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53

병풍 43 - 오륜행실도 1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의 비전(vision)은 성리학적 이상세계였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이 선(善)하다는 전제하에 유교적인 교화 정치의 이론적 근거를 찾는 학문인 동시에 우주 만물의 원리를 밝혀내려는 철학적 학문이기도 하다. 비록 정도전은 그 꿈을 직접 이루지 못했지만 성리학은 이후 조선을 다스리는 중심 사상이자 사회를 움직이는 규례가 되었다. 아울러 삼강오륜(三綱五倫)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지켜야 하는 실천적 도덕 윤리가 되어야 했다. 그런 조선에서 세종 때에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세종은 풍속을 교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임금과 신하[君爲臣綱], 어버이와 자식[父爲子綱], 남편과 아내[夫爲婦綱]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三綱)에 대한 서적을 발행하여 백성들이 항상 읽게 하는..

우리 옛 병풍 2021.11.03

병풍 42 - 주부자시의도 2

《주부자시의도》의 5폭은 유실되었다. 흐름상 5폭은 '수신(修身)'이 주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5폭 [주희의 원시 : 入瑞巖道間(서암 길에 들어) 原韻] 淸溪流過碧山頭 맑은 계곡 흘러서 푸른 산모퉁이를 지나고 空水澄鮮一色秋 하늘 맑고 물 맑으니 한 가지 가을 빛깔. 隔斷紅塵三十里 세속 티끌 삼십 리나 멀리 바깥에 있나니 白雲黃葉共悠悠 흰 구름 누런 잎만 아득히 멀리 흘러가네. [웅화의 주(註)] 審其幾 而無五 則身自修 "(선악의 미세한) 기미를 살펴 다섯 가지 편벽됨이 없다면 몸은 절로 닦여진다. ▶다섯 가지 편벽 : 친애(親愛), 천악(賤惡), 외경(畏敬), 애긍(哀矜), 오타(敖惰). [정조의 화운시(和韻詩)] 伯鐵王金好點頭 패철 왕금에 대해선 좋이 수긍하거니와 三皇五帝一春秋 삼황과 오제는 ..

우리 옛 병풍 2021.10.26

병풍 41 - 주부자시의도 1

주자(朱子)는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朱熹, 1130 ~ 1200)를 칭송하여 부르는 호칭이다. 성 끝에 ‘子’자를 붙이게 되면 ‘스승’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런데 주희를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주희를 ‘주부자(朱夫子)’로 부르기도 하였다. 부자(夫子)는 덕행(德行)이 높아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가리키는 높임말이다. 이전까지는 공부자(孔夫子)라 하여 공자(孔子)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던 호칭이었다. 그러니 주부자(朱夫子)는 주희를 공자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 호칭이다. 주자는 흔히 성리학을 집대성한 도학자로만 알려졌지만 옛 학자들이 그랬듯이 시인으로서의 역량도 뛰어났었다고 한다. 다만 그의 시는 자연이나 무상한 삶을 읊는데 그치지 않고 시속에 학문적 메시지를 담는 경향이 있었다. 김홍도..

우리 옛 병풍 2021.10.25

병풍 40 - 난정수계도

353년 3월 3일,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 동진(東晋)의 우군장군(右軍將軍)이자 회계내사(會稽內史)로 있던 왕희지(王羲之)가 자신의 관할지역인 회계(會稽) 산음현(山陰縣)의 난정(蘭亭)에서 시회(詩會)를 가졌다. 난정(蘭亭)은 절강성(浙江省) 소흥부(紹興府)의 성(城)에서 서남쪽으로 27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는데, 주변은 산이 높고 험하며 수풀이 무성했지만 죽림이 있고 맑은 냇물이 있는 곳이었다. 왕희지를 비롯하여 왕희지의 네 아들을 포함한 42인이 이곳에 모여 물가에 가서 몸을 씻어 상서롭지 못한 것을 씻어내는 불계(祓禊) 의식을 가진 뒤,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26명의 문사가 37수의 시를 지었고, 이 시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난정집(蘭亭集)」이다. 왕희지는 이 「난정집」의 머리말인 서(..

우리 옛 병풍 2021.10.22

병풍 39 - 금강산도

보지도 못한 중국의 산수를 흉내 내고 상상 속의 이상적 풍경만 그리던 조선에서 우리 강토의 풍경을 조선적 화풍으로 그리는 진경산수화의 물꼬를 튼 것은 겸재 정선이다. 더욱이 그의 금강산 그림은 이후 문인이나 전문적인 화원을 막론하고 금강산 그리기 열풍에 빠져들게 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한 열기는 민간으로도 확대되면서 금강산을 주제로 한 많은 민화들이 제작되었다. 문인이나 전문 화원들의 그림이 감상을 목적으로 첩(帖)이나 축(軸)의 형태로 제작된 반면, 민간에서는 장식을 목적으로 한 병풍으로의 제작이 활발하였다. 민화 금강산도는 처음에는 정선이나 김홍도의 진경산수화를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도상의 변용과 자유로운 표현 양식을 통하여 창의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또한 내용면..

우리 옛 병풍 2021.10.10

병풍 38 - 군접도(群蝶圖)

조선에서 나비를 그린 화가들은 적지 않다. 심사정과 김홍도도 그렸고 조희룡도 그렸다. 그 외에도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여러 화가들의 작품들이 지금도 전한다. 나비는 대개 꽃을 그릴 때 짝을 맞추기 위해 그려지지만, 민화에서는 나비의 한자인 접(蝶)자가 80노인을 뜻하는 ‘늙은이 질(耋)’자와 그 중국어 발음이 같아,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도 그려졌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채색화가 늘어나면서 나비의 아름다운 색과 문양 그 자체를 재현해내려는 화가들의 그림들이 이어졌다. 꽃과 어울린 형형색색의 나비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배가하여 화려한 장식화로서의 요소를 갖추게 되면서 병풍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예전의 화조도에서 나비가 있어도 꽃을 돋보이기 위한 부수적 요소였던 반면, 화가의 의중이..

우리 옛 병풍 2021.03.22

병풍 37 - 평양성도(平壤城圖) 4

대동문 앞의 나루터가 많은 배들로 꽤나 번잡해 보인다. 사람을 태워 나루를 건너는 배들, 조운하는 배들과 함께 땔감을 가득 실어 나르는 배들도 보인다. 평양 동쪽을 지나는 대동강은 백두산 남서쪽의 낭림산맥에서 발원하는 길이 438㎞의 강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긴 강이다. 서쪽에서 평양을 감싸고 흐르는 보통강도 결국엔 대동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7폭에 평양 내성 남쪽과 서쪽 성벽이 보인다. 중앙에 내성의 남문이 보이는데 에 주작문(朱雀門)으로 되어있던 이름 대신 그냥 남문(南門)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내성의 남문을 마주하여 중성(中城)을 사이에 두고 흙으로 쌓은 성곽에 세워진 함구문(含毬門)은 중성의 동남문이다. 중성의 동쪽 마을로 통하는 문이다. 그 위쪽의 정양문(正陽門)은 중성의 남..

우리 옛 병풍 2021.03.17

병풍 36 - 평양성도(平壤城圖) 3

능라도(綾羅島)는 대동강 가운데 있는 섬이다. 예로부터 비단 천을 펼친 것과 같이 아름답고 물 위에 뜬 꽃바구니 같다는 칭송을 들으며 비록 8경에는 들지 않지만 평양의 또 다른 형승(形勝)으로 꼽혀왔다. 뒤에 보이는 전금문(轉錦門)은 북성의 남쪽 문이다. 외부 객들이 내성에서 북성을 찾을 때는 배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금전문을 통해 북성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평양성 내성의 북쪽 지역이다. 앞에 보이는 장경문(長慶門)은 평양성 내성의 동북문이고 뒤쪽의 칠성문(七星門)은 북문이다. 칠성문에서 성곽을 따라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겨 보면 3폭 맨 끝쪽에 기자릉(箕子陵)이 있다. 기자(箕子)는 은(殷)나라의 성인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동쪽으로 도망한 끝에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

우리 옛 병풍 2021.03.15

병풍 35 - 평양성도(平壤城圖) 2

평양은 조선시대 한성 다음의 제2도시였다. 평양은 조선시대 평안도(平安道)의 군사와 재정을 관할하는 감영(監營)이 있어 물산(物産)이 모이는 중심지였고, 중국으로 오고가는 사행길의 핵심 도시로써 중국과의 국제무역으로 경제유통이 가장 활발한 도시이기도 했다.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평안감사는 조선시대 가장 선망되는 관직이었다. 감사 중에서도 평안감사가 중시되고 선호된 이유는 병자호란 이후 북방의 방어를 위한 국가적 지원이 평안도가 다른 변방(邊方)에 비해 넉넉한 이유도 있었다. 전쟁에 대비한 군비(軍費)로 모아두었던 물자가 전쟁의 위협이 줄어들면서 평안도로 흡수됨으로써 평안도는 조선의 어느 곳보다 재정이 풍부한 지역이 된 것이다. 이러한 평안도의 행정(行政), 사법(司法..

우리 옛 병풍 2021.03.14

병풍 34 - 평양성도(平壤城圖) 1

현재의 평양과 조선시대의 평양(平壤)은 모두 같은 곳이지만 우리가 갖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지금의 평양은 어딘가 암흑과 공포의 도시 같은 느낌이 앞서지만 조선시대의 평양이라고 하면 대동강이나 부벽루가 떠오른다. 그렇지만 대개가 말만 들었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 아는 사람도 드물다. 그만큼 우리에게 평양은 이름은 익숙하지만 미궁의 도시다. 조선시대의 평양은 조선과 중국을 잇는 사행로의 중심에 있던 도시였다. 영조 때에 조선 각 읍의 읍지(邑誌)를 모은 책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평양을 “서울까지 582리로 엿새 반 거리”라고 했다. 또한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평양의 형세를 “북쪽은 산을 등지고 3면이 물에 막혀 있다”라고 하였다. 이 그림을 보면 대동강이 평양성 아래쪽에서 동서 방향으로..

우리 옛 병풍 2021.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