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138

풍류와 가락 11 - 풍류의 소양

풍류객 심용이 죽었을 때 모인 예인들이 “공은 풍류를 즐기는 사람 중에서 우리를 알아주는 사람이었고 또 소리를 아는 사람이었소.” 라고 했다. 이 말은 풍류를 즐기는 선비와 사대부들 중에서도 음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사실과 또 예인들의 음악을 즐길지언정 그들을 제대로 대접해주는 사람도 드물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이정보나 서평군 정도로 음률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갖는 것은 특별한 경우였을 것이다. 또한 당시의 예인들은 중인, 양인 때로는 천민 출신까지 있었으니 많은 사대부들은 그들을 아랫것 정도로 여기고 대했을 것이다. 심평이나 서평군처럼 그들과 가까이 하여 어울리는 것은 양반으로서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세춘과 계섬 일행이 평안감사 취임연에 가서는 신명나게 ..

우리 옛 뿌리 2019.04.30

풍류와 가락 10 - 명창(名唱)과 후원자들

이익(李瀷)은『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기생의 유래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양수척(揚水尺)은 곧 유기장(柳器匠)으로서, 고려가 후백제를 칠 때 가장 다스리기 힘들었던 집단이었다. 이들은 원래 소속도 없고 부역에 종사하지도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버드나무로 키, 소쿠리 등을 만들어 팔고 다녔다. 후에 이들이 남녀노비로서 읍적(邑籍)에 오르게 될 때, 용모가 고운 여자를 골라 춤과 노래를 익히게 하여 기생을 만들었다. 따라서 기(妓)와 비(婢)는 원래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고, 그 중 비가 기보다 먼저 발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계섬도 노비의 신분에서 이름 높은 가기(歌妓)가 되었다. 그 과정에는 이정보 같은 후원자의 도움이 있었다. 계섬보다 약 200년 앞선 때에 노비의 신분에서 당대의 명창 ..

우리 옛 뿌리 2019.04.27

풍류와 가락 9 - 가기(歌妓) 계섬

심용과 그 일행이 평양감사 회갑연에서 펼쳤던 공연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당대의 평양 사람들에게는 내용 자체도 파격적이었던 것 같다. 신광수의 1’에 있는 연작시 108수 가운데 제 15수에 당시 평양에서 공연하던 이세춘의 모습을 이렇게 읊었다. 【初唱聞皆說太眞 至今如恨馬嵬塵 一般時調排長短 來自長安李世春 처음에 노래 듣고는 다 태진(양귀비)을 말하는데 마외언덕에서 죽은 태진의 죽음을 한하는 것 같다. 일반 시조에 장단을 넣어 부르는 것은 한양의 이세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이때 이세춘은 평양 사람들에게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를 선보인 것이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같은 노래만 듣던 사람들이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처음 들었을 때, 아니면 발라드만 알던 사람이 힙합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정도의 충격이..

우리 옛 뿌리 2019.04.24

풍류와 가락 8 - 풍류객 심용

한 도위(都尉)가 압구정(狎鷗亭)에 놀러갔는데, 가희와 금객을 모두 불러 많은 손님들을 맞이한 후 질탕하게 마음껏 놀았다. 풍취 있는 정자의 가을밤, 달빛이 물결에 비치니 흥취가 크게 일었다. 그 때 갑자기 강 위에서 맑고 낭랑한 퉁소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바라보니 한 작은 배가 물에 떠 오고 있었는데, 노옹(老翁)이 머리에는 화양건(華陽巾)1을 쓰고 몸에는 학창의(鶴氅衣)2를 입고, 손에는 백우선(白羽扇)을 들고서 백발을 표표하게 날리고 있었으며, 청의(靑衣)를 입은 동자들이 좌우에서 노옹을 모시고 옥소(玉簫)를 불고 있었고, 배 위에서는 한 쌍의 학이 날개를 펄럭이며 춤을 추고 있었으니, 이는 분명 신선(神仙)이었다. 생가(笙歌)가 그치자 많은 사람들이 난간에 빽빽이 서서 혀를 차며 부러워하였다. ..

우리 옛 뿌리 2019.04.22

풍류와 가락 7 - 귀거래사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그려낸 와 함께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두고두고 사대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또 다른 도연명의 작품이 이다. 는 도연명이 41세 때인 서기 405년, 마지막 관직이었던 팽택현(彭澤縣)의 현령(縣令) 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심경을 읊은 시(詩)이다. 도연명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사연에 대하여는 양(梁)나라의 소통(蕭統)이 쓴《도연명전 (陶淵明傳)》의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다. 도연명이 현령이 된지 얼마 안 되어 현의 상급관청인 군(郡)에서 독우(督郵, 지방 감찰관)가 팽택현에 온다는 통보가 왔다. 그러자 현청에서 부리는 종 하나가 도연명에게 허술하게 대했다가는 큰 야단을 맞는다며 옷을 단정히 입고 공손한 태도로 맞이해야 한다고 귀띔을 했다. 그러자 도연명은 큰 한숨..

우리 옛 뿌리 2019.04.20

풍류와 가락 6 - 이상향(理想鄕)과 무릉도원

고대 중국 사람들이 꿈꾸던 낙원의 이름은 낙토(樂土)였다. 낙토(樂土)는 말 그대로 슬픔도 분노도, 또 포학한 정치도 없는 '즐거운 땅'이다. 그런가하면 깊은 산 인적이 닿지 않는 곳에 실재한다고 믿은 낙원을 동천복지(洞天福地)라고 했다. 명산이나 경치가 좋은 장소에는 신선이 사는 숨은 낙원이 있다는 사상에서 나온 말이다. 동천(洞天)은 계곡 깊은 곳이나 동굴 속에 있는 별세계(別世界)이고, 복지(福地)는 인간 세상의 재해(災害)가 미치지 않는 비옥한 땅을 뜻한다. 굶주림도 없고 전쟁도 피할 수 있는 선택받은 땅은 승지(勝地)이다. 우리나라에도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이런 승지(勝地)가 열군데 있다는 전설이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 왔는데, 십승지지(十勝之地)가 그런 곳이다. 노자는 자신이 살던 동주(東周) ..

우리 옛 뿌리 2019.04.15

풍류와 가락 5 - 농암 이현보

지금은 안동호로 인해 그 자취를 볼 수 없지만 옛날 청량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의 도산서원 앞을 가로지르던 분강(汾江)은 그 물줄기를 따라 선비들의 청신한 풍류 활동이 펼쳐졌던 풍류의 현장이었다고 한다. 그 출발은 농암(聾巖) 이현보였다. 벼슬을 마치고 노인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이현보는 남은 세월을 풍류로 풀어냈고, 그 전통은 후대까지 이어졌다. 이현보가 쓴 〈비온 뒤 배를 띄우고 점석에서 노닐며 퇴계에 차운하다(雨餘泛舟遊簟石次退溪)〉라는 글에는 이현보가 즐겼던 풍류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현보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온 지 5년이 지난 1547년 7월 어느 여름날 저녁으로, 그가 여든한 살 때이다. 【점석(簟石)의 놀이를 이황과 황준량(黃俊良)1, 그리고 여러 자제와 함께했다. 조그만 배에 올라 ..

우리 옛 뿌리 2019.04.13

풍류와 가락 4 - 강호가도(江湖歌道)

널리 알려진 이방원의 와 정몽주의 도 서로 글로 써서 주고받은 것이 아니다. 역성(易姓)혁명을 준비하던 측의 이방원이 온건개혁파였던 정몽주(鄭夢周)를 회유하기 위하여 마련한 자리에서 이방원은 이렇게 시조를 지어 불렀다.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료 만수산(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하리 우리도 이갓치 얼거져 백년(百年)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이 직설적인 말을 피하고 에둘러서 자신의 뜻을 노래하자 정몽주는 직설적이고 단정적인 말로 자신의 굳은 의지와 결기를 나타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一百番)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 결과 정몽주는 돌아가는 길에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살해되는 끔찍한 ..

우리 옛 뿌리 2019.04.11

풍류와 가락 3 - 가사, 시조, 황진이

정가(正歌) 중 가사(歌詞)는 일반적으로 긴 노래 가운데서 고상하게 치는 한정된 작품을 가리킨다. 즉, 가사체(歌辭體)의 긴 사설을 일정한 장단에 담은 느린 노래이다. 가곡과 시조는 동일한 선율 위에 다른 시조시를 얼마든지 얹어 부를 수 있으나, 가사는 그 노랫말에 맞는 곡조가 정해져 있다는 특징이 있다. 가곡과 같이 감정을 절제하여 고아(古雅)하게 표출하는 정악(正樂)적인 요소와 서도창법 등의 민속악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또한 시조와 같이 장고 장단에 의하여 혼자 부르는 것이 원칙이지만, 반주를 할 경우에는 피리, 대금과 장구로 편성하고 때로 여기에 해금이 같이 연주되기도 한다. 농암(聾巖) 이현보(1467 ~ 1555)가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있는 어부사(漁父詞)를 개작한 것을 가사의 효시로 ..

우리 옛 뿌리 2019.04.08

풍류와 가락 2 - 삭대엽과 가곡

현재 전하는 가곡의 역사는 세조 때 음악을 집대성한 『대악후보(大樂後譜)』에 실려 있는 만대엽(慢大葉)에 뿌리를 두고, 그 만대엽의 모체는 고려 의종 때 정서(鄭敍)가 지은 "정과정"(鄭瓜亭)의 삼기곡(三機曲)이라 한다. 즉 삼기곡에 만기(慢機), 중기(中機), 급기(急機)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만(慢)대엽, 중(中)대엽, 삭(數)대엽이 파생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에 유행하던 만대엽은 선조 무렵부터는 거문고 독주용으로 바뀌어 연주되었다. 그러나 숙종 때부터 중대엽(中大葉)이 유행하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다가, 삭대엽이 유행하던 영조 무렵에는 아주 사라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년 ~ 1763)의 평소 글을 모아 놓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우리나라 가사에는 대엽조(大葉..

우리 옛 뿌리 2019.04.06