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138

옛날이야기 8 - 암행어사 2

암행어사가 받는 봉서(封書)는 왕으로부터 받든 승지로부터 받든 비밀유지를 위하여 안의 내용이 보이지 않게 되어있다. 봉서의 겉표지에는 지정된 성문 밖에서 개봉하라는 ‘도OO문외개탁(到OO門外開坼)’이라는 글귀가 붙는다. 봉서에는 감찰할 군현(郡縣) 지역과 암행어사의 임무와 직권에 대한 내용을 담는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임무는 주로 봉서에 적혀있고, 사목(事目)에는 암행어사의 직무상의 준수 규칙과 염찰 목적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봉서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숙종 때의 문신이었던 박만정(朴萬鼎, 1648∼1717)은 숙종 22년인 1696년 3월에 황해도 암행어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리고 3월 7일에서 같은 해 5월 12일 복명할 때까지의 65일간 암행어사로서 탐문, 체험한 내용을 기록한「해서암행..

우리 옛 뿌리 2019.06.17

옛날이야기 6 - 이서구 설화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과 함께 사가시인(四家詩人)의 명성을 얻었던 척재(惕齋) 이서구는 다섯 살 때인 1758년 (영조 34)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래서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며 외삼촌에게 글을 배웠다. 외가에서 7년을 지내고 12세가 되던 1765년에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경전을 읽기 시작했는데, 17세가 되던 1770년에는 귀양에서 돌아온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그러나 21세 때인 1774년 가을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1785년(정조 9)부터는 벼슬길이 탄탄대로였다. 시강원 사서를 지냈고, 홍문관 교리를 거쳐 1787년 경상 우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를 탄핵하였다. 이어 1795년까지 승정원 승지,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물론 때로 모함을 받아 유배..

우리 옛 뿌리 2019.06.06

옛날이야기 5 - 백탑과 소완정

‘백탑파’ 또는 ‘북학파’라고 불리는 18세기 지식인 모임이 있었다. 이들이 지금의 종로2가 탑골공원 부근에 모여 살았다고 해서 '백탑파(白塔派)'라고도 하고, 청나라의 선진 문명과 제도를 배워 조선을 부국강병하게 하자는 주장을 폈기 때문에 '북학파(北學派)'라고도 불렸다. 이 모임에는 18세기 조선의 실학과 문예를 몇 단계 끌어올린 대학자와 문장가들이 여럿 있었다. 이덕무(李德懋, 1741년생), 유득공(柳得恭, 1749년생), 박제가(朴齊家, 1750년생), 이서구(李書九, 1754년생)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 모임의 정신적 지주이자 좌장(座長)은 1737년생인 연암 박지원(朴趾源)이었다. 이들 ‘백탑파’ 인물들의 시문집인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의 서문(序文)을 박제가가 썼는데, 박..

우리 옛 뿌리 2019.05.26

옛날이야기 4 - 화사(畵師) 김명국

김명국(金明國)은 인조 때 사람으로, 그의 가계가 어디인지 계보는 알 수 없고, 스스로 호를 연담(連潭)이라 하였다. 그의 그림은 옛 것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 얻어진 것이었다. 인물과 수석(水石)을 더욱 잘 그렸는데, 수묵(水墨)과 담채를 잘 쓰고 풍취(風趣), 신운(神韻), 기개, 격조를 잘 이루었고, 세속의 연지와 분칠로 화려하게 꾸미는 법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익살스런 농담을 잘 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한 번에 두어 말은 거뜬히 마셨다. 반드시 흠뻑 취해야만 붓을 휘둘렀는데, 필치가 마음대로 뻗을수록 그림 속 광경이 융화되어, 술이 뚝뚝 떨어지듯 취했을 때 신운(神韻)이 흘러넘쳤다. 대개 김명국의 마음에 든 작품은 술 취한 뒤에 그린 것이 많다고 한다. 그의 집으로 가..

우리 옛 뿌리 2019.05.23

옛날이야기 2 - 여항문학(閭巷文學)

조선시대 중인(中人)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들이 주로 살던 거주지가 한양의 중간 지대이므로 중인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고, 당파에 속하지 않은 중립적 계층이라는 의미에서 중인이 됐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는 양반도 평민도 아닌 중간 계층이라는 의미에서 중인이라 불렀다는 설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중인의 형성 시기는 중인 족보가 한말(韓末)부터 거슬러 올라가 10대까지 추적되고, 또 중인 스스로도 300년 설을 내세웠으므로, 16세기 후반부터 세습화의 길을 걷고, 17세기에 하나의 계층으로 성립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의 신분제는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거치며 전환점을 맞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전란 중의 노비문서와 군적, 호적 등이 소각되고 분실되면서 많은 ..

우리 옛 뿌리 2019.05.17

옛날이야기 1 - 패관문학(稗官文學)

조선시대 가장 개혁적인 왕으로 기억되는 정조가 중국으로부터 고증학과 패관소설 등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문집과 일부 서적의 수입을 금한 일이 있다. 정조는 당시 유행하던 소설체 문장이 잡문체로, 이러한 문체가 전통적인 고문(古文)식의 문체를 오염시킨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이를 두고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문학과 사상의 탄압이라고 비난하는 주장도 있고 노론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조처였다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정조가 문풍(文風)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은 사실이다. 정조 11년인 1787년의 어느 날 밤 정조가 예문관을 방문했는데, 숙직을 서고 있던 김조순과 이상황 등이 소설책을 읽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청나라의 '평산냉연(平山冷燕)1'이라는 소설이었는데, 정조는 크게 화를 내면서 책을 불태우고..

우리 옛 뿌리 2019.05.14

풍류와 가락 13 - 양반에서 중인으로

학자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그런지 다산 정약용이 말을 타고 달린다는 것은 사극에서나 나올 장면처럼 잘 상상이 안 되는 일인데, 그가 남긴 에는 그가 말을 타고 달린 기록이 나온다. 그것도 풍류를 즐기러 가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세검정이 자랑하는 빼어난 경치란 소나기가 내릴 때 폭포처럼 사납게 굽이치는 물살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가 막 내리기 시작하면 대개 수레를 적셔가며 교외로 나가려 하지 않고, 비가 갠 후에는 계곡의 물 역시 이미 그 기세가 꺾이고 만다. 이 때문에 세검정은 도성 근처에 있는데도, 성 안사대부 가운데 정자가 자랑하는 빼어난 경치를 만끽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신해년(정조 15년, 1791년) 여름날, 나는 한혜보를 비롯한 여러 사람과 남부 명례방(明禮坊)1에..

우리 옛 뿌리 2019.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