자의 의미와 관계있는 고사(古事)의 내용을 한자 획 속에 그려 넣어 서체를 구성한 그림을 문자도(文字圖)라고 한다. 위 글자의 굵은 획 속에는 그림과 함께 글자가 들어있다. 빨간 원 안에 검은색으로 대순경우역산(大舜耕于歷山), 왕상구빙출리(王祥扣氷出鯉), 맹종읍죽(孟宗泣竹), 내자롱추친측(萊子弄雛親側) 등의 글자가 보인다. 이 말들은 모두 ‘효(孝)’와 관련된 고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대순경우역산(大舜耕于歷山)’은 아버지와 계모가 수도 없이 자신을 죽이려했는데도 끝까지 효를 다한 중국의 전설적 5제(五帝)의 하나인 순(舜)임금에 관한 고사다. 순임금이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지을 때 그의 효성에 감동한 코끼리가 와서 밭을 갈아주고 새들이 날아와 김을 매주었다 내용이다. ‘왕상구빙출리(王祥扣氷出鯉)’는..

우리 옛 병풍 2021.01.09

병풍 29 -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는 여러 모양으로 도안된 ‘목숨 수(壽)’ 자와 ‘복 복(福)’ 자를 반복해서 구성하여 화면을 채운 도안이다. 통상의 백수백복도는 두 글자가 종횡으로 열을 맞추어 반복해서 그려진다. 백수백복(百壽百福)의 ‘일백 백(百)’자 역시 꼭 100이란 숫자 의미보다는 ‘온갖’이나 ‘많다’는 의미를 갖는다. 백수(百壽), 백복(百福)은 장수와 다복을 상징한다. 이 도상은 애초에 중국에서 그림 속에 목숨 수(壽)자를 크게 한 자 쓰고, 그 안에 다시 수(壽)자를 작게 100자 써서 길상의 뜻으로 삼은 백수도(百壽圖)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한다. 조선에서는 《광해군일기》광해 2년(1610년) 4월 16일자 기사에 처음 백수도(百壽圖)라는 말이 등장한다. 【남평(南平) 현감 조유한(趙維韓)이 백수도(..

우리 옛 병풍 2021.01.02

병풍 28 - 군선도(群仙圖)

군선도(群仙圖) 또는 팔선도(八仙圖)는 8명의 신선이 서왕모의 요지연(瑤池宴)에 참석하기 위하여 각자의 지물(持物)을 갖고 바다를 건넜다고 하는 ‘팔선과해 각현신통(八仙過海 各顯神通)’의 고사로부터 나온 도상(圖像)이다. 중국 원(元)나라 때부터 그려졌다고 한다. 팔선도(八仙圖)라고 하더라도 통상 팔선(八仙) 외에 다른 신선들도 같이 그려지기 때문에 군선도(群仙圖)라고도 부른다. 팔선(八仙)은 명(明)대 이후에 종리권(鍾離權), 장과로(張果老), 한상자(韓湘子), 조국구(曹國舅), 여동빈(呂洞賓), 이철괴(李鐵拐), 남채화(藍采和), 하선고(河仙姑)로 굳어졌다. 이들 팔선은 도교의 다른 신선들과는 달리 장군, 황제의 친척, 걸인, 도사 등의 신분으로부터 신선이 된 까닭에 각기 인간세계에서의 고사(古事)들..

우리 옛 병풍 2021.01.01

병풍 27 - 구운몽도(九雲夢圖)

숙종 13년인 1687년 5월 1일, 조사석(趙師錫)이란 인물이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었다. 《숙종실록》에 이 기사를 쓴 사관은 이 일을 두고 “온 세상이 모두 궁중 깊은 곳의 후원에 의한 것으로 여겼었다”라고 적었다. ‘궁중 깊은 곳’이라는 것은 당시 숙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인 귀인(貴人) 장옥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즉, 조사석이 장옥정 덕분에 우의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의정에 임명된 조사석도 이런 말이 돌고 있음을 알고 부끄럽게 여겨 7번이나 거듭하여 사직하는 차자와 상소를 숙종에게 올리고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결국 숙종은 7월 25일 우의정을 다른 인물로 교체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근 두 달이 지난 9월 11일, 당시 경연청(經筵廳) 정2품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있던 김만중(金萬重)이 경..

우리 옛 병풍 2020.12.30

병풍 26 -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

통상 ‘삼국지’로 불리고 있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읽히던 중국소설 중의 하나였다. 「삼국지연의」는 16세기 초에 조선에 전해진 이후 원문(原文)과 한글 번역본으로도 간행되면서, 사대부뿐만 아니라 부녀자와 민간에서도 폭넓게 읽혀졌다. 「삼국지연의」가 조선시대부터 널리 읽히고 확산된 것은 이 소설이 충효(忠孝)와 의(義)를 강조하는 조선의 유교적 지배이념과 일치된 때문으로 해석된다. 같은 이유로 「삼국지연의」는 조선시대에 그림으로도 자주 그려졌다. 초기의 그림 소비층은 왕이나 사대부 층이었다. 화첩, 궁궐 내 벽화, 족자 등으로 그려진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는 내용 면에서 소설의 전체적인 장면보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주로 그려졌다고 한다. 왕의 ..

우리 옛 병풍 2020.12.29

병풍 25 - 성학십도(聖學十圖)

조선의 두 거유(巨儒)인 퇴계 이황(李滉, 1501 ~ 1570)과 율곡 이이(李珥, 1536 ~ 1584 )는 이기심성론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황(李滉)의 학설을 따르는 영남지방의 영남학파와 이이의 학설을 따르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황해도, 충청도, 호남지방의 기호학파라는 학맥이 생겼다. 이이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선 말기까지 정권을 장악했던 서인(西人)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으며 추종자들로부터 ‘동방의 대현(大賢)’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 어머니까지도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우상화되는 영광을 누렸다. 반면 당파적으로는 주로 동인들에 의하여 추종되었던 이황은 조선 안에서보다는 밖에서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없다.’거나 '고금절무(古今篩無)의 진유(眞儒)..

우리 옛 병풍 2020.12.28

병풍 24 -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

무이구곡은 조선의 유학자들 대개가 동경하는 장소였지만 또한 조선의 유학자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 궁금증을 다소나마 해소시켜 줄 수 있는 것이 무이구곡도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내내 그려지며 널리 감상되었던 것이다. 무이구곡도가 16세기부터 조선에 들어온 이후, 수용기인 16세기를 지나 17세기에 이르면 조선의 유학자들은 무이구곡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벗어나 주희의 삶을 실천하는 단계로 들어선다. 주희를 따라 한적한 곳에 은거하면서 주변의 명승을 골라 구곡(九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선 유학자들은 이를 주자의 무이구곡에 비견하여 주자의 학자적 삶을 적극 계승하는 방편으로 여겼다. 이는 독창적인 조선의 구곡문화가 태동하는 토대가 되었으며 또한 조선식 구곡도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이구곡에 ..

우리 옛 병풍 2020.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